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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144화 (144/201)

<144화>

이차원 삼인방 (1)

-안내 드립니다. 이 열차는 곧 목적지, 지구에 도착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전부 서몬&케이브 준우승자가 목적이라는 거네?”

길쭉한 의자에 누워 팔걸이에 발을 올린 발라르카의 결론에 번헤드와 솜브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음.”

“나랑 번헤드는 그년을 족치는 거고, 솜브리오. 너는?”

“로맨이라는 자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짝!

상체를 벌떡 일으킨 발라르카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한다.

“자,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때? 나랑 번헤드의 볼일은 솜브리오의 문답이 끝난 뒤로 미루는 거야.”

“그건 상관없어. 그런데 그년이라니? 내 의뢰주는 로맨의 죽음을 원해.”

“응? 퀸이 아니었어? 잘됐네. 나는 말했다시피 동생이 퀸에게 100일간 처발려서, 대신 복수해줘야 하거든.”

“네가 복수를 대신 한다고 발파록이 잃어버린 명예가 돌아오나?”

솜브리오가 내막을 아는 듯이 말하자 발라르카가 씁쓸하게 웃는다.

“어쩌겠어. 아무리 못나도 동생이니까 내가 돌봐줘야지. 그년에게서 동생을 향한 ‘존중’을 받아내면 그래도 좀 어깨는 펴고 살 수 있겠지.”

“네가 퀸에게 이기면 그건 너를 향한 존중이 아닐까?”

이번에는 번헤드가 묻자 발라르카가 어깨를 으쓱인다.

“우리는 가족이 치욕을 되갚아주면 부끄러운 과거는 모른 척해주거든.”

잘린 손가락에 약초즙 뿌리기지만, 동생에겐 그것도 절실할 테니까.라고 발라르카가 덧붙이자 번헤드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희 문화는 진짜 독특하네.”

“하하, 내 기준에선 너네가 더 이상해. 머리에 불은 종교적 의식 같은 거야?”

이에 대해선 솜브리오도 궁금했는지 귀를 기울인다.

“옛날에나 그랬지. 요즘은 이런 악습은 다 사라졌어.”

“그런데 너는 왜 그러고 있냐.”

“저주야.”

“쯔쯔, 조심 좀 하지.”

“그러게 말야. 네가 나 대신 아버지에게 좀 전해줄래?”

-인스턴스 교차로, 지구역에 도착했습니다. 잊으신 물건 없는지 확인하시고 하차해주십시오. 내리시는 문은….

“드디어! 가자.”

흥분한 발라르카가 번헤드의 허리를 잡아끈다.

“이게 왜 갑자기 친한 척이야. …솜브리오, 안 와?”

두 사람이 먼저 하차하길 기다리던 솜브리오는 발라르카가 누웠던 의자에 크레딧 카드가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하고 서둘러 챙긴 뒤 열차에서 내렸다.

툭.

“응?”

“야, 게이트 닫혀! 여기 시골이라 빨리 가야 된대!”

솜브리오는 어깨를 스치는 무언가를 느꼈으나 발라르카의 다급한 독촉에 일단 내렸다.

“발라르카, 이걸 떨어트렸더군.”

“크레딧 카드? 와, 고맙다. 내가 한 끼 크게 살게.”

거칠게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고 흔드는 발라르카의 힘에 이끌려 반강제로 걸으며 뒤를 돌아본 솜브리오가 고개를 기울였다.

“착각인가.”

“응?”

“아무것도 아니다. 가지.”

* * *

“기대되는구나. 얼마만의 다른 차원이란 말인가.”

기척을 극한으로 숨긴 채 임시 차원 교차로로 진입한 엔들리스는 솜브리오와 부딪치긴 했으나 열차에 탑승한다는 목적을 달성했다.

-열차 출발합니다.

그렇게 과거, 최강이라 불렸던 사나이가 지구를 떠났다.

* * *

-헤이 크랙까, 다른 차원에서 네 팬이 왔어.

크랙까. 노예에게 채찍질하는 노예주를 비꼬아 부르는 단어다. 저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는지 참.

“무슨 팬?”

-다른 차원에서 왔대. 일단 그쪽으로 보낼게. 여긴 좁아서 불편하다네.

“어떻게 오게.”

알다시피 리쳇은 지금 정지궤도에 떠 있다.

-몰라. 좌표만 주면 알아서 한다네?

알았다고 하자 빛무리가 생기더니 내 앞에 커다란 물방울이 생겼고 그 안에 세 사람이 나타났다.

‘영역 같은 건가.’

손톱 크기의 정체 모를 기기가 방울의 표면에 붙어 있었는데, 그걸 중심으로 규칙적인 마나가 발산된다.

매저드 교수님 가져다드리면 좋아하겠다 싶은 생각을 뒤로하고 가까이 다가가자 희뿌옇던 그들의 모습에 눈에 들어온다.

