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양소민
“실망입니다, 로맨. 당신이 괴짜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허황된 이유로 돈을 뜯어내는 삼류 사기꾼인 줄은 몰랐습니다. 정상급 히어로가 되기를 바란다면 좀 더 상식적인 인간이 되는 게 어떻겠습니까?”
외교관은 그 길로 다른 두 히어로에게 가겠다며 내 제안을 거절하고 사무소를 떠났다.
쾅!
들으라는 듯이 강하게 문을 닫는 외교관. 그 충격에 허름한 컨테이너 사무소 전체가 크게 흔들린다.
“허이구야, 말세다 말세. 저런 것도 한 주의 외교관이랍시고 떵떵대고 살겠지?”
아무리 남미 쪽 문화가 마초를 지향한다 해도 전문직에 종사하는 양반이 중대사는 구분해야지, 저게 뭐야.
원래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앞으로 2년 안에 러시아가 유럽을 침공한다.
그간 크고 작은 패전을 통해 생긴 국가 부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승전으로 상환하겠다는, 이른바 ‘따서 갚는다!’ 전략을 밀어붙인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살 시도처럼 보이는 이 허술한 전략은 우크라이나는 물론이고 벨라루스, 폴란드를 넘어 유럽의 심장. 체코 프라하성에 러시아 국기를 박아버렸다.
“중국, 일본이 개놈들이지.”
대한민국을 뺀 아시아 삼대 강국의 연합. 땅을 나눠 먹기로 하고 뒤를 봐준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비난이 쇄도했으나 그들은 철면피를 깔고 승전국의 권리를 주장했다.
이에 미국을 위시한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들이 유럽 해방을 명분으로 참전하면서 세계 4차 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이 전쟁으로 무수한 나라들이 사라진다. 칠레도 그중 하나고.
종전 후, 학자들은 인류의 문명이 20년은 퇴보했다는 평을 남겼다.
물론, 필연적으로 무기에 편중된 과학기술이 발달하였으나 그블린을 상대로 의미 있는 수준의 무기는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없는 게 낫다.”
하지만 이 전쟁은 아무리 경제를 흔들고 중재를 해도 틀어막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역대 러시아 대통령들이 수십 년을 준비해온데다 국가 전체가 세뇌라도 당한 것처럼 전쟁을 바라고 있다.
그러한 국민의 단결된 감정과 의지가 체코까지 진격하는 원동력이 됐겠지.
그래서 내가 세운 계획은 ‘어차피 못 막는 거, 적당히 살리고 꿀이나 빨자.’였다.
측.
-농장주. 밀키 푸드 입점 계약 끝났어.
인간은 주변 상황이 아무리 안 좋아도 일단 먹이고 재우고 햇빛 쬐게 하면, 살아갈 힘을 얻는다.
밀키 마이닝의 자회사, 밀키 푸드가 이것을 위해 탄생했다.
운석 때문에 떡락하는 회사들 주가 방어하고 그중 일부를 팔아서 나온 돈으로 세운 회사라, 종잣돈이 풍족하다 못해 넘쳐흐른다.
“걔네들이 순순히 승인을 해줘?”
타국의 기업이 들어가려면 고위계층에 연줄을 대거나 뇌물을 먹여야 하는 제3세계 나라들마저 허가가 났단다.
-밀키 마이닝 이사라고 하니까 싹 프리패스던데?
이번 사건 덕에 밀키 마이닝의 위상이 확실히 대단해지긴 했네.
“현지 음식 조사해서 만들어. 괜히 이쪽 입맛을 기준으로 했다가 불만 나온다.”
돈 쓰고 욕먹는 게 가장 최악의 상황이다. 해서, 이왕 할 거 물에서 건져주고 짐까지 넘겨줄 생각으로 이번 일을 기획했다.
-빌텔처럼 말이지? 알았어, 그렇게 준비할게.
“아. 리가를 통해 뿌릴 영상들 제작은 잘 되고 있지?”
-해당 국가에 신뢰도 높은 연예인 섭외해서 찍었고 지금은 편집 작업 중.
밀키 푸드 광고를 비롯한 대피소 피난 요령이나 구조 신호 발신 방법 같은 공익 광고를 각국의 언어로 제작하라고 지시했었다.
“역시 리쳇, 빈틈이 없구만. 비결이 뭡니까?”
내가 기자를 흉내 내며 묻자 리쳇이 또 받아준다.
