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1학년들의 우상 (4)
입학시험 때만 해도 우물쭈물하던 녀석이 어느새 저런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니.
‘으휴.’
감격과 찜찜함이 교차한다. 감격이야 녀석의 발전이 그블린 토벌에 도움이 되니까 그런거고.
찜찜함은….
“그런데, 로맨. 집에만 이렇게 있지 말고 나가자. 훈련도 좀 하고. 몸이 이게 뭐야.”
이런 점이다. 내가 아는 그 퀸이 되어갈수록 녀석은 나를 귀찮게 할 게 뻔하거든.
내 이름만 어디서 나왔다고 하면 미친 듯이 따라와 주먹으로 잔소리를 퍼붓던 과거를 잠시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너 가속 훈련할 시간 아니냐?”
“아, 맞다. 나 갈게! 교감 선생님이 기다리셔.”
퀸의 가속 훈련은 남산의 지하 요새 깊숙한 곳에 위치한 중력방에서 진행된다.
중력방은 말 그대로 강한 중력을 발생시키는 공간인데 강도는 지구의 약 3배.
퀸의 내구 같은 강화계열 특성이 없으면 1분도 버티기 힘든 장소이고 이것 역시 타 차원의 기술이다.
퀸을 비롯한 강화계 학생들의 훈련을 위해 교감과 텅스텐 카우에게만 존재 사실을 알렸다.
교감이야말로 최신 문물을 가장 먼저 접하는 최상위계층 인사였기에 중력방 같은 이질적인 기술은 단번에 지구의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내게 은근히 이 중력방을 확장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오기에 그냥 리쳇과 협업해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나와 교감 사이에 그 정도의 신뢰는 있다.
뭐, 확장하려는 이유도 더 많은 학생의 단련을 위함이었던지라 거절한 명분도 없었고.
‘걔들이 그블린전에서 활약해주면 나야 좋지.’
그블린 침략까지 앞으로 30여 년.
특성 성장에 가장 중요한 청소년기에 중력방에서 훈련 성과는 히어로 활동을 하는 내내 유지될 것이다.
‘예전처럼 허무하게 전선이 뚫리는 일은 좀 덜할 테지.’
그린의 돌파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권능을 두르고 특성을 무효화시키는 파장을 뿜으며 돌진하는 녹색 파도는 인간 같은 나약한 종으로는 막을 수 없는 비합리적인 무력이었다.
“으.”
근육 덩어리들이 몰려오는 괴기스러운 광경이 떠오른 나는 고개를 흔들어 털어버리고 퀸이 열고 나간 창문을 닫았다.
똑똑.
막 나비와 실랑이를 벌이며 컵라면 뚜껑을 여는 그때, 컨테이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FF랑 기가라이트닝. 얼굴을 안 봐도 안다.
마나 고갈도 노릴 겸 신성 속성 영역을 상시 유지 중이었기에 남산에 접근하는 기척은 모조리 감지하고 있다.
“들어가겠습니다. 선배님!”
“실례.”
후, 후—
후르릅!
애들이 오거나 말거나 나는 막 익은 면발을 거세게 빨아들였고 그러는 과정에서 국물이 저들에게로 튀었다.
쩌정.
빨간 국물 방울들이 얼음알갱이가 되어 FF의 무릎을 치고 떨어져 내린다.
FF의 냉기가 접근하는 라면 국물을 적으로 인식하고 공격한 거다.
‘저거 때문이겠지.’
벌써 1학기 중반이 넘었다. 이쯤이면 보통 강의마다 조별 과제가 주어지기 마련.
아, 물론 ‘38개의 학파에 대하여’ 강의는 예외다.
교수부터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마법사인데다 학생들도 각자의 마법을 단련하느라 팀으로 뭘 해볼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애들은 오전, 오후 두 개씩. 총 4개의 강의를 듣는 1학년. 과제가 쏟아질 시기다.
“고쳐줘.”
“FF. 좀 더 예의 있게 부탁드려야지.”
“…네가 뭔데.”
“네 하나밖에 없는 친구.”
“…….”
친구라는 말에 입술을 꾹 다무는 FF. 둘이 조합이 좋다.
하나는 비관적이고 하나는 긍정적이라, 무슨 일이 생겨도 이 둘이 팀이라면 잘 대응하겠지.
“존경합니다!”
내게 인사를 박는 기가라이트닝.
“갑자기?”
“교수님들을 통해 퀸 선배님을 백업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 그건가.
지금 아카데미는 핵미사일을 막고 메달을 받은 퀸과 그걸 보조한 나에 관한 이야기가 제일 핫하다고 한다.
리가의 서몬&케이브 드라마에 이은 연속 히트라고 해야 하나.
