<135화>
신성의 격
남만혁 고치화 99일째.
“안타깝구나.”
그간 소마의 주먹을 이용해 버틴 그레이스였으나 오늘, 모든 권능을 가져온 발파록에겐 어떤 수도 통하지 않았다.
그레이스를 포함해 다섯공동에 모인 전원은 오늘이 마지막 대결임을 직감했다.
“하위종치고는 훌륭했노라.”
공동의 천장에 박힌 채 반쯤 눈이 감긴 그레이스의 시선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파록이 아닌, 공동의 구석에 자리한 고치에 닿아 있었다.
“…혁.”
“유언이라면 천천히 들어주마. 이 몸은 그대 같은 전사에게 관대하니.”
그레이스는 남만혁이 고치화가 된 순간을 떠올렸다.
갑작스러운 이별과 함께 시작된 발파록과의 목숨을 건 결투의 나날들.
“만혁….”
“만혁? 그대의 동행자였던가.”
발파록은 대적자에게 명예로운 최후를 선사하고자 권능, 기력강탈을 이용해 그레이스에게 말을 편하게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넘겼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홱 꺾어 이를 악물고 고치를 노려본다.
본성.
언젠가 남만혁이 말했던 것처럼. 그레이스는 본디 야수와도 같은 인물이다.
다만, 성장 과정에서 겪은 무수한 사랑과 윤택한 가정환경이 그 본성을 잠시 치장하고 있을 뿐.
지금 그녀는 기력강탈과 함께 미약하게 흘러들어온 발파록의 권능, 전사의 혼에 영향을 받아 깊게 가라앉아 있던 본성이 눈을 떴다.
“남만혁! 당장 튀어나와, 이 사기꾼 새끼야아아! 화장품이랑 생, 그거는 보장해준다며!”
그레이스 멜론, 17세. 태어나 처음으로 육성에 욕을 싣다.
* * *
부르르.
“고생했다.”
뿔은 내 육체를 재구성하고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예상보다 많은 힘이 소모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동안 쉰다는데, 그 기간이 인간의 수명을 한참 벗어났기에 사실상 지금이 마지막 대화나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 이마 왼편으로 옮겨간 뿔은 내 머리를 보호하듯 반원을 그리며 자랐고 지금은 끝이 고사리처럼 돌돌 말려 있다.
앞머리를 넘기듯 뿔을 한 번 쓸곤 이제는 확연히 눈으로 식별이 되는 마나의 벽에 다가갔다.
‘얇아졌다.’
층층이 쌓여있던 단단한 마나들이 지금은 젤리처럼 연하게 변해 있었다.
뿔이 설명한 바에 따르면 벽을 구성하던 대부분의 마나를 내가 흡수했다고 한다.
기이할 정도로 흡수효율이 높았다며 의아해했었는데, 내심 이에 관해 짐작 가는 게 있다.
‘마지막에 합성한 소재. 그거 둘 다 흡수 관련이었지.’
합성되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변이 때문인지 조금은 영향이 남아 있었나 보다.
“어디.”
하나의 층만이 남은 벽에 손바닥을 대자 바깥의 소리가 들려왔다.
“남만혁! 당장 튀어나와, 이 사기꾼 새끼야아아! 화장품이랑 생, 그거는 보장해준다며!”
순간 전신이 오싹했다.
회귀 전의 퀸과 같은 말투와 박력. 내 뇌가 그걸 기억하는 거다.
“큭큭.”
퀸이 살아 있다. 일단 그거면 됐다.
벽을 찢고 나가자 공동의 천장에 박힌 조명 옆으로 퀸과 발파록으로 추정되는 코끼리 수인이 보였다.
‘팔이랑 다리 하나. 그리고 눈.’
회귀 전, 내가 슈퍼빌런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냉정을 유지한 덕이다.
그런데 1년 좀 넘게 아카데미 좀 다녔다고 벌써 히어로 물이 든 걸까.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심중 깊을 곳에서 용솟음쳤고, 나는 그걸 입 밖으로 토해냈다.
“어디 X발, 잡놈에 새끼가 내 퀸을!”
퀸에게 못 박혀 있던 발파록의 눈이 나를 향한다. 동시에 끝이 말려 있던 내 뿔이 곧게 펴졌다.
“네놈, 대적자의 동행자였던가. 내 하위종이 고치화에 들었다 하여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다 여겼건만. 기괴한 일이구나.”
“잡소리 집어치우고, 말로 할 때 내려와라.”
