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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136화 (136/201)

<136화>

지구행 차원 열차

차원방송국 로카, 이사실.

“이봐, 솜 함장.”

“…언제적 함장입니까.”

“언제적이라, 내겐 엊그제 같은데 말야. 허허, 벌써 160년이나 됐구먼. 솔라연방의 현상수배에 오른 자네를 내가 끌고 온 게 말일세.”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구리 외형을 가진 수인, 로카의 이사장은 오늘 아침에 올라온 보고서를 솜브리오에게 보였다.

거기엔 각 분야 전문가의 분석이 적혀 있었고 대체로 로카 방송국의 네거티브한 시청률을 우려하는 의견들이었다.

“뭐든 정도가 있는 법일세.”

“죄송합니다.”

“사과는 됐네, 이유나 말해보게.”

솜브리오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제 능력 부족이었습니다.”

당연히 이 문제에 행사기획팀 전원이 매달렸다. 시스템을 우회하는 해킹을 막는 데 성공했다 여겼으나 알고 보니 그거 자체가 함정이었다.

건드리는 족족 시스템에 구멍이 나기에 보안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돌아온 답은 ‘이쪽은 메인 프로그램 보수 때문에 바쁘니 알아서 해결하라.’였다.

행사기획팀은 회사 내에서 쓰레기통이라 불리는 부서였고, 누구도 거들려고 나서지 않았다.

“보안팀의 갈라드 경은 자네 선배일세.”

“알고 있습니다.”

“머리 숙이는 게 지금도 어려운가 보구먼.”

“…죄송합니다.”

솜브리오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 이사장에게 거듭 사과했으나 그는 손사래를 치며 몸을 돌린다.

“됐네. 이미 결정 난 것을.”

이사장은 품에서 반투명한 크레딧 카드를 책상 위에 올렸다.

“퇴직금, 입니까.”

“여전히 눈치가 빠르구먼. 그간 고생했네. 연차가 연차다 보니 금액이 상당하더군. 자네 퇴직금 때문에 해고를 반대하는 이도 있었어.”

“…….”

솜브리오로서는 보안팀의 답을 들었을 때 지금 순간을 어느 정도 예상했고 마음의 준비도 마쳤다.

“100년이 지났으니 현상수배는 진작 풀렸을 테고, 갈 곳은 있나? 자네만 괜찮으면 용병으로 활동해보는 건 어떤가. 내 지인이 실력 좋은 함장을 구한다는군.”

책상에 놓인 크레딧 카드를 챙긴 솜브리오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겨서 그 부탁은 들어드릴 수 없을 거 같습니다.”

“그렇다니 어쩔 수 없구먼. 가보게.”

“그간 감사했습니다.”

그 길로 이사장실을 나온 솜브리오는 미리 싸둔 짐을 챙기기 위해 행사기획팀에 들렀다.

“솜 팀장님, 진짜 갑니까?”

“그렇게 됐다.”

하아.

여러 사원의 한숨에 솜브리오는 옅게 웃고는 눈앞에 울상을 지은 데모니오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네가 팀장이다.”

“예?”

“애들 잘 부탁한다. 특히 허슬리 감시 잘하도록.”

그 길로 항상 책상 한편을 장식하던 군용 구식 아공간 큐브를 챙긴 솜브리오가 행사기획실 문을 열고 나서자.

“솜 팀장님! 감사했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뺑이 치십시오!”

“언제든 돌아오세요! 이왕이면 신입으로!”

솜브리오는 피식 웃으며.

“시끄럽다. …건강해라.”

* * *

상위 차원, 노보소 행성. 그레이트 로열 거주 구역.

보글보글보글.

캡슐 속에서 재생되고 있는 자식을 내려다보던 노보소 행성의 실질적 지배자, 지마칼 드로틀이 짓씹듯이 말을 뱉었다.

“얼마나 걸린다고 했지?”

평소 아들을 매몰차게 대하나 누구보다 아끼는 주인임을 잘 아는 드로틀 가문의 집사는 최대한 절제된 동작으로 그의 옆에 부복하며 아는 바를 읊었다.

“혼이 손상되어 2년은 필요하다 합니다.”

“2년이라. 녀석을 위해 준비한 프로젝트는 모조리 폐기로군.”

아들을 통해 가문의 권력을 확고하게 다지려던 계획이 무산되었음에도 지마칼 드로틀은 침착했다.

“송구하옵니다.”

“자네가 송구할 일은 아니지. 이번 기회에 망나니처럼 구는 버릇이 고쳐진다면 마냥 손해는 아니야. 그래서, 알아봤나?”