“불 대가리, 그린, 아재?”

불을 머리에 뒤집어쓴 여자랑 그린은 전신으로 자기가 다른 차원의 존재라 주장하는 듯한데, 저 배불뚝이 아저씨는 뭐지?

“댁들 누구쇼.”

내가 방울을 건드리자. 팡, 터졌고 안의 세 사람은 숨을 길게 들이키며 캑캑댄다.

“끄윽, 이래서 촌 동네 행성은 싫다니까.”

커다란 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 기침하는 그린.

“너—”

“야, 근데 너 방금 그린이라고 했지?”

내 말을 끊고 눈을 쳐다보는 거구의 암컷 그린.

직감했다. 이거, 발파록 이상의 전사다. 그린을 무수히 사냥하며 축적한 내 경험이 이를 증명한다.

‘죽는다.’

팅.

본능이 알린 위험신호에 즉각 신성에 기반한 영역으로 내 몸을 덮지 않았다면, 방금 내 목을 스쳐 지나간 저 그린의 손날에 목이 잘렸겠지.

“칫.”

“발라르카. 열차에서 나눴던 이야기랑 다르군.”

“저놈이 그린이라잖아. 감히 나를 그따위로 불러놓고 이것도 못 막으면 죽어야지.”

배불뚝이 아저씨의 발언에 그린이 입맛을 다시며 내게서 반 발자국 물러났고 그만큼 내게 가까워진 아재가 입을 연다.

“나는 솜브리오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넥서스를 어떻게 복제했지?”

넥서스를 복제해? …어? 잠깐만. 이 사람 그 배우 좀 닮지 않았나?

“아재, 혹시 엘라크 함장이랑 관계있으쇼?”

“벨솔 전쟁 때를 묻는 거라면, 본인이다. 이제 내 질문에도 답해주면 고맙겠군.”

솔라 파이러츠의 조연이었던 함장이 살 좀 찌우면 눈앞의 남자처럼 될 거 같긴 하다.

아니, 드라마는 지구에서 찍은 거 아니었어? 닮은 배우로 섭외했던 건가?

“내가 서몬&케이브에서 구현한 넥서스?”

“그렇다.”

“그거 복제품 아니야.”

“…불가능하다.”

“직접 확인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나는 그린이 내게 달려든 직후 퀸에게 긴급 지원 요청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훈장 수여식 때문에 미국에 있으니까 도착까지는 넉넉하게 30분.

시간도 벌 겸 넥서스 내부 관광 한 번 시켜주지 뭐.

“미르토스 해변, 넥서스.”

남산의 계곡으로 그들을 데려온 뒤 해변을 구현, 넥서스를 불렀다.

“제독님, 오셨습니까!”

“기드빈, 별일 없지?”

“최근 일등병 이지욱이 본 함을 에너지 소모 없이 완전히 부상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걸?”

넥서스가 순양함 급이긴 해도 우주 사양이기 때문에 무게가 엄청나다. 그걸 특성으로만 부상시킨다는 건, 조작계 각성자 중에는 거의 탑클래스라는 소리.

내가 반신반의하며 이지욱을 쳐다보자 그는 어머니의 유품으로 보이는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만지곤 내게 경례한다.

“일병 이지욱. 사실이다. 윽!”

빡!

“이지욱 일병, 제독님께 극존칭을 쓰도록!”

“큭, 죄송합니다. 사실입니다. 제독님.”

“잘했다. 이제 넥서스를 우주에 올릴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해.”

“……예.”

긴 침묵 후에 긍정하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리곤 뒤에서 어이없는 얼굴로 기다리던 세 사람을 향해 고갯짓했다.

“기드빈, 손님들께 우리 함선의 자랑을 보여드리자고.”

“예, 써!”

“기관실과 동력실을 먼저 살피고 싶네. 가능한가?”

핵심 설비가 들어찬 공간을 외부인에게 내보이는 건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였으나 당장 이들과 우주전을 벌일 것도 아닌지라 수락했다.

“까짓 거 그럽시다.”

띠링.

[멜론 퀸 : 태풍 때문에 돌아가야 해. 최대한 빨리 갈게.]

시간도 벌어야 하고.

“이, 이럴 수가. 통짜 솔라메탈이라니. …이런 게 아니면 그 변칙 기동은 불가능하긴 해. 미친 해적 놈들, 함선 하나에 대체 항성을 몇 개나 갈아 넣었느냐!”

“왜 나한테 그래.”

“후, 실례했다, 인정하지. 이건 진짜 넥서스다. 심지어 수많은 넥서스 중에 엘라크를 격침한 그놈 같군.”

“어떻게 이런 게 여기 있는지 궁금하지?”

“그렇다. 말해 줄 수 있나?”

당근이죠, 선생님. 앞으로 20분은 더 끌어야 하니까!

