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내가 아는 빌런 같아서.”
“이, 이! 나는 히어로다!”
“알았으니까, 진정해.”
나와 사이오닉 브레인이 대화를 나누던 중, 교감이 대통령의 맞은편에 앉았다.
“후욱. 이 할망구는 또 뭐야? 이봐, 당장 끌어내!”
“조용.”
다리를 꼬며 편한 자세로 앉은 프리실라 루드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마디 하자, 돌연 사이오닉 브레인이 자기 입을 손으로 더듬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길 반복한다.
“또 입이 사라진 것처럼 느끼게 한 건가. 그 악취미는 여전해, 프리실라.”
미국 대통령의 이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어투에 교감은 비서가 내준 차를 입에 대며 말문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요. 잭. 나는 우리 학생이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게 중재만 할 뿐이니까요.”
교감이 눈짓으로 나를 가리키자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인다.
“자네가 얼굴 좀 보자던 그 학생이로군. 음, 두 사람을 믿고 미리 말함세. 나는 내일 중으로 탄핵당할걸세.”
실권을 잃었으니 많은 걸 바라지 말라, 뭐 이런 뜻이겠지.
“딴 소린 됐고. 네 뺨과 땅을 내놔.”
“푸흡, 뭐?”
차를 뿜고 손수건으로 닦으며 되묻는 대통령.
큭큭.
찻잔으로 입을 가린 교감의 어깨가 흔들린다.
이 양반도 점잖은 척하면서 은근히 남 괴롭히는 걸 즐긴단 말이지.
“이틀 후라면 얼마든지 맞아주지.”
“나는 탄핵당하기 전을 말한 거야.”
“허튼소리! 있을 수 없는 일일세. 지금의 나는 미국을 대표하는 사람이네. …크게 양보해서 핵미사일을 직접 우주로 옮긴 히어로라면 감내할 수 있네만, 자네는 아니야.”
“퀸이 치면 순순히 맞겠다?”
“적절한 시기라면, 응하지.”
“좋아. 내일 탄핵 방송은 퀸에게 뺨을 맞는 거로 시작하자.”
리가의 방송과 핵미사일 저지로 인해 떠버린 퀸의 명성은 사실 언제든 사그라들 수 있는 거품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세계를 혼란으로 몰고 갈 뻔한 미국 대통령의 뺨을 치는 이 퍼포먼스가 추가된다면, ‘국경 없는 정의’를 추종하는 모든 이들이 녀석을 지지할 것이다.
‘세이셸의 주민들도 그나마 속이 좀 풀릴 테고.’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이니, 이번에 실추된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세이셸에 막대한 지원을 하겠지.
“…그러지. 하지만 땅은 어찌할 방도가 없네. 내 개인 재산이라곤 빚뿐인지라.”
“누가 댁 돈 달래? 이번 사건, 전시였으면 명예 훈장급일 텐데. 당연히 나랏돈으로 줘야지.”
알겠지만, 퀸은 미국인이다.
명예 훈장은 본디 군인에게만 수여했었으나 각성자 사회가 도래하고 나선 미국 출신이거나 미국에 연고지를 둔 히어로에게도 아주 드물게 수여해왔다.
만약 이번에 퀸이 받게 되면 최연소 메달 오브 아너 소유자가 된다.
대통령은 비서에게 귓속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전례가 있다는군. 그렇게 하지. 원하는 곳이 있나?”
“아이다호주의 스커비 산.”
“그 주변은 국유림이 조성되어 있어서 어렵네.”
“국유림은 빼고. 이 정도만 줘.”
홀로폰으로 지도를 켜서 크게 한 뼘, 약 50km 정도를 내달라고 하자.
“좋은 땅들 놔두고 대체 산을 원하는 이유가 뭔가?”
“노후 대비. 질척대지 말고 줄 수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 말해.”
“가능하네. 대신, 퀸이 앞으로도 미국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게 조건일세.”
“뭔 개소리야.”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뭐라고 했나?”
“퀸은 지구를 위해 헌신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용건은 이게 끝인가?”
욕인 걸 알면서도 넘어가는 느낌이다.
“어. 아니, 참. 러시아 대통령 위치 좀 알려줘.”
“극비 사항을 아무렇지도 않게 요구하는군.”
“너만 당하면 억울하지 않아? 정작 발사된 장소는 러시아잖아. 그리고, 알지? 교감님이 찾으려고 마음먹으면 금방 찾는 거. 우리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 댁 부하들만 고생할 텐데, 그냥 알려주는 게 서로 편하지 않을까?”
리쳇이 매일 지표를 스캔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땅 아래에 있는 사람까지는 못 찾는다.
그래서 교감을 팔아 러시아 대통령 위치를 요구하는 거고.