-우리 같은 목화솜 따개들은 채찍을 맞지 않으려면 이렇게 헌신적으로 성과를 내야 한답니다.
“야, 누가 들으면 진짜 때리는 줄 알아.”
-큭큭. 나중에 흑인 휴머노이드 만들어서 들어갈까 봐. 아, 참. 안소민 씨가 양효민 의원의 양녀로 들어간 거 알아?
“휴머노이드는 무슨. …누나가, 뭐?”
* * *
대한민국, 서울. 양효민 의원 저택.
“저를 부른 이유가 뭐죠?”
양복을 입은 뿔테 안경의 여성, 올해로 22세가 된 안소민은 양효민 의원의 서재에서 그와 독대하고 있었다.
“너희에겐 재미없을 영상을 입수해서 불렀다.”
“영상이요?”
양효민은 다른 말 없이 리모컨을 조작해 극비리에 입수한 영상을 재생했다.
거기엔 한때 AI의 인권 문제로 화두에 올랐던 휴머노이드 ‘마리’가 하늘을 보며 멀뚱히 서 있는 모습이 나왔다.
“이미지와 달리 깨끗한 정치인은 아니시네요. 하얀 은사님.”
거기서 앞으로 나올 광경을 예측한 안소민이 그의 별명을 부르며 비꼬았으나 양효민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영상을 응시했다.
이윽고.
쭈웅.
마리의 손에서 뻗어나간 빔이 보육원 하늘의 구름에 숨어 있던 드론을 정확하게 타격했다.
파지직.
저 빔은 마리의 6살 생일 기념으로 남만혁이 선물한 프렉시스산 암파츠에 내장된 입자분해파동포다.
당시 남만혁은 ‘여차할 때 보육원을 지키라고 저 기능을 달아뒀다.’라고 안소민에게 변명했었다.
치지지직.
노이즈 소리만이 서재를 맴돈다.
양효민은 깍지를 낀 손에 턱을 괸 채 안소민이 입을 열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고소는 안 돼.’
양효민이 보육원을 도촬했다고 증명하려면 이 영상을 다수에게 공개해야 한다.
그로 인해 파생될 수많은 문제가 파노라마처럼 안소민의 뇌리에 스쳐 지났다.
아랫입술을 깨문 그녀는 홀로폰을 만지작거리며 남만혁을 떠올렸으나 이내 양효민의 제안을 들은 뒤에 도움을 요청해도 늦지 않다 판단하고 고개를 들었다.
“원하는 게 뭐죠?”
“이제야 대화가 통하겠군. 최 비서! 가지고 오게.”
양효민은 남만혁의 주변인 중에 전자기기의 보안을 우습게 뚫는 인물이 존재한다는 걸 안 이후로 그와 관련된 일을 조사할 때는 철저히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했다.
끼익.
이젠 시골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노란색 파일철을 들고 온 비서는 양효민의 책상에 그것을 내려두곤 흘낏, 안소민 쳐다보며.
“의원님의 제안은 보육원 운영에도 도움이 될 거다.”
“어허, 최 비서. 실례일세. 사과하시게.”
“…제가 경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안소민을 향해 허리를 숙인 비서가 붉어진 얼굴로 나간 뒤에야 양효민이 파일철을 앞으로 밀었다.
“열어 봐라.”
팔랑.
파일철 속 용지는 두 장이었고 모두 손글씨로 적혀 있었는데, 하나는 양효민 의원이 이번 대선 예상 득표율. 또 다른 하나는.
“입양 신고서?”
처음 양효민은 안소민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남만혁이 자란 보육원의 관리자 정도.
하지만 근 6년 동안 보인 그녀의 성취에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남만혁 각성 직후 고등학교 자퇴, 검정고시 패스.
한국 대학교 수석 입학, 사회복지학과와 심리학과 복수 전공.
다음 해에 두 학과 교수들의 감탄을 사며 동시에 박사 과정 준비.
이례적으로 2년 만에 두 학문 모두 박사 학위 취득.
심지어 외모마저 수려하다. 또, 전 세계의 은인인 남만혁의 가족이라는 점까지.
무엇 하나 아쉬운 구석이 없는 팔방미인.
“내겐 네가 필요하다. 안소민.”
[대선 후보 예상 득표율]
…
[양효민 : 9.1%]
[주우율: 16.8%]
[차기석 : 21.7%]
[최석 : 23.6%]
그간 들인 노력에 비하면 처참한 수치.