“예, 도련님께 위해를 가한 놈의 조사가 끝났습니다.”

“어디…, 지구? 어디에 붙어 있는 행성이지?”

“중앙우주국에 정식 차원으로 등록되지 않은 우주이며 문명 수준이 너무 낮아 제9세계 보호법에 따라 발견부터 지금까지 차원 전체를 격리 중이라고 합니다.”

“열게.”

“시일이 걸립니다.”

허리를 숙이는 집사.

“칼 하나만 들여보낼 정도면 되네.”

“그 정도면 문제가 없을 듯하옵니다.”

“그래야지. 흠…, 전에 내가 아들 녀석 잡아 오라고 보낸 용병의 이름이 뭐였지?”

“현상금 사냥꾼, 번헤드입니다.”

“번헤드. 그 녀석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리 처리하겠습니다.”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지금은 문명 수준이 낮다고 하나 저런 인간들이 여럿이라면 불필요한 카르마가 쌓일 수 있어.”

지마칼 드로틀이 언급한 ‘저런 인간들’은 회복실 구석에 켜져 있는 디스플레이 속 두 인간을 가리킨다.

이류 예능, 서몬&케이브의 MVP, ‘퀸&로맨’.

현재 두 사람의 이름과 얼굴이 전 차원에 송출되고 있었다.

지마칼 드로틀은 별장의 지하 보물고를 턴 아들이 죽어서 돌아왔다는 보고에 바쁜 일정 중에도 서몬&케이브의 주요 장면이 담긴 영상을 전부 다시 보기로 확인했고, 지구 출신의 인간은 하위종답지 않은 면모가 있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은밀하게 처리하고 신속히 빠지라 하게.”

“명심하겠습니다.”

* * *

“안 한다니까!”

-신뢰를 버릴 셈입니까?

“현상금 사냥꾼이 무슨 신뢰야!”

-용병 활동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희 의뢰를 거절하면 스페이스 헤드헌터 길드에서 참 좋아하겠군요.

“에이 썅!”

서몬&케이브가 아무리 마이너한 예능이라고는 하나 그 구성마저 빈약한 것은 아니다.

실전에서 구르고 구른 번헤드마저도 상위종이 우글거리는 마지막 일주일은 모든 기량을 생존에 몰빵해서 간신히 살아나왔다.

10만 포인트로 구매 가능한 히든 아이템, 탈출권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최후의 결전이 벌어진 다섯공동에서 뼈다귀가 되었을 그녀였다.

그렇게 겨우겨우 살아나온 번헤드가 막 여관에 방을 잡아 드러눕는 순간, 이 고생을 하게 한 드로틀 가문의 집사가 또 연락을 해 온 것이다.

-지구행 차원 열차는 내일 10분간만 열릴 예정입니다.

“뭐? 설마 너희 쪽 시간으로 내일은 아니겠지?”

-여기 시간으로 내일입니다.

“그럼 여긴 4시간 뒤잖아!”

-그렇게 되는군요.

“너희는 상도덕도 없냐!”

-우리 드로틀 가문을 무엇으로 보시는 겁니까. 상도는 금으로 치르고 있습니다.

번헤드는 실시간으로 자신의 크레딧 계좌 뒷자리에 붙는 0의 개수를 보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주님께서 명하시길 흔적을 남기지 말고 신속하게 대상을 처리하라 하셨습니다.

“…누가 한대?”

-제안은 이상입니다. 10분 내로 크레딧을 반송하지 않는다면, 수락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야, 야!”

일방적인 통화가 끝나고 한동안 침대에 누워있던 번헤드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X발!”

계좌에 들어온 돈은 이 더럽고 구질구질한 용병 생활을 청산해도 될 만큼의 막대한 양이었다.

“…대실 환불은 해주겠지?”

잽싸게 배낭을 들고 방을 나서는 번헤드였다.

* * *

차원 교차로 117번.

“지구행 차원 열차가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니까요,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서케 때문에 가시려는 모양인데, 거긴 격리 우주라 우리 같은 사람이 가면 중앙우주국에 잡혀갑니다.”

솜브리오가 서케는 뭐냐고 묻자 서몬&케이브를 줄여 부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가, 이 노선 책자는 얼마지?”

법적으로 금지라 하니 아쉽긴 해도 별수 없는 일이라 여긴 솜브리오는 여기까지 온 김에 다른 차원에 가볼 생각으로 차원 노선이 상세히 기재된 책자를 요청했다.

