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1학년들의 우상 (2)
번개를 다루는 선후배의 대련은 안토니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자.”
남만혁이 건네는 장갑을 빼앗듯 받아든 안토니오.
‘얄미운 자식! 앞으로는 결투 신청을 신중하게 해야겠어. 기가라이트닝 후배는 다 좋은데 너무 끈질기단 말이지. …아까 그건 영역으로 밀어낸 건가? 빌어먹을. 나는 아직 저렇겐 못 하는데. 후, 오늘은 밤샘 훈련이다.’
팟.
두 사람이 착석하기가 무섭게 교탁 뒤에 빛이 번쩍였고, 매저드 교수가 순간이동으로 등장했다.
“다들 모였구먼. 오늘 강의는 정령탑의 마법에 대해 배워봄세.”
뚜르르.
막 홀로보드에 정령탑 외관이 비춰지는 때에 매저드 교수의 품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매저드이올시다. 누구? 아.”
홀로폰을 꺼내 귀에 대고 대화를 나누던 매저드 교수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되었네, 나도 자네 선친께 신세 진 게 많아. 감사는 무슨. 곧 감세.”
통화가 끝난 매저드 교수가 홀로보드의 전원을 끄며 말을 이었다.
“오늘 강의는 정령탑 견학으로 변경되었네.”
“따르겠습니다, 스승님.”
“와!”
안토니오와 기가라이트닝이 적극적으로 반응한 반면, 2학년 A2 반의 안나벨과 작센의 표정은 어두웠다.
“자네들은?”
“죄송합니다, 교감님께서 어떤 경우든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도요.”
“그래? 그럼 자네들은 자습하다 시간이 되면 돌아가게. 만혁, 자네는?”
“저는 가죠.”
“좋네,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하니 이리 오게.”
매저드 교수에게 붙자 발아래에 마법진이 그려졌고, 이후 빛무리와 함께 강의실에서 사라졌다.
그들을 감싼 새하얀 빛이 사라지자 반투명한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정원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십시오. 그랜드 위저드 매저드님.”
녹색의 로브를 입은 중년의 마법사가 매저드 교수에게 정중히 인사한다.
“그리 예의 차릴 거 없네. 다들 같은 길을 걷는 처지이지 않나. 그보다 정령살해자는 찾았나?”
“부끄럽게도 아직입니다. 그런데 뒤에 계신 분들은?”
“내 제자들일세. 인사들 하게나.”
“남만혁입니다. 어둠과 융합의 정령을 다룹니다.”
검은 찰흙 덩어리 같은 위즈를 소환해 자기 어깨에 얹는 남만혁을 본 안토니오는 머리에 떠올렸던 ‘인상적인 소개문 1’을 폐기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화려한 방법으로 인드라를 소환했다.
파즈즉!
발끝에서부터 올라온 전류가 안토니오의 왼손으로 모였고 전격으로 이루어진 지팡이가 강렬한 스파크와 함께 나타난다.
“안토니오 골든우드입니다. 보신 것처럼 전격의 정령과 계약했습니다.”
“기가라이트닝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령은 없습니다!”
“FF. 나도 정령은 아직.”
“오오! 감동했습니다. 정령탑의 예를 아카데미 학생에게서 볼 줄이야. 매저드님이 가르치신 겁니까?”
“그럴 예정이긴 했네.”
매저드 교수의 흐뭇함이 담긴 눈이 남만혁에게 닿는다.
“학생들이 자진해서 알아봤다는 말씀이시군요. 허허, 참 기특합니다. 아차, 제 소개를 잊었습니다. 저도 예의를 갖춰야겠죠.”
정원을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던 나비들이 녹색 로브의 마법사 옆으로 모여들더니 여성의 모습으로 변한다.
“정령탑주 실디움. 제 친우는 따스함과 초목의 정령, 드라이어드 엠프레스입니다. 으음, 라이. 그만.”
나비로 이루어진 드라이어드가 실디움의 턱을 어루만지며 유혹하는 듯한 행동을 하자 실디움이 당황하며 피한다.
그러자 드러이어드 엠프레스를 이루던 나비들이 강한 날갯짓을 내며 흩어졌는데, 마치 여성이 웃는 듯한 소리가 났다.
“자아가 대단하구먼.”
“그래서 늘 곤란합니다. 큼, 죄송하지만 전화로 말씀드렸던 건을 바로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세나. 그런데 말일세.”
“말씀하시지요.”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예?”
매저드 교수는 자신의 좌우에 있던 남만혁과 안토니오의 등을 슬쩍 밀며 입을 열었다.
“이 아이들에게 맡겨보게.”
“당장은 정령이지만, 인간을 사냥할지도 모릅니다.”
“괜찮아.”
