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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159화 (159/201)

<159화>

기간트

“…두 달. 보안상의 이유로 연락을 안 한 것뿐이다.”

“지금 해보시겠어요?”

“이곳의 위치가 발각될 텐데?”

“상관없으니 해보시게.”

갑자기 끼어든 알렉세이에 당황하는 안드레이.

“대, 대장님. 저는—”

탕!

무어라 변명하려던 그의 얼굴에 알렉세이의 샷건이 불을 뿜었다.

끄아악!

그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와중에도 얼굴을 방어한 자신의 손목을 다른 손으로 잡으려 했다.

하지만 알렉세이가 그의 손을 군화로 걷어찼고.

“안드레이 동지, 왜 이렇게 추해졌나.”

“가족, 가족이 인질로….”

“가족보다 다수인 우리를 택했어야지. 자네는 히어로 아닌가.”

탕!

샷건의 탄환이 다시 한번 안드레이의 머리에 쏘아지자 그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었다.

모두가 침묵하는 와중 레오니트만이 얼굴에 피칠갑을 한 알렉세이에게 다가가 보드카를 건넸다.

“자네는 여전하군.”

“흥, 사람이 변하는 건 죽을 때뿐이야. 안 그런가?”

“맞는 말이지.”

“자, 모두 잔을 들게. 잔이 부족하다면 입에 술을 머금어도 좋아!”

알렉세이는 곳곳에 배치된 보드카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쥐여주며 외쳤다.

“대장님, 지금은 좀.”

마가렛이 사색이 된 사무소 직원들을 대신해 알렉세이를 만류하려 하였으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어허, 이렇게들 나올 건가? 잔 들래도. 더 높게! 그렇지. 더 나은 러시아를 위하여!”

“…….”

“설마 아직 배신자가 이 중에 남아 있나? 아군의 사기를 떨어트리기 위해 우울한 분위기로 유도하는 건 아니겠지? 다시!”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한 알렉세이의 익살스러운 농담이었으나 전신이 피로 낭자 된 그 모습 때문에 익살보단 광기에 가까웠다.

“…위하여.”

꿀꺽, 꿀꺽.

푸흐으.

“좋아. 이제야 제국의 대장부들답군. 마가렛, 뒤는 맡기마. 나는 좀 쉬어야겠어.”

알렉세이는 레오니트의 부축과 니콜라이의 조롱 같은 걱정을 받으며 통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각 무리의 리더였던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장내는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불안에 떠는 사무소 직원. 안드레이에 자신을 대입해 가족과 대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히어로. 떨리는 손으로 무장을 정비하는 어린 군인.

그들의 얼굴을 한 번씩 눈에 담은 마가렛은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나 대형 냄비를 찾았다.

“냄비는 왜?”

“수프 좀 끓이게요. 부정적인 생각이 자꾸 드는 건, 배가 고파서 그런 거거든요.”

의도적으로 들리게끔 말한 마가렛이었기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우리 대장님이 과격하긴 했지만, 덕분에 위기를 넘겼잖아요. 좋게 생각하자고요. 여기가 적에게 노출됐다면, 위험했을 거예요. 그렇죠? 야곱 선배.”

야곱은 니콜라이의 명령을 받아 안드레이의 손목을 갈라 손톱 크기의 칩을 빼내고 있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좀 전에 안드레이가 손목을 만졌다면, 이 칩에서 신호가 송출됐겠죠.”

빠각.

칩을 은색의 전파 차단지로 감아 밟아 부수는 야곱.

“다들 손 씻고 오세요.”

마가렛이 사무소 직원에게 건네받은 국자와 냄비를 부딪치며 시끄럽게 소리를 내자 사람들을 귀를 막으며 흩어졌다.

얼마 후.

달그락.

마가렛이 끓인 수프를 다 먹고 접시를 내려놓는 알렉세이.

“잘했다.”

“수프 괜찮죠? 아카데미에서도 꽤 평이 좋았어요.”

“클클, 수프도 수프지만. 사람들 달랜 것 말이다.”

“뭘요. 수프를 먹인 것뿐인데요.”

“그 수프로 그들의 신뢰를 얻은 게다. 얼핏 아무것도 아닌 거 같아도 너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늘었다는 소리다. 으윽.”

소파에 몸을 깊게 묻고 몽롱한 얼굴로 말하던 알렉세이가 대뜸 신음을 흘리자 마가렛이 벌떡 일어선다.