“1천 크레딧입니다, 고객님.”

언제 인상을 구겼냐는 듯이 해맑게 웃는 안내원의 모습에 미간을 좁힌 솜브리오였으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크레딧을 지불했다.

그리고 대기실의 빈자리에 앉아 노선을 확인하는 그때, 옆에서 후끈한 열기가 느껴져 쳐다보자.

“뭘 꼬나봐, 팍 씨.”

머리에 불을 두른 단발의 여성이 바닥에 불침을 뱉는다.

군인으로서의 교육을 장기간 받은 솜브리오의 개인 무력은 상위 차원에서도 통할 정도였으나 굳이 이런 곳에서 먼지를 날리고 싶지 않아 엉덩이를 옆으로 옮겨 거리를 두는 것으로 대처했다.

“칫.”

한편 불을 머리에 두른 여성, 번헤드는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2시간이 남는 것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해서 시간이나 때울 겸, 호의를 담아 용병식 인사를 건넸더니 되레 이상한 사람을 본 것처럼 거리를 벌리는 게 아닌가.

“야, 너 비 오는 날에 나를 못 봐서 그런데, 나 꽤 예쁜—”

“목적이 뭐지?”

쳐다보지도 않고 답하는 솜브리오.

“지구행 열차 기다리느라 심심하니까, 대화상대나 좀 되어달라고. 이 눈치 없는 새끼야. 나 같은 미녀가 말을 걸면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고 절부터 박을 것이지. 내빼기는 왜 내빼!”

책자를 넘기던 솜브리오의 손이 멈칫한다. 짧은 시간에 생각을 정리한 뒤 고르고 고른 말을 입에 담았다.

“같은 열차군.”

“오, 뭐야. 어쩐지. 왜 혼자 여기 있나 했네. 이봐, 나 같은 용병들 사이에선 목적지가 같으면 서로 이름도 알려주고 엉? 살아온 이야기도 하면서 지루한 시간을 때우는데 말야. 어때?”

통성명이나 하지 않겠냐는 번헤드의 날 티 나는 제안에서 과거의 데모니오를 떠올린 솜브리오는 속으로 웃음을 짓곤 1천 크레딧이나 주고 산 책자를 과감하게 덮었다.

“솜브리오. 성은 없다.”

“번헤드, 가명이다.”

“가명을 대는 주제에 당당하군.”

“꼬우면 너도 가명 대지 그랬냐. 그래서, 지구엔 무슨 일로 가는데.”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응?”

“서몬&케이브를 봤나?”

“참가했지.”

“음? …아. 그렇군. 번헤드.”

참가자 명단 중에 그녀의 이름이 있었던 것을 떠올린 솜브리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번헤드가 호탕하게 웃으며 거만한 자세를 취한다.

“이제야 이 몸을 알아보는구만, 알아서 모셔!”

모실 생각은 없으나 시끄러운 동행자가 하나 느는 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솜브리오는 자신의 과거를 적당히 털어놨다.

“뭐? 벨테인 연방의 함장이었다고? 뭐야, 당신. 거물이잖아!”

“지금은 직장에서 해고당한 백수 신세다만.”

“사내자식이 그런 일로 기죽지 마! 그까짓 거, 한 번 해본 거는 금방 또 할 수 있으니까. 혹시 알아? 어떤 부자가 배 한 척 주면서 지휘하라고 할지?”

번헤드의 활동 이력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던 솜브리오는 그녀가 아직도 감정이 풍부하다는 것에 속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이 누님은 말야, 크리스탈크로거를 눈앞에 두고도—”

-알립니다!

번헤드의 모험담이 한참 이어지던 중, 대기실에 방송이 들려왔다.

-긴급 편성된 지구행 열차가 도착했습니다. 다시 알립니다! 지구행 열차가 정차했습니다. 10분만 대기하는 열차이오니 예약하신 고객께서는 어서 탑승해주시길 바랍니다.

“왔다!”

하던 말이 끊겼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방을 둘러메고 달려가는 번헤드.

솜브리오도 그녀의 뒤를 따라 탑승장으로 향했다.

“표를 보여주십시오.”

“여기.”

번헤드는 집사가 전송해준 표를 단말을 통해 보이자 차장이 티켓에 숨은 드로틀 가문의 상징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솜브리오는 당연히 그런 표가 없다. 지금도 단말기로 지구행 차원 열차 티켓을 검색하고 있으나 ‘검색 정보 없음’이라고 뜰 뿐이었다.

“으음.”

“표, 없으십니까?”

――――――――――

❖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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