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이게 되네
“이 최신 과학 기술이 적용된 트리니티 데스티니 다이스는 던질 때마다 위를 향한 면에 던진 참가자의 운에 따라 임의의 점이 표시됩니다.”
주사위 맞네.
“오호.”
“신기하군.”
“이딴 게 무슨 대수라고. 빨리 경기나 시작해—, 합시다!”
흥미로워하는 둘과 질러놓고 뒤늦게 사회자의 눈치를 보는 소머리.
상위종은 주사위를 볼 기회가 없는 걸까.
“규칙은 단순합니다. 결투를 시작하기에 앞서 주사위를 던지고 나온 눈의 숫자만큼 공격이 보장됩니다.”
다들 의아해하는 와중 점잖은 말투를 구사하던, 세로로 동공이 찢어진 상위종이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선공은 어떻게 정하지?”
“주사위의 눈이 높은 사람이 선공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주사위의 눈이 3이고 상대가 2면, 이쪽이 먼저 3번 공격한 후에 상대가 공격할 수 있다는 뜻인가?”
“정확합니다. 만약 같은 눈이 나올 경우, 두 참가자 모두 다이스를 다시 던지셔야 합니다.”
사회자의 부연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참가자들.
“다들 이해하신 듯하니 바로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참고로 준결승전 대진표는 시청자 투표를 통해 정해졌습니다.”
뻐끔.
하얀 띠가 둘러진 경기장이 반으로 갈라졌고 진동이 멎었을 무렵 내 앞에는 소머리가 도끼의 날을 제 뿔로 갈며 웃고 있었다.
“각자 앞에 놓인 주사위를 던져주시길 바랍니다.”
‘제발 1만 나오지 마라.’
내가 주사위를 던지자 바닥을 서너 번 통통 튀더니 소머리의 주사위와 부딪쳐 경기장을 벗어난다.
“크흐흐, 나는 6이다.”
한참을 구르던 내 주사위도 아슬아슬하게 6의 눈을 가진 면을 보이는가 싶었으나.
“크하하!”
갑자기 웃음을 빙자해 뱉은 소머리의 기합 때문에 기우뚱거리다 넘어간다.
“아니, 사회자님?”
숫자가 결정되기 전에 급히 사회자를 불렀으나.
“제1경기장 주사위의 눈은 6대 1이므로 참가자 이노르미 베카가 선공입니다. 30초 뒤에 결투가 시작되므로 준비해주시길 바랍니다. 로맨 참가자님, 하실 말씀이라도?”
“…아뇨.”
번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말투 곳곳에서 느껴진다.
“크크크크.”
나를 보며 자기 도끼를 핥는 소머리.
“윽, 비려.”
그러다 갑자기 얼굴을 구기곤 도끼를 소매로 빡빡 닦는다.
미친놈인가.
“경기 시작!”
지금부터 상위종을 한 방에 보내버린 저놈의 공격을 6번이나 버텨야 한다.
‘아슬아슬한데.’
물리적인 방어 수단이라곤 위즈를 몸에 둘러 회피하는 것과 미르토스 해변을 구현해 바닷속으로 몸을 숨기는 건데.
부웅—, 콰카카카칵!
몸풀기로 휘두르는 도끼만으로 일대가 갈가리 찢겨나가는 저 광경을 보고 있자면, 해변과 위즈를 불러본들 제대로 방어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베라 참가자님의 남은 공격 횟수는 5회입니다.”
“뭐? 방금은 스트레칭이다!”
“5회입니다.”
“큭. 네놈, 얕은 수를!”
지가 헛방질해놓고 왜 나한테 난리야.
“크아압!”
소머리의 전신 근육이 불끈거리며 수축하더니 한순간에 도끼를 수직으로 내리찍는다.
나는 곧장 모든 마나를 뿔에 밀어 넣고 신성의 격으로 어떻게든 놈을 움직임을 막아보려는 찰나. 시야의 모든 것들이 느려진다.
‘뭐지?’
거대하게 변한 도끼가 서서히 내 정수리로 떨어지다 머리카락 한 올 공간을 남긴 채 정지한다.
“세련되지 못하구나.”
뒤에서 들려오는 저음의 목소리.
“웬 변이가 내 뿔을 두 번이나 복제해 가기에 어떤 건방진 녀석인가 했더니, 이런 꼬마였을 줄이야.”
검은 피부, 검은 뿔, 검은 눈. 그것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검정 일색이었다.
“네가 멈췄나?”
“글쎄.”
새까만 코트의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것은 나를 중심에 두고 한 바퀴 돌더니.
“지구 출신?”
“…어.”
