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이차원 삼인방 (2)
천문학적인 마나가 한순간에 매저드 교수에게 집약되자 번헤드의 머리에서 일렁이던 불이 소거된다.
‘오, 예쁘네.’
청순가련 상이라고 해야 하나. 순둥한 미녀 역할을 맡으면 기가 막힐 마스크다.
“어….”
자기 얼굴을 더듬던 번헤드가 로브 자락을 휘날리는 매저드 교수를 멍하게 올려다본다.
이해한다. 나도 저 압도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마나 입자들을 처음 봤을 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소울 페인.”
“꺄아아악!”
그러나 이어진 매저드 교수의 주문에 비명을 지르는 번헤드.
바닥을 뒹굴며 고통을 호소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매저드 교수가 다시 번헤드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그만!”
주변으로 여섯 개의 빛기둥이 내리꽂혔고 그곳에서 늙은 마법사들이 걸어 나왔다.
그중 악어 인형을 위자드햇에 올린 기묘한 여 마법사가 앞으로 나선다.
“다른 차원의 존재를 함부로 해쳐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매저드 오라버니.”
오라버니?
“드리무트. 아직도 타차원보호협회를 운영하느냐. 내 그런 허울 좋은 집단은 시간만 낭비한다고 하였잖느냐.”
“…아무리 오라버니라도 이번만큼은 독단적으로 행동하셔선 안 됩니다. 심계 건을 잊으셨습니까?”
“그건 강이가 멋대로 벌인 일이다.”
“피해자 입장에선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디스펠 소울 페인.”
악어 마법사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바닥을 뒹굴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던 번헤드가 안정을 되찾는다.
“저것은 내 제자를 죽이려 했네.”
“제자요? 아, 학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안 죽지 않았습니까. 진정하세요.”
“흥분한 건 자네들이야. 나는 누구보다 침착하네.”
“그러면 우리가 이들을 데려가도 되겠죠?”
“무슨 소린가. 저들은 우리가 잡았으니 우리 것일세.”
매저드가 손가락을 까닥이자 퀸을 데리고 숲으로 걸어 들어갔던 그린과 좀 전부터 안색이 하얗게 변한 솜브리오가 뒷덜미가 잡힌 새끼고양이처럼 공중에 들려 매저드의 앞으로 끌려온다.
드리무트라는 마법사가 무어라 하려 했으나 매저드가 고개를 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들과 내가 왜 마법에 매진하였는가를 떠올려 보게. 바로 이런 치들의 침략으로부터 지구를 수호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저 말, 들은 적 있다. 지구방위대의 첫 번째 수칙이었나 그렇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들을 죽이면 반드시 지구의 차원 좌표가 노출될 겁니다.”
“이미 노출됐네. 자네들은 TV도 안 보는가? 나이가 들수록 속세의 소식에 민감해야 돼. 그래야 말도 안 통하는 노인네 소리를 안 들어. 가슴에 새겨두게.”
“리가의 서몬&케이브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시민들은 아직 잘 만든 드라마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레이스 멜론 학생이 ‘퀸’이 되기 전의 이야기일세. 시간문제일 뿐이지. 그리고 일반 시민의 타 차원 인지는 다음 문제일세. 당장은 내 제자들이 이미 타 차원에 방점을 찍고 왔다는 거야.”
이들은 다른 차원에 지구의 존재가 알려진 걸 우려하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저들을 온전히 돌려보내 지구의 인식을 긍정적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꽤 규모가 큰 행사의 준우승자가 청부업자에 의해 쉽게 당했다는 소식이 퍼진 뒤에도 자네 말처럼 되겠나.”
만만하게 여기겠지. 어쩌면 미국 서부의 골드러시가 차원 규모로 벌어질지도 모르고.
그리고 지구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들의 분노는 온전히 우리가 감내해야 할 것이다.
갱도에서 죽어 나간 광부의 가족들이 서부를 향해 온갖 저주를 퍼부었을 때처럼.
드리무트가 입을 다물고 매저드 교수를 노려본다.
“실례하지.”
그린과 불 머리는 무력화된 상태고 유일하게 저항하지 않은 솜브리오만이 그나마 멀쩡한 상태였는데, 그가 공중에 매달린 채로 말했다.
“저 둘은 몰라도 나는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이 행성에 왔을 뿐이오.”
“살려달라는 겐가.”
“부정하지 않겠소만, 그전에 로맨에게 부탁이 있소.”
이목이 내게 집중된다. 나는 퀸을 부축해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나를 넥서스의 함장으로 고용해다오.”