“이 몸은 대적자를 앞에 두고 벌레에 관심을 주는 멍청이가 아니거늘, 어찌 그리하겠느냐.”
놈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고 코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웃는 것도 역겹네, 망할 놈이.
“내려, 와.”
힘을 주어 말하자 전신의 마나가 공동의 벽에 닿기 직전까지 자란 뿔에 응집된다.
“허윽!”
“컵!”
“모, 몸이. 끄윽.”
모인 마나가 일시에 방출되자 공동의 구경꾼 전원이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자세가 강제되었다.
“…네놈.”
서서히 낙하하는 발파록이 눈에 핏대를 세우며 나를 노려보다 주먹을 움켜쥐고 허공을 격하였으나 내게 닿은 것은 봄바람보다 약한 권풍이었다.
흔들리는 머리칼 너머로 보이는 발파록은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한낱 하위종 따위가 어찌 그런 격을 얻었느냐!”
“노름해서 땄다. 코주부 자식아.”
까드드득.
지상에 떨어진 발파록은 거세게 이를 갈았으나 끝내 관중들과 같은 자세가 되었다.
이마를 바닥에 쿵쿵 찍어대며 강제되는 투항의 자세를 극복하려 노력하는 놈이었으나, 소용없다.
적어도 이 신성의 격이 유지되는 한은.
신성에 대해 내가 이해한 건 이렇다. 마나를 소모해 행성을 지배하는 존재의 격에 일시적으로 도달하는 권능.
행성의 지배자. 흔히 지성체들이 신이라 불리는 개체.
이 힘은 카르다쇼프 척도상 1단계 문명에도 미치지 못한 지구에선 무조건 먹히고, 지금 보아하니 그린에게도 상당히 유효할 듯하다.
발파록은 회귀 전의 그린의 군대에서도 장군 정도의 위치는 되었을 놈이다.
비록 본체가 아니라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먹힌다면,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전장의 절반 이상을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유지 시간은 짧다만.’
이건 숙련과 마나량의 문제라 차차 개선하면 될 일. 당장 이 빌어먹을 새끼를 조지기엔 충분하다.
쾅!
바닥에 연신 머리를 박아대는 놈의 뒤통수를 뒤꿈치로 찍어누른 뒤 위를 올려다봤다.
여러 감정이 섞인 듯한 퀸의 외눈이 보인다. 결국 허탈한 감정만이 남은 녀석의 얼굴을 보며 낄낄 웃고는 손짓했다.
“이리 와.”
퀸이 부유를 사용해 힘겹게 내려온다. 땅에 발을 딛기도 전에 쓰러지기에 공주님 안기로 받아 들었다.
“남, 으읍!”
볼에 홍조를 띤 퀸이 무어라 하려 하기에 곧장 입에 방금 구매한 엘릭서를 물렸다.
꼴깍대며 다 마신 퀸이 재차 입을 열었으나 나는 막 설치된 그레이트 큐어 캡슐에 그녀를 던져 넣고 뚜껑을 닫았다.
꼬르륵!
인어처럼 입에서 공기 방울을 뿜어내며 캡슐 안에서 입을 벙긋대는 퀸.
“고맙다고? 괜찮아. 우리 사이에 뭘. 생리대도 사놨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퀸이 하나 남은 손을 부들부들 떨고는 내게서 등을 돌렸다.
큭큭, 역시 이게 어울려. 우리 사이에 신파는 좀 아니잖아?
“훌륭하구나.”
저항을 포기한 발파록이 고개를 비틀어 나를 올려다본다.
“뭐가.”
“하위종이 신성의 격을 손에 넣어 이처럼 유려하게 활용한 건 네놈이 처음일 것이다.”
“칭찬 고맙다? 치사한 새끼야.”
고치에 나와서 스트리밍을 키자마자 엄청난 숫자의 시청자가 몰려와 그간 발파록의 행태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알려왔다.
보아하니 자기는 잘 처먹고 가짜 몸으로 싸우면서 퀸에게는 공복과 육체의 손실을 동반한 싸움을 강요했다나.
발파록은 말만 전사 타령이지 하는 행동은 영락없이 소인배다.
“치사하다? 이 몸이? 대적자가 저리된 것 때문에 하는 말이라면, 오해가 있나 보군. 나는 저 하위종을 무척 배려했노라.”
양심적으로 권능을 하루에 하나만 늘렸으며 관용을 베풀어 2:1의 싸움도 허했다.
그리고 퀸과 삼식이가 죽기 전에는 관중을 죽이지 않겠다는 맹세도 했으며 몰래 음식을 섭취하는 것도 내버려 뒀다.
