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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157화 (157/201)

<157화>

러시아 vs 유럽연합 (1)

러시아의 선전포고로부터 3주.

러시아, 우스네라 인근 숲에선 전쟁을 반대하는 히어로들의 비밀 회동이 열리고 있었다.

“알렉세이 님. 야반과 세르게아 쪽에서 답신이 왔습니다.”

지금 같은 시기에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건 미친 짓이었기에 현재 통신 수단은 중세 전쟁처럼 파발마가 주력이었다.

“빌어먹을 전쟁광 때문에 이 나이 먹고 무슨 짓거린지.”

굴속에 차린 간이 기지에서 흙비린내를 맡으며 편지를 주고받는 상황에 한숨이 나오는 알렉세이였다.

“저희도 유럽 놈들처럼 암호를 도입하면 어떻습니까.”

“헛소리! 양자컴퓨터인지 뭔지 때문에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암호화는 싹 다 쓸모없게 된 걸 모르나?”

“제가 모스크바 대학에서 한 대 빌려오겠습니다. 명령만—”

강화계 각성자인 부하 무식한 제안에 알렉세이는 손을 내저어 말을 자르고 편지를 펼쳤다.

[합류 불가.]

“염병할 놈들!”

알렉세이가 신랄하게 욕을 하는 동안 부하는 탁자 위에 돌돌 말려 있는 지도를 펼치며 파발마를 통해 들은 정보를 읊었다.

“국내의 해외 기업들이 빠르게 철수하고 있습니다.”

“좋은 방법이 있나?”

“공항을 막아서 못 나가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후. 마가렛 오라고 해.”

러시아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히어로는 적다. 거기에 목숨까지 걸 수 있는 인물은 한 줌이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그런 인간들이었다.

“알겠습니다.”

저 강화계 수하도 그런 사람이라는 걸 뒤늦게 떠올린 알렉세이가 그를 위로한다.

“안드레이. 내가 매몰차다고 너무 섭섭해하지 말게. 자네는 최전선에서 동지를 지킬 때 누구보다 빛나는 사람일세.”

“…괜찮습니다. 마가렛 예프소브나를 불러오겠습니다.”

묵직한 발걸음이 굴 너머로 멀어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무게의 발소리가 울렸다.

“부르셨나요. 할아버지.”

2m가 훌쩍 넘는 체구. 인간의 한계 이상으로 압축된 전신 근육. 포니테일로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

알렉세이는 그녀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마가렛. 너를 볼 때면 늘 푸테나가 생각나는구나.”

과거, 스위프트를 취하려던 교장의 계략에 휘말려 앱솔루트레터와 함께 죽음을 맞은 알렉세이 블리디미로비치 푸테나가 바로 이 노인의 아들이었다.

“푸테나는 블라디미로 할아버지를 늘 존경했죠. 군인이 되고 싶다는 말이 입버릇이었고요.”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블라디미로는 각성자가 된 후, 전문 장교 교육을 받은 군인이다.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군부의 중추에서 핵심 인사로 활약했으나 양아들의 죽음에 모든 야욕을 상실하고 은퇴했다.

이후 고향에 작은 히어로 사무소를 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데미를 졸업한 마가렛 예프소비치가 찾아와 사이드킥으로 받아달라 간청하여 지금에 이른다.

“그랬지.”

우수에 잠긴 알렉세이의 모습에 마가렛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안드레이 선배가 해외 기업이 빠져서 문제라던데, 그거 때문에 부르신 건가요?”

“맞다. 혹 네게 방법이 있느냐?”

“생각나는 게 있긴 해요. 그런데 말씀드리기 전에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말해보려무나.”

“안드레이 선배에게 저를 예프소브나라고 부르지 말라고 해주세요.”

“응? 하하! 예프스가 너를 남자처럼 키우고 싶어 하긴 했지. 이제 너도 성인이 되었으니 예프소브나를 미들네임으로 써도 될 게다.”

“아뇨, 예프소비치가 좋아요. 친구들은 저를 그렇게 알고 있거든요. 앞으로 히어로 명으로 활동할 거라 상관없기도 하고요.”

“알았다. 그렇게 일러둘 테니, 네 생각을 말해 보거라.”

“잠시만요.”

마가렛은 탁자에 펼쳐진 지도에서 붉은 빗금이 그어진 회사들을 주욱 훑고는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회사요.”

“밀키 푸드? 여긴 규모가 너무 작아.”

다른 기업들과는 달리 러시아에서 발을 빼진 않았으나 말 그대로 규모가 구멍가게 수준.

이래서는 러시아 내 식량을 보급하기가 어려울 거라 판단한 알렉세이가 고개를 젓자.

“할아버지가 밀어주면 금방 보완할 수 있을 거예요.”