뭐?
내 의심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그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기드빈이라는 자는 군사 장교이기는 하나 함장 교육을 받은 거 같진 않더군. 나라면 넥서스의 온전한 위력을 끌어낼 수 있소.”
솜브리오는 자기가 얼마나 넥서스에 어울리는 함장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입을 놀렸다.
“네가 얼마나 함장직을 원하는진 알았어. 하지만 결정적인 게 부족해.”
“그게 무엇이든 충족해 보이지.”
“내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를 자신 있어?”
“상관의 명령에는 복종이 기본이오.”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넥서스는 내가 구현하지 않을 땐 다른 우주에 가 있어. 이 부분도 감내할 수 있고?”
“다른 우주? 흥미롭군. 그 역시 상관없소.”
“연봉을 네가 원하는 대론 못 맞춰줘. 애초에 너희 화폐가 뭔지도 모르고.”
“보급만 넉넉하게 보급해준다면 나머지는 자력으로 어떻게든 하겠소.”
음….
“좋아, 채용.”
“고맙소! 제독.”
“스승님, 솜브리오는 놔주세요.”
끌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은 매저드 교수는 드리무트를 노골적으로 바라보며.
“이거 보게, 제자가 너무 뛰어나서 문제일세. 우리가 끙끙대는 문제를 쉽게 해결하지 않았나.”
“…상호 간의 의지가 맞았던 것뿐입니다.”
“허허, 그렇다 치세. 제자야, 다른 둘은 어찌했으면 하는고?”
내 눈을 노렸던 번헤드를 가리키며 목을 긋는 제스처를 하려던 찰나.
“잠까아안! 뭐든 할 테니 살려줘!”
번헤드가 필사적으로 외친다.
“나를 죽이려던 놈을 지금까지 살려둔 적이 없어서.”
“나는 용병이야. 의뢰주가 원하면 하는 거라고! 당장 의뢰 파기할게!”
“글쎄. 네가 우리에게 보복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잖아.”
머뭇거리는 번헤드를 잠시 쳐다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내가 그만한 위험 부담을 지고도 너를 살려둘 만한 뭔가를 제안하던가.”
고민하던 번헤드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돌연 밝은 얼굴이 되었다.
“네게 고용될게.”
“목숨이 걸리면 주인을 갈아타는 용병이라. 그쪽 업계에서는 그걸 높게 쳐주나 봐?”
“윽…, 하지만 다른 수가 없잖아.”
“무급 30년.”
“뭐?”
“30년만 내게 봉사해. 그 뒤엔 자유를 주지.”
“너무 길어!”
“여기에 협상의 여지는 없어. 죽던가, 30년 봉사하던가. 둘 중 하나다.”
“…할게, 하면 되잖아! 30년!”
발악하듯 외친 번헤드를 옆으로 밀고 두 눈을 부릅뜬 채 기절해 있는 그린 앞에 섰다.
찰싹.
뺨을 몇 번 때리자 눈을 뜨는 그린.
“어떻게 된, 젠장! 윽.”
사로잡혔다는 걸 즉각 이해한 놈이 권능을 사용했으나 매저드 교수의 강력한 속박에 의해 불발로 그쳤다.
“동생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퀸을 죽인다고 했지?”
“하, 그래. 이제 내 걱정부터 해야겠지만.”
나는 풀밭에 앉아 쉬는 퀸과 그린을 번갈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붙어.”
“뭐?”
“응?”
이건 안전이 보장된 상황에서 그린과의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다.
발파록과의 전투로 충분히 경험을 축적했다고 할 수도 있으나 서몬&케이브에서의 결투는 그린의 전력이 아니다.
발파록도 그린 전체로 보면 정상급 전사는 아니었고.
하지만 눈앞의 이 암컷 그린은 최소 사단을 대표하는 전사쯤은 되어 보인다.
“퀸, 네가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냥 해보는 말이다. 내가 아는 퀸은 이런 결투는 절대 안 피한다.
“할게.”
과연, 일말의 망설임 없이 주먹을 맞부딪치며 일어난 퀸이 호흡을 고른다.
그러한 광경에 입꼬리를 귀 아래까지 늘리며 송곳니를 드러내는 암컷 그린.
“네가 내 동생보다 낫네.”
“스승님, 부탁드립니다.”
매저드 교수가 내 요구에 그린을 속박하고 있던 주문을 회수했고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도약, 격돌했다.
쿵!