망설이던 대통령은 교감의 눈치를 보더니 한숨과 함께 메모지에 자필로 주소 한 줄을 적어 내게 건넨다.
“이 정보는 비밀일세.”
“당연하지.”
“반가웠네. 어서 돌아가게. 마르코스, 헬기장으로 안내해드리게.”
마치 벌레 내쫓듯 백악관을 나온 우리는 대기 중인 헬기에 올라탔다.
막 부상하려는 찰나, 사이오닉 브레인이 이쪽을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이 시야 끄트머리에 잡혔다.
나와 교감은 동시에 헬기 조종사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나는 영역을 전개, 교감은 모종의 간섭파를 날려 놈이 시도한 정신 제어를 무효로 돌렸다.
하여간 빌런 아니랄까 봐. 하는 짓이 치졸하다.
“느그 대통령이 시키드나.”
“절대 아닙니다! 저자의 독단입니다!”
비서는 우리 쪽으로 손을 뻗은 사이오닉 브레인을 보며 유려한 한국말로 부정했다.
믿어주자. 존재 자체가 협박인 교감이 바로 옆에 있는데 이런 짓을 할 정도로 멍청한 인물은 아니었으니.
“교감님, 어떻게 할까요?”
“만혁 학생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나는 목을 긁으며 잠시 생각하다 영역을 변형한 뒤 마나를 방출했다.
측.
정전기가 튀는 듯한 작은 소리와 함께 좁고 긴 관으로 변한 영역을 따라 신성 속성이 부여된 마나가 쏘아졌다.
다음 순간 사이오닉 브레인의 머리를 관통한 주홍색 마나는 땅을 한참 파고든 뒤에야 가느다란 빛의 선을 남기며 사라졌다.
사이오닉 브레인의 제압을 위해 다가오던 군인과 히어로들이 거의 동시에 옅은 신음을 흘린다.
“제가 후환은 남기지 않는 편이라.”
“그래요.”
교감은 대통령과 차를 마실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루이.”
“옙.”
교감이 조종사의 이름을 부르자 정지 비행을 하던 헬기가 다시 움직였고 고도가 충분히 높아졌을 무렵, 교감이 입을 열었다.
“만혁 학생, 뿔에 대해 물어도 될까요?”
하기야, 궁금했겠지. 지금까지 안 물어보고 참은 게 대단하다.
“예, 뭐. 이렇게 도와주셨는데. 그 정도야.”
“안 불편한가요?”
불편하다. 주로 생활하는 컨테이너를 내 키에 맞춰 놓다 보니 들어갈 때 자꾸 부딪친다.
뿔의 끝이 산양의 그것처럼 말려있어서 편하게 눕기도 쉽지 않고.
“그렇긴 한데, 제가 선택했으니 감내해야죠.”
“어른이군요. 만혁 학생은.”
그거로 뿔에 관한 이야기는 끝이었다.
어쩌다 뿔이 생겼는지, 예전보다 강해졌는지, 특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 모든 물음을 생략한 교감은 그저 내가 불편한지만 걱정했다.
‘…누가 어른이라는 건지.’
* * *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미국에서처럼 교감이 길을 열었다.
러시아 대통령은 벙커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방에서 권총을 손질하고 있었다.
“누구냐!”
“어설픈 연기하지 말고 홍차나 끓여와요.”
나긋한 교감의 말에 총을 내려놓고 진짜 차를 끓이는 러시아 대통령.
간섭파 날렸네.
찻잔을 든 교감이 내게 눈짓했고 나는 곧장 용건을 꺼냈다.
“뺨과 땅.”
몽롱하던 눈이 정상으로 돌아온 러시아 대통령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인다.
“암! 원하는 대로 줘야지.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게.”
공짜로 안 주려는 건 저기나 여기나 똑같네.
“들어보고.”
그는 얼굴을 붉힌 채 내 어깨를 잡고는.
“미사일 기지에서 핵이 발사될 동안 아무것도 못 한 빌어처먹을 똥별들을 처리해다오!”
“죽여달라는 거면, 청부업자 알아봐.”
“크으윽!”
수염을 바르르 떨며 분해하는 대통령.
“그 부분은 제가 도와드리지요.”
“오, 정말입니까! 당장 배신자 놈들을 부르겠습니다.”
“그러세요.”
대통령은 곧장 비서를 불러 장성들의 이름을 언급했고, 잠시 후.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고르바초프 동지 외 4인에게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전화를 안 받는다?”
“예.”
비서가 말을 마치고 방문을 잡고 나가려던 때에.
탁.
찻잔을 강하게 내려놓는 교감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당신, 정보를 숨겼군요. 말하세요.”
이번에는 교감의 눈이 향한 비서에게로 고개가 돌아간다.
