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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140화 (140/201)

<140화>

프렉시스

관객들의 환호는 이전 경기과 같았으나 좌석 배치가 좀 다르다.

‘로열석인가?’

1층 중앙. 다른 객석과는 달리 의자 대신 푸른색 반투명한 방울이 허공에 떠 있다.

로브와 가면, 또는 물건의 형태로 자신의 모습을 숨긴 로열석의 관객들이 방울 안에서 이쪽을 내려다본다.

“짧게 두 참가자의 활약 영상을 살펴보겠습니다. 중앙의 화면을 주시해주십시오.”

화면엔 내 맞은편에 선 참가자가 어떻게 결승전에 도달했는지를 알 수 있는, 화려하고도 격정적인 전투 장면들이 담긴 영상이 재생되었다.

‘물? 정령은 아닌 거 같은데.’

몸 곳곳에 나 있는 구멍에서 물의 칼날을 뿜어내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

약점이 많아 보이는 기술이었으나 영상에선 대지와 전격과 같은 상대의 역속성 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낸다.

이는 로열석의 관중들에게도 신기한 일인지 박수를 치거나 침묵을 깨고 가벼운 탄성을 흘렸다.

“이상, 스칼라 샤 참가자와 그의 소환수 메리렐라의 활약이었습니다.”

저 물의 칼날이 메리렐라라는 설명을 덧붙인 사회자는 이어 내 영상을 틀었다.

금발 여성의 뒷모습으로 시작해서 금주먹을 다루는 순간까지가 내 소개 영상이었다.

“로맨 참가자의 활약이었습니다. 퀸이라는 동행자분은 현재 치료 중이므로 경기에 참여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우우~

“동행자 데려와라!”

“못생겼다!”

“블론드! 블론드! 블론드!”

내 나름대로 야유를 많이 받아봤지만, 이런 식의 야유는 또 처음이다.

약간, 오디션 보러 갔다가 나는 탈락하고 친구가 붙은 느낌?

“기본 규칙은 인지하고 계실 테니 바로 경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삐, 삐, 삐!

세 번의 신호와 함께 시작이라는 사회자의 음성이 경기장을 울린다. 그러나 스칼라 샤는 처음 자세 그대로 팔짱을 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간의 고요함이 장내에 머물렀고 계속 침묵할 것 같던 그의 입이 열렸다.

“선공을 양보하지.”

담담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향해 걸었다.

스칼라 샤의 몸에 뚫린 구멍 안에 찰랑이는 물을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붙자, 그제야 그의 팔뚝이 움찔한다.

그의 어깨 너머로 방금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악어 수인 관객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목울대를 꿀렁인다.

‘미안하게 됐네.’

속으로 결승전을 기대한 모든 이들에게 사과한 후,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스칼라 샤의 눈 속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사회자님.”

“…경기 중입니다.”

경기에 집중하라는 말을 돌려서 하는 듯하다.

“제가 처음 여기에 초대될 때 받은 특전 중에 재밌는 게 있더군요.”

그러자 금붕어 사회자가 모습을 드러내곤 튀어나온 눈을 빠르게 깜빡인다.

“그걸, 지금 쓰시려는 겁니까?”

“네.”

품을 더듬어 초대의 수락과 함께 내게 전달되었던 작은 카드 하나를 꺼내 스칼라 샤의 팔과 팔 사이에 끼워 넣었다.

카드를 확인하는 스칼라 샤를 보며 몸을 돌리자.

“진심인가? 해보지도 않고?”

해일이 이는 눈.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그에게 다시 돌아가 작게 속삭였다.

“나도 그쪽하고 싸워보고 싶은데, 의사가 내 몸이 지금 정상이 아니라네? 마나가 나를 완전히 이루지 못했다나 뭐라나.”

“그랬나…. 그 의사의 말이 맞다. 너는 지금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다. 적어도 지구 시간으로 1, 2년은 조심해라.”

“그럴게. 걱정 고맙다.”

완전히 거리를 벌리자 관객들의 폭풍 같은 야유가 경기장에 떨어진다. 이에 금붕어가 당황하며 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본부에 연락해 알아보겠습니다!”

금붕어의 빠른 대응에 관객의 난폭한 반응은 줄었으나 오래가진 않았다.

“…본부가 결승전에서의 ‘전투 회피권’ 사용을 인정했습니다. 스칼라 샤 참가자의 승리입니다!”

처음 내게 지급된 특전 중 하나, 전투 회피권.