시간이 멈춘 탓인지, 심장이 뛰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것이 단어 하나를 내뱉을 때마다 자이로드롭을 타는 것처럼 내장들이 제 위치를 이탈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단 말이지.”
경매대에 올라온 생선을 평가하듯 게슴츠레한 눈으로 내 몸을 살핀 그것은 어디선가 꺼낸 담배를 입에 물곤.
“한 번은 도와주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라졌고 시간이 다시 흘렀다. 도끼가 내 두피를 파고들어 두개골을 가르려는 찰나.
나를 중심으로 강대한 마나가 전방위로 방출되었다.
“후우—”
내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아까 그것이 피던 담배의 향. 어느샌가 내 어깨에 걸려 있는 검정 코트.
“음머어어어!”
방금의 마나 파동으로 인해 밀려난 소머리는 바닥에 도낏자루를 꽂아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버티더니 재차 팔을 휘둘렀고 이번에는 거대해진 도끼가 횡으로 그어진다.
양단될 위기였으나 다시 한번 입으로 연기를 뿜은 내 몸은 바로 직전과 같은 방식으로 마나를 방출했고 도끼가 내 몸에 닿기도 전에 튕겨 나갔다.
“크으윽, 고작 하위종 주제에!”
그 뒤로는 마지막 공격까지 공격과 마나 방출의 반복이었다.
“허억, 헉. 크윽! 아라도! 정신 차려!”
도끼를 보며 아라도라 외치는 소머리. 역시 저 도끼가 소환수였나.
“제1경기장, 공수 교대. 로맨 참가자님은 1회의 공격을 해 주십시오.”
사회자의 안내 멘트와 함께, 귓가에 들리는 그것의 음성.
-신성은 모든 힘의 기원이다. 탐구하고 또 탐구해라. 마법사.
희미해지는 그것의 기척.
‘잠깐! 방금 그 마나 방출만 어떻게 했는지 알려주고 가십쇼.’
-너 자신에게 물어라.
끝이었다. 뇌리 한구석에서 느껴지던 이질적인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고, 어쩐지 다시는 저것과 만날 일이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법사와 나 자신.’
사실 그것이 무지막지한 마나 방출을 사용했을 때, 머리를 스치고 지난 생각이 있긴 하다.
“이런.”
행동으로 옮기려 했으나 남은 마나가 거의 없다. 삼식이의 평범한 매직 미사일도 못 쓸 정도.
“와라!”
도끼의 날을 길게 넓혀 방패처럼 만든 소머리가 그 뒤에 숨은 채 눈만 내밀며 내게 소리친다.
지금도 아주 미세하게 내 몸에 쌓이고 있는 마나를 박박 긁어모은 뒤, 심상에 방금 떠올린 이미지를 그렸다.
‘영역.’
뿔을 얻기 전에도 영역의 구축은 꽤 자신이 있는 분야였다.
발파록과 전투에서 구현한 그 직사각형 형태의 영역을 최소한으로 압축하자 손가락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영역이 구현되었다.
“무슨 헛짓거리를 하는진 몰라도 소용없다! 나와 아라도의 전력 방어는 누구에게도 뚫린 적 없다!”
최대한 마나를 끌어모으고자 시간을 끌었더니, 소머리도 긴장이 풀렸나 보다.
조금 전만 해도 잔뜩 쫄아 있었는데 말이지.
“로맨 참가자님, 10초 이내로 공격을 진행해 주십시오.”
마나를 조금 더 모으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포이즌을 매개로 영역을 전개하던 것처럼. 뿔을 통해 신성이란 속성이 부여된 내 마나를 공 형태로 구현한 뒤, 움켜쥐었다.
“전개.”
단어에 의지를 담아 입 밖에 내자 시야의 절반이 검게 물들며 정신이 아득해진다.
목에서 피 냄새가 나는 걸 보면, 중증 마나 고갈 증세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마나를 움직이면 치명적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이렇게, 했던가.’
그것이 내 몸의 마나를 움직인 경로를 떠올리며 따라 하자.
“방출, …푸헉!”
오장육부가 비틀렸고 시야가 완전히 꺼지며 입에서 대량의 피가 뿜어졌다.
그 대가로 소머리와 나 사이를 연결하는 영역에는 전방위로 발산되던 마나가 한줄기로 압축된 채 쏘아졌다.
“그러면 그렇지. 내 공격을 그렇게 쉽게 막을, 어?”
주르륵.
소머리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가 어두운 시야 사이로 희미하게 보인다.
머리를 더듬던 놈은 자기 이마에 구멍이 난 걸 발견하곤 경악한 표정으로 앞으로 쓰러졌다.