“…네 분 모두 태풍을 만난 유람선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이 정보를 은폐하려던 사람을 모두 말하세요.”
줄줄이 이어지는 이름들.
그걸 들은 대통령이 들고 있던 권총의 총구를 비서의 주둥이에 쑤셔 넣고 방아쇠를 당겼다.
“나를, 우리 러시아를 배신할 땐 이렇게 될 각오를 했겠지?”
꺼져가는 비서의 눈을 끝까지 노려보다 동공에 빛이 사라지고 나서야 대통령은 잡고 있던 머리통을 바닥에 내던지곤 교감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이 은혜는 필히 갚지. 그리고 소년 영웅이여. 내 뺨을 치고 싶다 했었나? 언제든지 환영일세. 땅도 원하는 곳으로 주지.”
“알테이, 야즐라 계곡. 위아래로 이 정도.”
“이쪽 라인은 양보해주게. 레저를 위해 찾는 이들이 많아. 그렇게만 해주면 일주일 내로 아카데미에 땅문서가 도착할걸세.”
계곡 몇 개를 좀 빼달란다. 저긴 주면 좋고 아니면 마는 수준이라 상관없다,
“그럽시다.”
“좋아!”
시원하게 결정한 러시아 대통령은 벙커에서 나와 직접 우리를 배웅했고 헬기가 떠오르기 무섭게 근처에 있던 몇몇 인물을 향해 총을 쏜다.
총성이 들리지 않는 거리가 되어서야 교감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뒤가 있군요.”
이번 핵미사일 사건에서 수상쩍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러시아에 있는 미사일 기지를 대통령이 모른다?
좋아, 백번 양보해서 전쟁통에 정보 누락이 생겨 그랬다 치자. 근데 2차 세계대전 때부터 지금까지 방치된 미사일이, 버튼 하나 누른다고 발사가 돼?
말도 안 된다. 미사일이 얼마나 민감한 물건인데. 이건 누군가가 꾸준히 관리해왔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당연히 사적으로 쓰기 위함일 것이다.
러시아 대통령도 나와 같은 결론을 냈기에 저리 거침없이 총질을 한 거고.
“그렇겠죠.”
“신경 쓰이지 않나요?”
러시아를 도울 생각이 없냐는 교감의 은근한 제안에 나는 확실히 선을 그었다.
“제 앞가림도 벅차서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제야 좀 쉬겠네.
그 뒤로 아카데미 도착한 나는 교감에게 맛있는 걸 먹여준다던 약속을 지키라 요구했고, 그녀는 빙글 웃으며.
“제가 만든 케이크를 드리지요.”
잠시 후 오랜만에 보는 대형 드론을 통해 케이크가 왔다.
한 입 베어 먹은 나는 바로 컨테이너로 돌아와 찬장을 열었다.
“…내가 라면을 어디에다 뒀더라.”
케이크의 형상을 한 그것은, 고무 타이어를 삶은 맛이었다.
* * *
러시아의 모처.
“엔들리스 님. 마무리했습니다.”
“뉴스로 봤네. 유람선 사고라…. 너무 작위적이지 않나?”
“죄송합니다. 시간이 없었던지라.”
허리를 숙인 흑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서울 히어로 아카데미의 교장, 엔들리스는 혀를 차며 쥐고 있던 코인을 튕겼다.
보고하던 수하의 눈이 코인을 따라 위아래로 오르내린다.
“약속은 약속. 자네의 기억을 지울 걸세.”
“물론입니다!”
“가족 외에는 모든 걸 잊을 거야.”
“상관없습니다. 누님만 돌려주신다면, 바보가 되어도 좋습니다.”
“그렇게나 내 밑에 있기 싫었나?”
“…아닙니다.”
“받게.”
코인을 수하에게 넘긴 엔들리스가 동전의 앞면을 꾹 누른다.
“눈을 뜨면 병원일 걸세. 그때부턴 자네 하기 나름이네. 무언가 떠오르더라도 입을 닫아. 굳이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죽을 테니.”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엔들리스가 모종의 특성을 사용하자 코인에서 희미한 연기가 뿜어져 나와 점차 여성의 형상을 취했다.
“누, 누님!”
이윽고 연기는 완전한 사람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고, 이를 남자가 받아들었다.
“밖에 누구 있나?”
중절모를 쓴 거구의 사내가 들어온다.
“부르셨습니까.”
“렉스터, 자네가 책임지고 저 남매의 기억 지우게.”
“…알겠습니다.”
“놀란 눈치군. 풀어주는 이유가 궁금한가?”
“…예.”
렉스터는 이렇게 기분이 좋은 엔들리스는 수년간 본 적이 없었기에 조심스레 속내를 고했다.
“다른 세상이 열렸네.”
“예?”
“더 이상 이 약해빠진 세상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는 소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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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