하위 차원 출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학살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시스템이지 싶은데, 나는 마땅히 사용할 데가 없어서 지금까지 들고 있었다.

우우우우우!

“싸워라!”

“비겁한 놈!”

“도망치지 마!”

저들의 분노를 이해한다. 큰돈 주고 결승전 티켓을 사서 직관하러 왔더니, 시작도 전에 경기가 끝났다. 당연히 화나지.

이런 비난을 겸허히 수용할 줄 알아야 옳게 된 빌런이므로 나는 그들을 향해 웃다가 카메라를 보며 입을 열었다.

“X까.”

그아아아아!

저 새끼 잡아!

죽어!

환호인지 발광인지 모를 괴성을 뒤로한 채 경기장을 벗어났다.

계단 아래로 내려오자 옆에 내 얼굴과 이름이 붙은 대기실이 있기에 들어가 방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앉았다.

후우.

숨을 돌리자 스칼라 샤의 신비로운 눈동자가 떠오른다.

“어차피 졌겠어.”

서로의 코가 부딪힐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간신히 느껴진 그의 마나는 매저드 교수가 연상될 정도로 중후하고 탄탄했다.

거기다 지구의 시간을 언급하는 거로 봐선, 나에 대한 조사도 빠삭하게 한 거 같고.

저만한 강자가 방심 없이 경기장에 올랐다.

“큰일 날 뻔했네.”

괜히 서늘해진 목을 쓸며 퀸이 있는 치료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서몬&케이브의 규칙 중에 내게 중요한 두 조항이 있다.

【3. 참가자의 시간은 절대적으로 보장됩니다.】

【6. 하위차원에 해당하는 참가자는 차원문명보호법에 의해 상품 제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서몬&케이브, 혼몽의 마굴에서 보낸 100일을 지구에선 흐르지 않은 것으로 해준다는 조항이었다.

이건 좋다. 나는 몰라도 퀸은 아카데미 출석이 꼭 필요하니까.

‘약속은 히어로의 필수 덕목.’이라 주장하는 교감 때문에 출석이 미달된 학생은 재학 중엔 물론이고 졸업 후에도 페널티를 받는다.

길드나 사무소를 개업할 시 서울 히어로 아카데미 졸업 인증 마크를 못 붙이는 건 물론이고 우수한 오퍼레이터나 사이드킥을 소개받을 수 없다던가, 신뢰 점수가 B+에서 시작하는 것 외에도 자잘하게 제약이 걸린다.

부글부글.

인어공주처럼 캡슐 속을 왔다 갔다 하던 퀸이 대뜸 꿍얼거린다.

“나오고 싶다고? 조금만 더 참아. 어차피 나와도 할 거 없잖아.”

치료 캡슐 속 퀸은 잃어버렸던 팔과 다리, 그리고 눈까지 모두 재생된 상태다.

딱정벌레 의사도 이만하면 됐다고 하는데, 내가 이 안에서 경험해본 바에 의하면 약 효과를 최대한 빨아 먹고 나오는 게 맞다.

캡슐 안의 액체는 현재 지구의 기술로는 구현할 수 없는 치료약이다.

의사도 하위종의 경우 저 액체에 오래 몸이 노출될수록 기초재생력이 상승했다는 논문이 있다고 했다.

부글!

그래도 나가고 싶단다.

“안돼. 그게 몇 포인트짜리인 줄 알고 벌써 나와!”

그렇다. 며칠간 모인 포인트를 전부 몸에 좋다는 영약으로 바꿔서 퀸의 캡슐에 넣었다.

특별한 능력이 생기는 고급품은 아니었으나 근지구력이 미세하게 늘어난다거나 폐의 기능을 강화해 숨을 오래 참는다거나 하는, 애매하지만 살면서 한 번은 도움 될법한 기능들이 붙은 영약들이었다.

“로맨, 약효라면—”

뒤에서 나타난 딱정벌레 의사가 퀸이 들어간 캡슐을 더듬이로 확인하며 입을 열기에 얼른 그의 주둥이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쉿!”

“으읍, 알았소. 알았으니까, 제발 손 좀 떼 주시오. 그대의 체온은 내겐 치명상이란 말이오!”

그제야 멀어지는 딱정벌레 의사.

퀸은 의료실 밖에서 우리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모른다.

녀석은 이 100일간 충분히 괴로웠다. 굳이 돌아다니면서 저들의 눈총과 욕을 감내할 필요는 없다.

모르고 지나가면, 없는 일이라잖은가.

“로맨 참가자님.”