강력한 충격파가 일대를 흔들었고 마법사들을 각자의 방어 마법을 사용해 막아낸다.
나 역시 영역을 전개해 파동을 흘려내는 중에 내 공간 내에 꺼림칙한 마나가 느껴져 그곳을 보자 번헤드가 있었다.
“왜.”
이 마나. 네크로 마탑에서 지겹도록 느낀 형태다.
“너, 저주 걸렸냐? 뭐 이런 걸 가지고 다녀. 재수 없게. 치운다.”
“뭣? 잠—”
번헤드의 목에 씌워진 저주의 올가미를 내 체질을 이용해 건드리자, 붉은 면사포가 아래에서부터 타들어 가는 듯한 형태로 그녀의 머리를 덮고 있던 불길이 사라지고 저주가 축복으로 역전된다.
“혈계 저주? 거, 지독한 거 잘도 달고 살았네. 상위 차원이면 이런 저주 풀어주는 곳도 많을 텐데 왜 그러고 다녀. 돈도 잘 벌게 생겨서는.”
저주가 축복으로 화하기 전에 잠깐 분석해보니, 얼굴을 태우는 저주였다. 번헤드는 본인의 마나로 그 태움을 억제하고 있었던 모양이고.
“아, 혹시 수련의 일종이었나? 그러면 좀 미안한데. 그래도 네가 이해해라. 나는 껄끄러운 거 주변에 안 두는 성격이라. 그리고 수련이라면 저 산에 사는 번퓨즈라는 녀석들이 도와줄 거다. 특히 번은 너랑 이름도 능력도 비슷할 테니까 서로 도움이 되겠지. …야, 갑자기 왜 울어.”
뜬금없이 눈물을 터트린 번헤드를 보고 있자니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르신들, 제가 울린 거 아닙니다.”
“크흠. 젊은 녀석이 말야. 처자에게 심하구먼.”
드리무트 뒤에서 폼이나 잡고 있던 영감이 한 마디 툭 던지자 다른 마법사들도 거기에 말을 더한다.
“다른 차원의 저주를 연구할 기회였거늘, 쯧.”
“에잉, 어려서 생각이 없는 게지.”
“30년 무급 봉사를 요구할 때부터 흉악한 놈이라는 건 알았으나 이 정도로 레이디에 대한 배려가 없을 줄이야.”
“큼.”
결국, 매저드 교수가 기침으로 눈치를 주고 나서야 마법사들의 투정이 사라졌다.
나는 괜히 머쓱해서 퀸과 그린의 전투로 눈을 돌렸다.
“초가속!”
“초가속!”
둘은 누가 더 빠른지 내기라도 하는지 속도에 편중된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사용하는 기술이 겹쳤다.
초가속은 이고강이 이계에서 배워온 기술이다.
‘거기가 상위 차원이었던 건가.’
아무튼 나와 마법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의 전투는 한참 이어졌다.
해가 질 때까지도 결판이 나지 않자 매저드가 중재에 나섰다.
“그만, 내일 다시 하게.”
그르르르르.
후욱, 훅.
난장판이 된 계곡에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울린다.
“크흐, 하하하!”
“후후.”
그러다 어째서인지 둘은 비슷한 웃음을 머금고 서로에게 다가가더니.
팡!
서로의 주먹을 부딪친다.
“당신, 강하네요.”
퀸의 말에 파안대소한 암컷 그린은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너도 시골 차원의 주민치고는 제법이다. 당장 내 부하들에게 소개하고 싶어질 정도야.”
“그들도 당신만큼 강한가요?”
“물론! 언젠가 만나게 해주지.”
“기대할게요.”
“좋아! 나는 됐어.”
뭐가.
그린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더니 이내 발견하곤.
“발파록의 명예 찾기는 포기할게.”
“어째서?”
“이 녀석의 ‘존중’은 내가 얻고 싶어졌거든.”
굵은 손가락으로 퀸을 가리킨 그린은 처음과는 달리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지구인을 죽이지 않겠다고 네 명예에 걸고 맹세하면 머물 장소 정도는 마련해주마.”
“나는 전사다. 누구도 내게 명령하지 못해!”
“여기서 사람을 해하는 건 불법이다. 지구에 왔으면 지구 법을 따라야지. 싫으면 돌아가.”
“으윽.”
퀸에게서 눈을 못 떼는 암컷 그린.
퀸이 그렇게나 마음이 든 건가. 자기 신념을 깰지 고민할 정도로?
‘이거…, 잘하면 대어 하나 건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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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