“진심이십니까?”
“내 제자들은 강하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우선 마지막으로 흔적이 발견된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실디움이 금사철과 국화가 달린 기다란 스태프를 허공에서 꺼내 좌우로 흔들자 정령탑 내의 다른 층으로 이동되었다.
“여기, 혹시 공원이었습니까?”
좀 전의 정원과는 상반되는 삭막한 풍경. 갈색으로 시든 풀과 메마른 나무들. 공터 중앙에 놓인 분수 동상은 부서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곳곳에 금이 가 있다.
“예. 정령살해자가 모든 정령을 죽이고 정령력을 앗아갔습니다. 이쪽으로 와보시겠습니까?”
남만혁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실디움은 학생들을 분수 쪽으로 이끌었다.
“이 흔적이 유일한 단서입니다.”
“발톱 같네요.”
“예, 변형계 각성자가 숨어든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폭주한 정령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안토니오가 정령 폭주를 거론하자 실디움의 표정이 크게 구겨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어린 마법사, 그 말은 굉장한 실례입니다. 여기는 정령탑이고 저는 그 탑주입니다.”
정령 폭주는 본인 능력 이상의 정령과 강제로 계약을 시도할 때 발생하는 인재(人災)다.
이는 정령탑에서는 금기 중의 금기로 취급하기에 안토니오의 질문은 ‘너나 너희 탑 마법사가 무리하다가 벌인 일 아니냐.’라고 한 것이다.
만약 정령탑의 실수였다면, 그랜드 위저드를 부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죄, 죄송합니다.”
“용서하겠습니다. 주의하세요.”
“네….”
남만혁은 발톱 자국을 유심히 들여다보다 실디움에게 물었다.
“경찰은 뭐래요?”
“그들은 저희에게 협조하지 않습니다.”
“희생된 정령의 수는요?”
“백이 넘습니다.”
뿔을 긁적인 남만혁이 무어라 하려는 찰나, 안토니오 골든우드가 좀전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급히 자신의 추론을 뱉었다.
“범인은 아직 탑 안에 있습니다!”
“계속해보세요.”
“마탑의 출입은 엄밀히 관리됩니다.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간단합니다. 정령탑 내의 모든 정령을 한곳으로 모으고 감시하면 됩니다!”
하아….
허허.
실디움의 탄식과 매저드의 웃음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안토니오였으나 주장을 굽히진 않았다.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자네가 잘 몰라서 그리 말하는 걸세. 정령탑은 절반쯤 정령계나 다름없어. 전 세대의 마법사가 계약한 정령들이 전 주인의 향취가 남은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기도 하지. 그들은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아. 그게 이 탑의 주인인 실디움이라 해도 말일세.”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탑 내에 계약된 정령의 숫자는 전체에 비하면 아주 적습니다.”
“그럴 수가….”
어깨가 축 처진 안토니오를 옆으로 밀어 시야를 튼 남만혁이 하려다 막혔던 말을 입에 담았다.
“면식범일 가능성이 크네요.”
“왜 그렇습니까?”
“지구상 모든 개체 중 민감하기로 치면 정령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텐데. 그런 이들이 도망치거나 주인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살해당했잖아요? 범인을 자주 접해 익숙해져 있었다고 보는 게 맞죠.”
“…그럴듯하군요.”
“정령이 살해당하기 전, 이곳을 자주 방문했던 사람을 찾아보시죠. 손님이든 마법사든, 정령이든.”
안토니오와 똑같이 정령을 의심했음에도 실디움은 남만혁의 가설을 반박할 수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 *
얼마 후. 삭막한 공원으로 뚱뚱한 사내가 실디움에게 붙잡혀 끌려왔다.
“놔! 너희가 내게 해준 게 뭔데!”
“은혜도 모르는 금수 같은 놈!”
“은혜? 무슨 은혜? 매일 하수구 청소나 시켜놓고!”
“하수구 청소는 수습 마법사라면 누구나 거쳐 가는 과정이다! 그곳의 환경이 정령친화력 성장에 도움이 됨을 모른단 말이냐!”
“수습? 하, 하하. 내가 몇 년 차게?”
“기껏해야 1, 2년 차겠지. 네놈의 얼굴 따위 본 적도 없으니까.”
“5년 차다. 자그마치 5년 동안 하수구에 내 인생을 갈아 넣었는데도, 다가오는 정령은 없었어. 너희처럼 축복받은 놈들이 이 절망감을 알아?”
“그건 네가—”
“내가 재능이 없어서.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겠지? 인정할게. 죽을 만큼 싫지만, 인정해. 나는 정령친화력이 없어. 하지만 말야, 그 하수구 깊은 곳에는 나 같은 놈도 괜찮다고 하는 녀석이 있더라고.”