나는 이후 셋을 테이블에 앉혀놓고 지구의 기초 상식부터 각성자, 특성의 종류 솔라 파이러츠라는 드라마 등을 디테일하게 가르쳤다.

“흥미롭군. 왜 이런 차원이 격리된 거지? 누군가 의도적으로 닫아 놓은 듯한….”

“그런 건 우리 알 바 아니잖아? 다 높으신 분들의 뜻이 있겠지.”

불타는 머리를 가진 여성이 솜브리오를 옆으로 밀쳐내고 내 앞에 앉는다.

“난 번헤드. 나는 솜브리오랑은 다르게 너를 처리하는 게 목적이야.”

불길 너머로 장난스레 웃는 여성의 얼굴이 보인다.

“지금?”

“아니, 저 녀석 용건이 끝나면.”

그러곤 일어나 뒤에 서 있던 그린에게 자리를 내주는 번헤드.

“발라르카다. 발파록 알지? 내 동생이다. 명예를 되찾으러 왔다.”

이 빌어먹을 그린의 명예 문화는 진짜 답이 없다. 인싸같은 새끼 한 놈을 죽이면, 이렇게 가족이니 친구니, 지인이니 하는 명예타령꾼들이 목숨을 내던지며 달려든다.

“살려줘.”

“하! 걱정하지 마라, 겁쟁아. 네놈처럼 비겁한 놈의 명예에는 관심 없다.”

발파록 때문에 왔는데, 내게 관심이 없다는 건.

“퀸?”

“그래, 불러 와. 그년이 죽인 내 동생의 명예를 받아야겠다.”

쓰읍, 지원 요청 괜히 했나. 지금이라도 돌아가라고 해야.

쿵!

“로맨!”

갑판 쪽에서 들리는 퀸의 음성.

‘썩을. 드럽게 빨리 오네.’

시간을 확인하니 예상보다 10분은 이르다.

“동생의 권능이 느껴져. 저년이지?”

그린의 말에 나는 결심했다.

‘좋아, 튀자.’

넥서스, 미르토스 해변 해제.

기관실의 위치는 꽤 높기에 지상으로 낙하하는 동안 나는 퀸에게 구해달라는 눈짓을 보냈고, 녀석은 곧바로 내게 다가왔다.

“퀸 보드, 도망쳐!”

“이, 그거 하지 말라니까.”

나를 잡으려던 퀸의 팔을 타고 올라 등 위에 안착. 곧장 하늘로 내빼려는 찰나.

“어딜.”

발라르카가 지상에 발을 딛기가 무섭게 우리를 향해 손을 뻗으며 움켜쥐는 모션을 취하자 주변 공간이 우그러든다.

“권능!”

역시 권능을 마주한 경험이 풍부한 퀸이 바로 알아차리고 하강해 권능을 피한다.

“에이, 나를 잊으면 곤란하지.”

허리에 달린 주머니를 뒤적이던 번헤드가 뭔가를 꺼내 쐈고 퀸의 몸에 닿았다.

파캉.

“기프트가, 윽.”

저것에 맞는 순간 나와 퀸의 특성이 사라졌다. 설마, VZ?

“특성이라고 했지? 자세한 설명 고마웠어. 너희처럼 미지의 존재로부터 힘을 받은 이능력자들은 대개 우주경찰들이 쓰는 포획탄을 맞으면 바보가 되더라구. 기대했을 텐데, 미안해. 나도 집에 빨리 가고 싶어서 말야.”

제기랄. 며칠 뒤면 UVZ가 내장된 퀸 전용 히어로 코스튬이 만들어지는데.

“여자애는 내가 데려간다.”

발라르카가 일반 소녀처럼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는 퀸의 목을 움켜쥐고 옆으로 걸어간다.

“네 애인 처참하게 죽겠네. 그래도 걱정하지 마, 먼저 가서 기다리게 해줄게.”

하얀 불로 이루어진 송곳이 한순간에 내 안구를 파고든다. 싶은 순간.

팅.

“엥?”

순간 발라르카의 공격을 흘려낸 내 영역이 저 송곳도 방어한 건가 싶었으나, 이내 느껴지는 중후한 마나에 나도 모르고 웃고 말았다.

큭큭, 낄낄낄.

“뭐, 뭐야. 왜 웃어? 이건 또 어떻게 막은 거고?”

“너흰 다 X됐어.”

실드.

보통의 실드라면 저만한 열량을 가진 공격에 종잇장처럼 뚫릴 것이다.

그러나 어떤 마법사가 시전하는 실드는 지구의 모든 마나를 겹쳐두는 것과 같은 방어력을 자랑한다.

“스승님.”

나의 부름에 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노 마법사.

“오냐, 제자야.”

잠시 잊고 있었다. 바로 근처에 진정한 최강자가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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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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