“응? 이 회사를 잘 아는 듯한 말투구나.”

“제 친구가 여기서 일하거든요. 잘하면 안정적으로 물자를 공급받을 수도 있어요.”

마가렛은 남만혁이 밀키 재단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남만혁은 미래에 활약하는 애들에겐 가끔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자랑을 하곤 했는데, 그 레퍼토리에 밀키 재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입이 싼 곽재우나 빌런의 여지가 있는 안토니오 골든우드 같은 이들에겐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얼마나?”

“지금 물어볼게요.”

홀로폰을 꺼내는가 싶어 만류하려던 알렉세이는 어떤 동작도 없이 허공을 보며 누군가와 대화하는 마가렛의 모습에 조용히 입을 닫았다.

“땅과 점포를 낼 자리만 만들어주면 어디든 배송하겠다네요.”

“믿기 힘들구나. 국경과 해상이 막혔는데도 들어올 수 있다는 게냐.”

“본인 말로는 ‘점프’할 거라 상관없대요.”

“허어, 부탁한다고 전해다오. 땅은 내가 사재로라도 구해두마.”

이에 마가렛이 다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대뜸 피식 웃는다.

“하여튼 개빌 아니랄까 봐.”

“이야기가 끝났느냐?”

“네, 밀키 재단 쪽에서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는 새로운 제안을 해왔어요. 해외 기업들이 나간 자리를 자기네가 대신하고 싶다네요.”

“식품 회사는 거의 다 빠졌으니 어렵지 않지.”

“아뇨, 식품을 포함한 모든 분야요.”

“…마가렛. 오해하지 말고 듣거라. 혹시 네 친구는 미친놈이냐?”

마가렛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맞아요, 그 녀석은 제가 아는 사람 중 최고 또라이예요.”

* * *

피우우우우!

피우우우!

같은 시각. 벨라루스 국경 인근의 도시인 비테프스크에선 러시아군이 투하한 백린탄이 폭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백린탄? 저 미친 새끼들! 제네바 협약을 깨?”

“그딴 협약 지킨 놈이 있긴 하냐? 너도 딴짓 그만하고 와서 얼른 민간인 대피시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전쟁이 벌어지기 전, 민간인들을 후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엄청난 불만이 나왔으나 유럽연합은 ‘너와 내가 살아야 집도 지역도 산다.’라는 말로 시민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시민에 포함되지 않는 노숙자와 불법체류자 혹은 범죄자는 국경 지역에 그대로 남았다.

이들을 인근 임시 대피소로 유도하는 것은 구조 전문 히어로들의 일이었다.

“끄아아악! 살려줘!”

빈집을 털던 도둑이 민가를 수색하는 히어로들의 눈을 피해 골목에 숨었다가 백린탄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전신을 파고드는 화약에 끔찍한 고통을 느끼던 그는 결국 쇼크로 심장이 멎었다.

멀리서 도둑을 발견하고 달려가던 히어로는 축 늘어지는 그의 모습에 혀를 차곤 발길을 돌렸다.

인적이 사라진 골목에 기계음이 나지막이 울린다.

측.

“부상자 발견. 능동위장 해제. 반경 5km 내 관찰자 없음. 프로토타입 힐링 비 사출 및 간이 수술 허가 바람.”

-허가한다.

골목 어귀에서 모습을 드러낸 메딕기어.

철컥, 소리와 함께 견갑 일부가 개방되더니 벌들이 튀어나와 도둑에게 침을 놓는다.

그러자 멈췄던 호흡이 돌아왔고 이어 메딕기어가 순식간에 간이 수술실을 설치, 제세동기를 조립해 도둑의 가슴에 전기 쇼크를 줘 심장을 뛰게 했다.

“맥박 확인, 혈압 제어 완료. 치료 진행.”

백린탄의 찌꺼기 추출까지 마친 메딕기어가 환부에 소독된 붕대를 감는 것으로 수술 종료를 선언하고 간이 수술실을 해제했다.

측.

“대상은 C-91 지역의 ‘밀키 푸드-플루트 7호점’으로 이송 예정. 확인 바람.”

-확인. …주의! 러시아 전차 접근 중. 즉시 능동위장을 유지한 채 이탈할 것.

“환자의 근육 경련으로 인해 능동위장 불가. 단순위장으로 대응하겠음. 무기 사용 허가 바람.”

능동위장이 투명화라면 단순위장은 국방색 우의를 둘러 외형만 가리는 일차원적인 위장에 불과하다.

-빔 무기 제외 허가. 흔적, 살상 최소화하고 생존자는 회수할 것.

“유의하겠음. 전방 T-17 전차 확인.”

그으으으응!

“밟아라, 세르게이! 저것도 부숴버려!”