원인은 이전 두 번의 대선에서 양효민이 밀었던 선배들이 그의 표를 흡수한 채 다른 진영으로 넘어간 것.
명백한 배신이었다.
그들은 먼저 양효민을 찾아와 웃는 낯으로 사과하며 좋은 날이 올 거라는 헛소리를 뱉고 돌아갔다.
그날 밤. 양효민은 어두운 서재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인간을 믿은 자신의 안이함을 인정하고 마음속에 칼 한 자루를 품었다.
“좋아요.”
“시간은 원하는 대로, …내 제안을 이해한 게 맞나?”
“저도 제대로 된 부모님을 가져보고 싶었거든요.”
어릴 적의 안소민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어주는 가족에게 입양되는 것이 꿈이었다.
“진심인가?”
하지만 스무 살이 넘은 자신을 정말 가족처럼 여겨줄 사람은 보육원 아이들밖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기에 안소민은 가족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의원님. 제가 어른이 돼서 가장 먼저 배운 게 화장 기술이에요.”
“어째서지?”
“피부를 어떻게 치장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니까요.”
“하! 하하하! 이 나를. 감히 화장품으로 삼겠다?”
“의원님이 원한다면요.”
안소민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사람의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양효민은 청렴결백한 ‘사람 냄새나는’ 이미지를 가진 정치인이고 이는 자신의 미래와 보육원의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다.
‘영상은 나중에 리쳇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되겠지.’
남만혁은 보육원에 모종의 위기가 닥치면 안소민이 리쳇의 조언을 들을 수 있도록 그녀의 존재를 알렸었다.
“서류는 내가 처리하지. 너는 내일부터 본가로 들어오도록.”
“아뇨. 의원님이 우리 보육원으로 오세요. 그게 확실하지 않겠어요? 대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여론몰이 한 번 하셔야죠.”
“…….”
양효민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게 이제 막 사회로 나온 22살이 떠올릴 정략이란 말인가.
“삼고초려라고 포장하면 적당하겠네요. 적당한 때를 봐서 이렇게 인터뷰할게요. ‘아버지라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양효민 의원님 덕에 알게 되었습니다. 제 동생 로맨이 그를 지지하는 이유가 있었네요.’”
양효민의 머릿속에는 안소민을 더욱 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여럿 존재했었으나 이 순간, 모조리 폐기했다.
‘정치 감각이 괜찮다. 시행착오를 겪고 연륜을 쌓으면…. 이런.’
순간적으로 안소민이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양효민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자책했다.
‘나도 나이가 들었어.’
“완벽하군. 그렇게 하지.”
“네, 아빠.”
“…큼.”
* * *
소민 누나가 양효민의 양녀가 되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부랴부랴 찾아갔을 때는 이미 서로 아빠, 딸이라 부르는 관계가 되어 있어 그냥 조용히 축하해주고 돌아왔다.
이후 리쳇이 건져 올린 양효민에 관한 비리 정보들을 그의 메일로 전송해서 압박을 넣어두긴 했는데, 그 양반은 워낙 티를 안 내서 먹혔는지 안 먹혔는지 모르겠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오후 1시 무렵에 갑자기 속보가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부채 탕감을 요구하던 러, 금일 새벽부터 유럽으로 향하는 천연가스관 동결. 대체 연료는? 無!]
[유럽연합, ‘러, 짐승 같은 행동. 강력히 대응할 것.’]
[러시아 vs 유럽연합. 전쟁 임박? 각국, 무장 정비 중.]
예상보다 빠르다. 요새 짓는다고 여기저기 찝쩍대서 그런가? 아니면 쓰레기들 치운답시고 블랙 기업 몇을 무너트려서?
뭐가 됐든 나야 좋다.
그블린전까지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려면, 전쟁이 최고니까.
그렇게 우리는 사상자를 최대한 줄이는 것을 목표로 기존에 깔아둔 인프라를 활용해 대피소와 요새를 최대한 빠르게 건설했다.
* * *
2056년 4월.
모스크바에서 한 여성이 성폭행당한 채 살해당했다. 범인은 스페인 국적의 남성.
그것이 러시아와 유럽연합 전쟁 발발의 방아쇠였다.
“리쳇, 물 들어왔다! 노 젓자.”
-드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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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