라고 주장하는 발파록.
“이 중에 대체 무엇이 치사한 행동이지?”
“전부. 하나씩 권능을 가져온 건, 네놈이 이곳의 시스템을 우회하느라 제약된 부분이고, 2:1은 삼식이 처리하려다 실패했다며? 관용은 무슨,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어디서 허세야. 쓰레기가. 그리고 관중을 죽이지 않은 것도 네 명성을 퍼트리려는 욕망이 기저에 깔려 있었을 테고. 또 우리 같은 하위종은 밥 못 먹으면 죽는 거, 너 사실 알고 있었지?”
“…해괴한 억지를 부리는구나!”
상위 차원 시청자 중에 하위종이 음식을 섭취해야 생존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꽤 있는 듯했으나, 상관없다. 다른 건 다 진짜일 테니까.
진실 속에 은밀히 섞여든 거짓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이걸로 저놈이 매달리는 명예는 끝이다.
“됐다. 더 이야기해서 뭐 하냐. 너 그린 중에 친구 있으면 지금까지 찍힌 영상 그대로 보여주고 물어봐라.”
“…….”
“왜? 그린이라 불려서 열 받아? 아, 아니면 친구가 없어서?”
발파록이 반응이 없기에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꺾으니 놈의 입에서 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자살? 와, 진짜 비겁한 놈이네 이거. 이봐요들, 이 영상 보는 사람 중에 상위 차원에 사는 사람 있으면 이놈한테 말 좀 전해주쇼.”
나는 고깃덩어리로 변한 코끼리 수인의 머리통을 걷어차고 중계석 쪽에서 슬금슬금 다가오는 카메라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쫄보 새끼.”
* * *
글로리아 차원, 쉐리드 행성. 중급 귀족 거주 구역의 모처.
“크아악! 이 열등한 놈이 내 계획을!”
발파록. 그는 낡은 소파를 걷어차며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말라니까.”
그런 발파록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여성 베르데종.
“말 걸지 마라.”
“왜? 누나가 동생한테 말도 걸면 안 돼?”
“놀리지 말라고!”
“좋아, 놀리는 대신 피드백해줄게. 근엄한 전사를 흉내 낸 것까진 좋아, 하지만 ‘전설’이랑은 엮이진 말았어야지.”
전설은 남만혁의 소환체, 삼식을 말한다.
“…격이 높은 이에게 욕을 한 번 얻어먹는 것만으로도 격이 올라. 누나도 알잖아!”
“그래서 주워들은 정보만으로 전설에게 시비를 걸었다?”
“발라르카 누나도 봤으니까 알 거 아냐! 약해져 있었다고. 첫날부터 권능만 전부 가져갈 수 있었어도 내 계획대로 됐을 거란 말이다!”
서몬&케이브에서와는 달리 아이처럼 칭얼대는 발파록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본 발라르카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 하위종 여자는 왜 한 번에 안 죽인 건데.”
그게 지금 발파록의 격이 나락으로 떨어진 원흉이다.
생애에 쌓은 명예가 곧 격인 글로리아 차원의 법칙 속에 태어난 생명체는 어디를 가던 이 법칙에 적용받았고 99번의 패전을 거듭한 멍청한 동생의 격은 그야말로 미물 급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말했잖아! 첫날부터 권능을 다 가져갈 수 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어!”
진짜 실력으로 졌다는 동생의 말에 발라르카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무릎으로 동생의 복부를 쳐올렸다.
“커흑!”
“그게 자랑이다, 머저리 자식아! 나가 죽어!”
안 그래도 마지막에 전사로서 최대 수치라 여기는 자결을 한 동생에게 화가 나 있었던 발라르카였기에 더 이상 분을 참지 않고 발파록을 두들겼다.
이는 발라르카가 의도한 일종의 처세였는데, 이러한 광경을 스트리밍함으로써 발파록의 행태에 분개해 있던 글로리아 차원 사람들의 분을 일부 삭여낼 수 있었다.
뻗어있는 발파록을 한 번 더 걷어찬 발라르카가 재차 한숨을 내쉬곤 중얼거렸다.
“동생이 이렇게 당했는데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없고.”
발파록이 잃어버린 명예를 조금이라도 되찾아주려면, 대신 복수를 하거나 상대에게서 진심 어린 존중을 받아내는 수밖에 없다.
“행사에 간섭하긴 좀 그렇고…, 쟤들 출신이 지구라고 했던가.”
그렇게 베르데 연합군 91사단 에이스, 발라르카는 차원 교차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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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