“괜찮으세요?”

“별거 아니다. 거기서 들어라. 후우, 전장에서의 지휘관은 말이다. 수하를 희생해서라도 살아야 한다.”

“대장님.”

“마가렛. 구심점이 없는 집단은 반드시 분열된다. 그러니 항상 너를 중심으로 집단이 굴러가게 해라.”

“네?”

“잔혹한 결정이라도 그게 정답이라 생각되면 절대 망설이지 마라.”

알렉세이의 말은 중구난방이었다. 그는 62년을 군인으로 살며 체득한 지혜의 정수를 최대한 압축해 읊어대고 있었다.

30분에 걸쳐 마가렛에게 자신이 남기고 싶은 것을 모두 전달한 알렉세이는 편안한 표정이 되어 눈을 감았다.

“내가 오늘을 넘기지 못한다는구나.”

“그,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누가요!”

“클, 의사지 누구겠느냐.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기적이란다.”

알렉세이는 지금까지 철저하게 가리고 있던 군복의 목깃을 옆으로 젖혔다.

“멍인가요? 내출혈이면 아무리 심해도 이곳의 의료 설비로 충분히 치료할 수 있어요!”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의사는 이게 지구의 병이 아니라며 할 수 있는 게 없다더구나.”

“그런….”

“내가 호통을 치니 뭐라는지 아느냐? 마법사를 찾아가란다. 오래전에 내 손으로 씨를 말린 마법사 말이다.”

과거, 러시아는 패전의 이유를 예산을 낭비한 마법사에게 덮어씌웠고 철저하게 응징했다.

그때 출세에 목말라 자진해서 앞장선 인물이 바로 알렉세이 본인이었다.

“죄업을 이제야 돌려받은 게지. 쿨럭, 크음. 나가보거라. 마지막은 빌어먹을 놈들이랑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

“이겨내실 수 있을 거예요. 포기하지 마세요. 할아버지.”

알렉세이는 눈물을 흘리는 마가렛의 뺨을 손등을 쓸며 힘없이 답했다.

“오냐.”

* * *

다음날, 벙커 내에서 간소한 장례식이 열렸다.

알렉세이는 밤사이에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듯 편안하게 죽었다.

친구들에게 남긴 유언은 ‘마가렛이 내 후임이다. 많이들 도와줘라.’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니콜라이, 레오니트 그리고 마가렛이 테이블 하나에 둘러앉아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하던 중에.

피우우웅!

결코 들려선 안 될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났다.

“우리 쪽 신호탄이다.”

미간을 구긴 레오니트의 말에 니콜라이가 역정을 낸다.

“X발! 저기서 터트리면 여기 벙커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잖아! 후, 마가렛. 어쩔 거냐.”

니콜라이와 레오니트는 이번 전쟁 동안은 친구의 유언과 안목을 존중해 마가렛을 알렉세이처럼 여기기로 했다.

“저는—”

웨에에엥!

“레오니트 중장님! 벙커 발각됐습니다!”

병사의 보고에도 꿈쩍하지 않고 마가렛을 쳐다보는 레오니트.

고민은 마친 마가렛이 고개를 들고 두 사람을 직시한다.

“저는 히어로예요. 알렉세이 대장님 같은, 우리 쪽 사람의 희생이 뒤따르는 결정은 하지 않을 거예요.”

“이상론자였나.”

“히어로는 모두를 구한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가니까요.”

실망이군. 이라는 말을 삼킨 레오니트가 몸을 돌리자.

“그러니까, 그런 상황 자체를 오지 않게 만들 거예요.”

멈칫한 레오니트가 마가렛을 돌아본다.

“너, 눈이.”

“여기서 지켜보세요.”

벙커에서 전투 태세를 갖추는 일련의 무리를 지나쳐 그대로 2m 두께의 입구를 열고 나온 마가렛이 주변을 신속하게 훑었다.

저 멀리 이곳으로 날아오는 미사일이 여섯. 그걸 쏜 것으로 추정되는 전투기가 셋. 숲을 갈아엎으며 돌진해오는 탱크 스물아홉.

“거대화.”

마가렛의 두 특성 중 하나인 거대화는 아카데미 졸업시험에서 찍은 6m를 기점으로 성장이 멈췄었다.

그러나 전장을 겪으며 다시 급격히 성장했고, 이틀 전 7m에 달하는 기염을 토했다.

“흐하아아압!”