금붕어 사회자다.

“어떻게 됐답니까?”

사회자는 어제 경기 종료 후, 나를 찾아와 조항 6번과 준우승 보상에 대해 언급했었다.

차원문명보호법 어쩌고저쩌고에 의해 상품이 바뀔 수 있다면서 말이다.

“본사의 결론을 그대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지구의 문명 수준으로는 행성, 프렉시스1985A-115를 온전히 편입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로맨 참가자의 우주 전함에 해당 행성의 좌표를 전달하고 행성 인근에 양방향 AA급 프라이빗 사이클론 게이트를 설치한다.’”

“AA급 프라이빗 사이클론 게이트가 뭐죠?”

“좌표와 암호를 입력하면 소환 및 역소환을 지원하는 최신형 워프 게이트입니다. AA급은 모함급 함선까지 오갈 수 있으며 에너지는 항성 에너지로 자급하므로 유지비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더 궁금하신 게 있습니까?”

나는 금붕어의 옆 지느러미를 슬쩍 잡으며 가까이 붙었다.

“솔직히 말해주시죠. 그 행성, 쓸만합니까?”

행성 같은 거창한 걸 준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거기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그냥 팔고 쓸만한 무기나 받을 생각으로 운을 띄웠는데.

“160년 전만 해도 행성 프렉시스는 글로리아 차원에서 외행성 방문자 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그러나 인근에서 벨테인 연방과 솔라 파이러츠의 전쟁이 터지고 몰락하고 말았죠.”

뭔가 긴 이야기를 시작하는 듯해 일단 가만히 듣는 와중, 익숙한 단어가 귀를 때린다.

“솔라 파이러츠?”

세상에.

“알고 계십니까? 한때 상위차원을 호령했던 유명한 해적단입니다. 벨솔전쟁 이후 종적을 감췄지만요. 아무튼 전쟁으로 인해 해당 항성계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됐고 이는 프렉시스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솔라 파이러츠는 그냥 드라마 아니었어?

“…어, 망했겠네요?”

정신 차리고 사회자의 말을 되새겨보니 외행성 방문자로 먹고살았던 행성 같은데 그게 끊겼으면 막막했을 것이다.

“예. 하지만 벨솔 조약에 따른 출입 통제가 10년 전에 풀렸습니다. 그리고 이 조약서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죠.”

그 극소수 중 한 명이 우주방송국 로카의 사장이었으며 사실상 죽은 별이나 마찬가지인 행성, 프렉시스를 싸게 사들였단다.

160년이나 흐른데다 조약서가 비밀이었던지라 경쟁자가 없어 어렵지 않게 구했다는 TMI까지 알려주는 사회자.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뭐가 있긴 있나 봅니다.”

“사장님께선 ‘넥서스 호를 보유한 로맨 참가자에게 이 상품이 돌아가 무척 만족스럽다.’라고 하셨습니다.”

흥미롭다. 솔라 파이러츠라는 이름이 나올 때부터 설마 했는데, 넥서스까지 언급됐으니 이건 확실하다.

‘창작이 아니었던 건가.’

작가가 나처럼 다른 차원을 방문한 사람이었던 걸 수도 있고,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다른 세상의 꿈을 꾸는 각성자일 수도 있다.

“용광로.”

“네?”

“프렉시스는 내핵이 드러나고도 붕괴되지 않는 특별한 행성입니다. 지금은 덮어둔 상태입니다만, 원하시면 언제든 개방이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행성 하나를 용광로로 쓴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어이가 없어 멍 때리는 와중에도 금붕어 사회자의 입은 쉬지 않았다.

“상품의 전달과 설명을 끝마쳤으므로 고향별로의 귀환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퀸이 눈을 반짝인다. 캡슐 안에서도 바깥소리는 들린다.

“하루만 더 있으면 안 됩니까?”

“안 됩니다.”

단호하게 거절한 금붕어 사회자.

“그럼 왜 물어봤습니까.”

“매뉴얼이었습니다.”

그러곤 지느러미를 흔들더니, 뻐끔거리며 모종의 주문을 외웠고 어느새 캡슐 밖으로 나온 퀸과 내게 빛이 쏟아져 내렸다.

“로맨 참가자 덕분에 이번 행사는 재밌었습니다.”

“잘 가시오.”

금붕어와 딱정벌레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모든 감각이 잠시 차단되었고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을 땐.

찌르르르, 찌르르.

서울 히어로 아카데미의 남산, 내 컨테이너 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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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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