나야 오전엔 판타스틱 듀오 때문에 해외. 오후엔 강의동 구석, 사실상 매저드 교수 관저나 마찬가지인 공간에서 마법을 배우니 얘들이 얼마나 퀸에게 열광적인지 알 도리가 없다.
‘교감의 조치로 조례도 빠지니까.’
그러던 차에 눈앞에 두 녀석을 보니 일반적인 수준은 아니구나 싶다.
해골마인 사식이를 타고 남산과 아카데미 건물을 오가는 도중 몇몇 학생들이 내게 다가오려 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기는 했으나, 우리 사식이가 평원에서 몬스터들과 목숨을 걸고 달리기 시합을 했던 속도광인지라 목적지까지 쾌속으로 질주하는 바람에 말을 섞을 여유는 없었다.
“그레이스 멜론 선배님도 처음에는 지금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들었습니다.”
기가라이트닝은 어디서 배웠는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그가 FF에게도 따라 하라는 눈치를 줬으나 FF는 이 악물고 못 본 체한다.
귀엽게들 구네.
“그래서?”
“이 녀석을 도와주십시오!”
“네가 아니라?”
“예! 저는 마법으로 특성을 극대화한다는 목표가 뚜렷합니다. 매저드 교수님도 도와주시기로 하셨고요. 하지만 FF가 특성을 마법으로 억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쪽 전문가는 남만혁 선배님이라고 교감 선생님이….”
교감 이 양반. 또 귀찮은 걸 떠넘기네.
특성 관련 케어는 ‘바른 특성 사용 상담부’라는 아카데미 내에 따로 전문 조직이 있다.
께름칙한 이름 때문인지 이용하는 학생이 적긴 하지만, 인력이나 시설은 세계 제일이다.
거기서 어느 정도 교정이 될 텐데 굳이 여기로 보내?
후르릅.
크하.
“역시 라면은 씬 라면이지.”
“선배님?”
“알았어. 가봐.”
이 녀석. 친구를 위해 무릎을 꿇는 게 대단하다. 다른 나라의 문화여도 거북했을 텐데.
기가라이트닝이 거듭 인사하며 컨테이너를 떠나 저 앞의 마운틴 짐으로 향했다.
회원으로 받아준 뒤론 스위프트와 마가렛 예프소비치랑 대련을 자주 하더라.
둘 다 마법에 관심이 많아서 대련도 잘 받아주는 모양이고.
쟤는 저렇게만 둬도 알아서 쭉쭉 크겠지.
“…알아.”
뜬금없이 시작된 FF의 독백.
“뭘?”
“나 사회성 없는 거. 하지만 고칠 생각도 없어.”
“누가 뭐래? 히어로에게 사회성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 그런 걸 신경 쓰면 이류지. 일류는 주변에서 뭐라 하건 마이웨이야. 그런 의미에서 너는 일류의 자질이 있는 셈이지.”
“…진짜 퀸 선배가 말한 대로네.”
약간 상기된 얼굴의 FF가 중얼거리기에 바라보자 고개를 젓는다.
“아냐. 아무것도.”
“그러니까, 너는 네 길을 가.”
이 녀석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도 적도를 얼려버린 괴물로 성장한다.
지금 시기에 제대로 된 훈련을 받으면 더 이른 시기에 그만한 숙련도를 쌓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다들 쉬쉬하지만, 히어로 사회는 힘이 전부다.
슈퍼빌런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특성을 휘둘렀던 녀석에게 성격이 좀 안 좋기로서니 꼽을 줄 인간은 없다.
‘빌런이 아니라 히어로가 되기로 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고로, 지금 이 녀석을 걱정하는 건 모두에게 시간 낭비다.
누가 걸고넘어지면, 힘으로 찍어누르면 그만.
‘사춘기 시절의 정신적인 성장이야 실전 겪으면 알아서 해결돼.’
그때 잠깐 도와주면 될 일을 벌써 하려니 몹시 귀찮다.
“…알았어.”
쩌적.
마지막 한 모금 먹으려던 라면 국물이 돌연 얼어붙는다.
“이건 고치고.”
“그게 안 돼서 온 건데.”
“뭐? 이게 왜 안돼. 똥꼬에 힘 빡 주고 이 얼음의 냉기를 빼앗는다고 생각해봐.”
국물이 얼다 녹기를 몇 번 반복하다 끝내 다시 얼어붙는다.
FF의 눈에 실망감이 스친다. 내가 최근 몇 년간 보육원에서부터 어린 애들을 많이 접하다 보니 이 정도 감정을 읽는 건 일도 아니다.
“뭘 포기하고 앉았어. 될 때까지 해.”
“으응? 하지만….”
“해.”
싱크대 위에 국물이 담긴 컵을 올려놓고 고갯짓하자 FF가 입술을 짓씹으며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운다.
“몸에 힘 빼. 똥꼬에만 힘주고.”
“…저질.”
“저질은 확 씨. 네 특성이 저질이지. 다시!”