기합을 내지른 마가렛이 인근의 나무를 여럿 뽑아 고속으로 날아오는 미사일을 향해 던졌고 놀랍게도 모조리 적중했다.

“발포!”

그러나 어느새 겨냥을 마친 29개의 포문에서 거대한 탄두가 튀어나와 마가렛에게 쇄도한다.

급박한 상황임에도 기수식을 취한 마가렛이 눈을 반개하며 호흡을 길게 뱉고는 중얼거렸다.

“충격 전환.”

본디 그녀의 특성은 거대화와 충격 전환 이 두 가지다.

허나, 지난 한 달간의 경험과 알렉세이의 조언이 충격 축적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녀의 전신에 깃드는 붉은 기운.

키이이잉, 쾅!

직사로 쏘아진 철갑탄은 눈 깜짝할 사이 마가렛의 육신에 닿았고 갉아먹을 듯 맹렬히 회전하더니 그대로 폭발했다.

도합 29번의 연쇄 폭발이 마가렛을 뒤덮자 이를 벙커 안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브레드, 마가렛을 구해와라.”

“야곱, 너도 가서 대공포 잡아!”

어찌 되었든 마가렛은 친우가 맡긴 후임이었기에 구원 조를 조직해 벙커 밖으로 보내려는 두 사람이었다.

“잠깐만.”

폭연이 걷히고 마가렛의 모습이 드러났다.

12m에 달하는 적발 적안의 거인. 전신에 휘감긴 붉은 기류.

“기간트….”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긍정하며 화면 속 거인을 주시했다.

“흐으읍!”

마가렛은 자신에게 가해진 모든 충격을 특성을 통해 신체 능력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는 확신이 들자 곧장 도약해 가장 가까운 전차 위로 떨어져 내렸다.

콰앙!

그리고 주먹을 내리찍자 전차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내부의 사람들도 단숨에 목숨이 끊어졌다. 마가렛은 이를 알면서도 망설이지 않았다.

“후에 내가 또 다른 정의에 징벌당할지라도.”

콰아아앙!

“나는 내 사람들을 지키겠어.”

대상이 생명이 있는 사람이라면 적이라 하여도 구해야 한다는 마가렛의 강박이 지금 이 순간 사라지고, ‘적과 아군’이라는 명확한 선이 그녀의 심중에 그어졌다.

투투퉁투퉁!

벙커에서 포탑이 올라와 접근하던 전투기를 요격한다.

같은 방식으로 도주하는 탱크까지 모두 파괴한 마가렛은 퇴로를 좁히는 대공포의 탄 궤도에 야곱의 의도를 알아채고 바닥을 구르는 철갑탄을 주워 전투기를 향해 던졌다.

마가렛이 투척한 철갑탄은 빗나갔으나 갑작스레 등장한 고속 물체에 기겁한 파일럿이 당황했고 야곱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펑!

“좋았어!”

마가렛은 다른 두 기도 비슷한 방식으로 처리한 뒤에 벙커로 돌아왔다.

“괜히 불칸이라는 히어로 명을 쓰는 게 아니었군.”

레오니트가 벙커에 들어오자마자 벽에 기대어 쓰러지는 마가렛을 붙잡으며 그리 말하자.

“괜찮죠? 이런 이상주의자도.”

“흥.”

마가렛은 그의 콧방귀가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하며 몰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 * *

“이놈입니다.”

브레드가 잡아 온 이는 군의 기습이 있었던 날 아침 정찰조로 나가 실종됐던 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으읍, 읍!”

재갈이 물린 채 필사적으로 무어라 항변하는 그의 목에 가타부타 말없이 나이프를 박아버리는 레오니트.

“아무리 무섭고 겁이 나도 아군을 적에게 팔아넘기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읍….”

꺼져가는 눈빛을 내려다보던 레오니트가 다시 나이프를 뽑아 브레트에게 건넸다.

“쓸만한 정보는 없군. 고생했다. 마가렛에게 보고하고 시체는 태워라.”

“예, 중장님.”

레오니트와 니콜라이는 마가렛의 위용을 직관한 후 그녀를 정식 리더로 인정했다.

“저, 중장님.”

“뭐지?”

브레트는 나이프에 새겨진 문자를 보며 다소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새로운 부대명이 정말 이겁니까?”

“집단의 이름은 아이덴티티가 중요하지. 나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야 그렇습니다만, 알겠습니다.”

나이프의 검면에는 ‘기간트’라고 음각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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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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