거구의 덩치답게 거창한 소리를 낸 소머리가 다시 일어나는 일은 없었고, 경기는 그대로 종료.
“로맨 참가자의 승리입니다. 두 분 모두 치료를 마친 후 마지막 경기 진행하겠습니다.”
나는 사회자의 고저 없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 * *
눈을 뜨니 일전에 내가 퀸을 던져 넣었던 치료 캡슐 속이었다.
보글보글보글.
“일어났소?”
내 캡슐 위에 올라온 커다란 딱정벌레가 말을 걸어왔다.
잠시 당황했으나 이곳은 여러 차원의 존재가 모이는 곳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곤 최대한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적인 의사를 표현했다.
그러자 허공을 보며 더듬이를 까닥인 딱정벌레가 좀 충격적인 말을 했다.
“마나바디라 그런지 먹음직스러운 향이구먼, 큼. 조심하시오. 나 정도 되는 군자이니 참은 것이지.”
딱정벌레는 자신을 양심적인 의사라 소개했고, 내 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몸만큼은 더 이상 하위종이 아니오. 내장은 그저 당신의 컨디션을 실시간으로 표현하기 위한 기관에 불과하오. 그대의 직관계가 낳은 요식행위인 게지.”
부글부글!
그럼 이제 똥도 안 싸도 되냐고 묻자.
“먹은 건 내보내는 게 순리 아니겠소.”
큭, 드디어 변비를 탈출하나 싶었건만.
아무튼 치료받는 동안 다른 세상들의 상식들을 전해 들었고 그중에는 그블린에 관한 것도 있었다.
“베르데 종? 음, 육신이 강하고 명예를 추종하며 아줄과 사이가 나쁘오.”
베르데는 그린이고 아줄은 블루다.
부글?
“아줄 종은 반대요. 언제나 냉정하고 실리를 우선하며 마법의 귀재들이지.”
내가 아는 그대로다. 쓸만한 정보가 더 있을까 하여 여러 가지를 물었으나 딱정벌레 의사는 더듬이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나는 중, 하위종 전담 의사요. 상위종인 그들과 엮일 일은 거의 없소. 그보다 진작에 다 나았으니 그만 가시오.”
부글.
꺼내줘야 나가지!
“캡슐의 덮개에 손을 대고 있으면 열리오.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다니…. 하위종은 하위종이구먼. 참, 당분간 마나는 사용하지 않는 게 좋소.”
구시렁대며 캡슐에서 나와 옷을 입는 도중 들린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얼른 되물었다.
“마나를 쓰지 말라는 게 뭔 소리야?”
앞다리로 자기 머리를 긁던 딱정벌레가 뜸을 들이고는 주둥이를 열었다.
“고치화를 막 끝낸 생명체는 약하기 그지없네. 이번에는 신이 그대를 도왔는지 멀쩡하지만, 마나가 완전히 자네를 이룰 때까진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내 생각 같아선 기권을 권하고 싶네만, 서몬&케이브의 규칙상 그러면 죽고 말 테니. 알아서 하시게.”
그러니까, 한동안 싸우지 말고 안정을 취하는 게 베스트라는 거네.
“그거야 문제없지.”
“내 말을 이해한 게 맞소?”
“어, 치료 고맙다.”
옷과 소지품을 챙겨 몸을 일으키자 정면의 문이 열리고 내 상체 크기의 금붕어가 다가온다.
“치료는 다 받으셨습니까?”
아는 목소리다.
“사회자?”
“예, 곧 경기가 시작됩니다. 가시죠.”
몸을 줄인 건가. 다시 이 모습을 보일 땐 영원한 어둠이니 뭐니 했던 거 같은데.
“안 잡아먹으니 그렇게 보실 필요 없습니다. 상대에 대해선 알고 계십니까?”
“전혀.”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죠. 다른 우주에서 우리 우주로 넘어온 상위종입니다. 여기서 돈을 벌어 강자를 찾아 떠돌 생각이라더군요.”
이야기가 또 복잡해질 거 같아 한 귀로 흘렸다.
뭐, 사연이 있다는 소리겠지.
“듣고 계십니까?”
“그보다 경기는 언제 시작합니까?”
“당당한 모습이 보기 좋군요.”
“그쪽도 귀여우십니다.”
움찔하는 금붕어. 규칙적으로 흔들리던 꼬리지느러미가 크게 펄럭인다.
“…바로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그러시죠. 안 그래도 슬슬 퀸이 깨어날 때가 돼서 가봐야 하거든요.”
직후, 땅이 꺼진다는 느낌을 받았고 몸의 중심을 되찾았을 땐.
와아아아아!
나는 경기장 위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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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