소대의 선두에서 구조 전문 히어로와 노숙자들을 무한궤도로 뭉개며 달리던 러시아군 전차장은 눈앞을 가로막는 구조물, 메딕 기어를 인근에 흔하게 보이는 상자 더미로 추측하고 조종수의 어깨를 발로 쳐댔다.

쿵!

“컥! 뭐, 뭐야.”

그러나 메딕기어가 달려오는 탱크의 주포를 잡아채 아래로 누르자 60톤이 넘는 전차의 차체 뒷부분이 번쩍 들렸다.

뜨드득!

이어 주포 채 포탑을 뜯어낸 메딕기어가 도망치는 러시아 병사들을 모기 잡듯이 손바닥으로 쳐 기절시키고 비어 있는 조종석에 구겨 넣었다.

-전차 소대 접근 중.

“이탈하겠음.”

얼마 후, 메딕기어가 해당 지역을 벗어났을 무렵 러시아 전차 소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락토르 대위님, 생존자가 있습니다!”

“당장 데려오도록.”

메딕기어와 부딪칠 때의 충격으로 기절한 포수가 병사들에 의해 전차 밖으로 끌려 나왔다.

촤악!

락토르가 뿌린 물 양동이 세례에 의해 정신을 차린 포수.

“푸헙, 픕. 허억, 헉. 여긴?”

“관등성명을 대라, 병사.”

“상, 상병. 상병….”

뇌진탕으로 인해 기억 상실이 온 포수는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자 패닉에 빠졌다.

짝!

락토르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뺨을 쳐올렸다.

“악!”

“상병. 우리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총 여섯 대의 전차가 파괴되었다. 전원 실종 또는 사망이었지. 너는 유일한 생존자다. 상황을 이해했나?”

“예, 예.”

뺨을 맞은 뒤 기합이 바짝 든 상병의 모습에 흡족해한 락토르가 재차 물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지?”

“여기선, 그러니까. 으, 으으!”

“말해라, 상병!”

답답하게 구는 그의 모습에 락토르가 발길질을 하며 윽박지르자 머리를 붙잡은 상병이 한 마디를 뱉고 정신을 잃었다.

“체르노보그가 우리를 습격했다!”

죽음의 신인 체르노보그가 상병의 입에서 나오자 그걸 들은 다른 병사들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한다.

“충격으로 나사가 빠진 모양이군. 의료 막사로 보내고 깨어나면 다시 묻도록 하지.”

락토르가 급히 수습했으나 병사들은 이미 동요하고 있었다.

“알, 알겠습니다.”

“…쯧.”

* * *

뚜르르.

“여보쇼. 어, 마가렛. 잘 고통받고 있냐? 그래, 내일부터 밀키 푸드 개시할 예정이니까 주민들에게 알려줘. 어어, 고생해라. 전쟁 끝나면, 애들이랑 같이 한잔하자.”

러시아 유통망은 몇 달 전 마피아들 정리하면서 뚫었다.

현지 얼굴마담은 전부 러시아인이고, 윗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일이 굴러가게끔 해놨다.

업무 지시를 각지에 심어둔 마이크로 드론으로 하니까, 비밀도 보장되고 좋더라.

리쳇 만세다 정말.

아, 마피아 유통망이 닿지 않는 오지는 메딕기어가 직접 물자를 나른다.

능동위장을 철저하게 유지한 채 기동하므로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갑자기 물건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거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점프’라 부르는 거고.

뚜르르르.

“오, 스프?”

스위프트의 애칭, 스프. 3학년 올라간 첫날 갑자기 그렇게 불러달라더라. 2년이면 많이 참았다나 뭐라나.

참, 저 녀석은 지금도 내가 아카데미 측 인사인 줄 안다.

3학년 여름 방학 때 교감의 의뢰로 같이 움직이면서 아니라고 했는데도 안 믿더라.

-이 전쟁. 네가 의도한 건가?

“아니. 전혀!”

이게, 누굴 전범으로 만들려고.

-알았다.

뚝.

이야, 쿨한 거 보게.

그로부터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흥분한 리쳇의 음성이 귓가에 들렸다.

-농장주! 재밌는 영상 하나 전송할게.

곧 망막에 어느 전장의 광경이 비쳤고, 거기엔 탱크와 미사일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이야.”

비록 국지적이라고는 해도 전장 하나가 개인에 의해 소강상태가 됐다.

스위프트 나름대로 시위를 하는 건가.

“응?”

뒤집힌 탱크에서 튀어나와 도망치는 병사들과 유폭되는 미사일, 그리고 노을이 지는 하늘이 내게 모종의 영감을 준다.

“이거, 잘하면 돈 좀 벌겠는데?”

-무슨 돈?

비어버린 전장에 주인을 잃은 금덩어리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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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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