“이…!”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지 않은가. 분노는 좋은 의지를 일으키는 데 아주 좋은 양분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음은 완전히 녹았고 국물은 본래의 미지근함으로 돌아왔다.
“지금 머릿속에 떠올린 이미지를 기억해.”
“이걸?”
어쩐지 떨떠름한 표정의 FF.
“무조건. 그게 뭐든 네 특성 제어의 키가 될 거다.”
“…너무 별론데.”
“나중에 애인이랑 뽀뽀하다 냉동인간 만들고 감옥 갈 거면 상관없고.”
“그건 싫어.”
“그렇지? 그러니까 너도 짐에 들러서 연습하고 가라. 번헤드나 퓨즈에게 도와달라고 해. 걔들 할 짓 없이 놀고 있을 테니까.”
“응.”
FF가 컨테이너 밖으로 나간 뒤에야 마음 편히 숨겨둔 조각 케이크를 꺼내 입에 넣었다.
냐아?
매번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어느새 집뚱냥이가 된 나비가 그걸 왜 먹냐고 묻는다.
나는 케이크를 오징어처럼 씹으며 답했다.
“처음엔 좀 그랬거든? 근데 먹다 보니까 이게 맛이 묘하단 말이지. 좀 줘?”
햐악!
차마 버리기 뭐해 껌 대신 씹고자 놔둔 교감의 타이어 케이크는 이젠 디저트 타임에 없어선 안 될 감초 같은 것이 되었다.
“싫으면 말지, 왜 욕을 하냐.”
햐아아악!
* * *
다음날.
소란스럽던 1-A반은 FF의 등장과 함께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한순간에 조용해진다.
그리고 각자의 방식대로 곧 덮쳐올 냉기 파도를 막기 위해 자세를 잡는다.
“어?”
“오늘은 괜찮네.”
“FF, 좋은 일 있었어?”
같은 학생들의 질문.
평소의 FF였다면 고개를 돌리거나 무시했겠으나 어째서인지 오늘은 목소리를 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냥.”
FF는 방금 타인의 눈에 노출되었을 때 뿜어져 나오는 냉기를 처음으로 컨트롤하는 데 성공했다.
“와, 나 FF가 말하는 거 처음 봐.”
“입학 선서했잖아.”
“그건 그냥 읽은 거잖아. 멍청아.”
“멍청? 따라 나와 이 자식아.”
“오, 그럼 내가 쫄 줄 알고? 제3 훈련장 비어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
FF는 자신을 향한 관심은 모조리 악의로 취급했기에 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적이 없었다.
‘생각보다….’
“너한테 관심 없지?”
노란 앞머리를 흔들며 다가온 기가라이트닝.
“…어.”
“그런데 어떻게 한 거야?”
“뭘?”
“지금 말야. 매일 강의실 들어올 때마다 냉기 폭풍 날렸잖아. 이번에는 어떻게 참은 거야?”
“…내가 일부러 했다고는 생각 안 해?”
“절대. 너는 그런 녀석 아니잖아.”
“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본 너는 사실 착한 녀석이라는 거.”
“다른 이유는?”
“남만혁 선배가 널 이뻐한다는 거? 마운틴 짐 회원목록 보니까 그 선배 은근히 인성 좋은 사람만 가려서 받더라.”
“이, 이뻐한다니.”
안 그래도 그 선배 때문에 곤란한 차였다.
‘선배랑 키스하는 상상으로 냉기를 제어했다고는, 죽어도 말 못 해.’
FF는 정말 무덤에 갈 때까지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야,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안녕? 너희 오늘도 사이가 좋네. 혹시 사귀어?”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지켜보던 플라밍고대시가 슬쩍 운을 던지자 둘이 동시에 즉답한다.
“절대.”
“아니.”
“그럼 FF. 나한테 네 남친이 될 기회가 있을까?”
플라밍고대시는 햇빛이 강의실을 가장 깊숙이 침투하는 이 시간을 기억해두고 자신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 고백을 날렸다.
“싫어.”
“그래….”
지금까지 성공률 100%인 고백법이었으나 FF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거절했다.
플라밍고대시는 어깨를 늘어트리며 자리에 앉으려다, 문득 물었다.
“FF. 너, 좋아하는 사람 있어?”
“…….”
FF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으나 두 소년은 확신했다.
‘있다!’
‘있어!’
고백에서 차인 충격은 금방 떨쳐버린 플라밍고 대시가 싱글 웃으며 묻는다.
“누군데?”
“…없, 없어.”
“비밀로 할게. 아무한테도 말 안 해.”
“없다니까악!”
쩌저적!
그렇게 두 소년은 냉동인간이 되었고 오전 강의는 양호실에서 보내야 했다.
다행히 큐링힐이 양호실에 복귀해 있던 차라, FF가 감옥에 가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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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