“…설마, 봉인을 건드렸나?”
“흐흐흐, 흐흐. 나는 녀석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장로님들, 어서 봉인 주문을!”
부욱.
탑주와 장로들의 마나가 뚱보 사내에게 집중되는 순간, 그의 등이 갈라지고 머리 셋 달린 개가 튀어나와 거대한 앞발로 실디움의 몸을 후려쳤다.
드라이어드가 만든 나무 덩굴 방패가 사이에 끼어 있었으나 충격을 해소하지 못하고 공원 구석까지 튕겨져 날아가는 실디움.
그르르르.
세 개의 대가리에서 침을 흘리며 주변을 살핀 개는 가장 가까이 있는 정령, 드라이어드 엠프레스를 한입에 삼키기 위해 입을 벌렸으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앉아.”
털썩.
“좌로 굴러.”
뒹굴.
“엎드려뻗쳐.”
커, 컹!
“뭐? 원래 엎드린 자세라고? 이게 빠져가지고. PT 8번.”
깨갱, 깽, 깽.
주홍빛을 뿌리는 뿔, 전신을 감싸는 위즈의 망토, 공간 전체를 울리는 성음.
신성 폼으로 변한 남만혁의 격에 꼬리를 다리 사이로 말아 넣은 삼두견이 철저히 그의 명령에 복종한다.
PT 8번을 반복시켜놓고 주변을 돌아본 남만혁은 박수를 한 번 짝, 치고는.
“뭐해요, 범인 잡으세요.”
“…봉인 대신 포획으로 변경합니다. 장로님들, 제게 맞춰주세요.”
기절한 뚱보 사내를 얼음 감옥에 가둔 그들은 안도의 숨을 내쉰 뒤, 이곳에서 누구보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정령을 향해 눈을 돌렸다.
“탑주님, 케르베로스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남만혁의 명령에 따라 눈물을 쏟으며 기괴한 동작을 반복하는 정령탑의 악몽을 본 실디움은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저게 정령탑을 한 번 무너트렸던 존재라고?’
선대의 선대를 통해 전해 들었던 전설. 업화와 강철의 정령, 케르베로스.
과거 마도 전성시대에 많은 마법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 공포의 정령이 저렇게 쉽게 제압되다니.
‘남만혁이라고 했었나. 저 뿔은 뭐지?’
실디움은 그의 주홍색 뿔을 잠시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제압한 건 남만혁 학생입니다. 그에게 처우를 맡깁시다.”
“탑주님! 케르베로스와 계약하면 땅에 떨어진 정령탑의 위세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흥분한 장로 하나가 탑주에게 케르베로스를 정령탑에 귀속시키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실디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정령의 맛을 본 놈입니다. 우리 탑에는 둘 수 없습니다.”
“끄응….”
“남만혁 학생, 자네에게 권한을 넘기겠네. 저 악독한 정령을 어찌하겠나.”
남은 마나량을 가늠하던 남만혁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죽이죠. 삼식아.”
돌곡.
신성 속성 마나가 잔뜩 담긴 매직 미사일에 의해 전신이 관통당한 케르베로스는 어쩐지 기쁜 듯한 표정으로 죽었다.
“다들 이거 보게, 복부가 파열됐네. 저 가공할 매직 미사일이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내출혈로 죽었을 걸세.”
“실체화된 육체가 파괴되면 본체도 죽는 건 고대 정령도 마찬가지구먼.”
“재밌군. 실험할 게 많겠어.”
정령탑의 장로들도 케르베로스라는 정령은 구전으로만 접했기에 마법사의 본질인 호기심이 체면을 뚫고 튀어나왔다.
“아직 손님 계십니다. 진정해주십시오.”
“저분이 내 손님인가? 자네 손님이지. 자자, 우리는 이걸 가지고 가도록 하세. 아, 사체는 우리가 챙겨도 되겠나? 젊은 친구. 값은 치르지.”
“그러쇼.”
“시원하구먼. 탑주는 잘 처리하고 오게. 내 해부 준비를 해놓지.”
“예. 절대 먼저 손대시면 안 됩니다!”
“알았네.”
이후, 실디움은 매저드 교수에게 먼저 예를 표하고 남만혁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덕분에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예에, 뭐. 그런데 저 인간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피 웅덩이를 만든 채 널브러진 뚱보 사내는 치유의 힘을 가진 정령에게 둘러싸여 치료받고 있었다.
“중앙마도협회에 넘길 생각입니다.”
남만혁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 *
사흘 후.
케르베로스와 계약했던 사내가 중앙마도협회로 이송되던 중, 하늘에서 떨어진 빛살에 의해 사망했다는 기사가 위저드 매거진에 실렸다.
“역시 쓰레기는 제때 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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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