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165화 (165/201)

<165화>

교감의 실종 (2)

실종 10일 전, 서울 히어로 아카데미 교감실.

“부탁하신 자료입니다.”

고스트 핸드가 내미는 데이터 칩을 받아든 프리실라 루드라는 그의 팔뚝에 난 상처들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호언장담한 거에 비해 성과가 별로라 민망할 뿐입니다. 저도 나이가 들었는지 예전처럼은 안 되더군요.”

아카데미로 영입하기 전의 삭막했던 고스트 핸드를 떠올린 프리실라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이 훨씬 보기 좋아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그럼, 전 곧 강의 시간이라.”

“수고하세요.”

고스트 핸드가 나가고 칩의 내용을 확인한 프리실라는 미간을 좁혔다.

“치나 놈들이 또 수상한 일을 벌이는군요.”

[각성자 납치 감금 시설로 의심되는 연구소 조사 보고서]

[의뢰자 : 로맨 사무소, 프리실라 루드라]

[조사 내용 : 상세한 정보는 밝혀낼 수 없었음을 미리 명시함.

1. 연구소 출입 통로는 2개 이상이며 관측한 3일 동안 매일 위치가 변경됨.

2. 간섭계와 탐지계 각성자가 각 입구에 배치되어 있었음. 사적으로 그들에게 접근하였으나 연구소에 관한 어떤 정보로 발설하지 않았음.

3. 시설의 연구원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추적하던 중, 중국인 각성자가 습격해옴. 5분간 교전 후 퇴각함.

4. 교전 중 그들의 입에서 ‘휴먼 기프트’라는 말이 나옴. 연구소나 프로젝트 이름으로 추정됨.]

“휴먼 기프트.”

프리실라는 보고서 말미에 적인 단어를 중얼거리다 제자 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와, 교감 선생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나요. 아카이브헤드.”

-저야 늘 책더미에 묻혀 살고 있죠. 교감 선생님은요?

“저도 여전히 학생들 돌보고 있답니다.”

-호호,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홀로폰 너머로 들리는 종이 소리로 그녀가 바쁘다는 것을 눈치챈 교감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휴먼 기프트. 들어본 적 있나요?”

-휴먼 기프트요? 잠시만요.

종이 소리가 멈추고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프리실라 루드라에게 한 통의 메일이 왔다.

-기억나는 대로 보냈어요.

“고마워요, 쥬리.”

-…제 이름 오랜만에 듣네요. 지금 조금 바빠서, 나중에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래요.”

쥬리. 히어로 명 아카이브헤드. 특성, 절대기억과 자동수기.

세계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모두 기억하고 손으로 기록하는 것이 그녀의 일과다.

아카이브헤드는 동기들이 사무소를 개업할 때, 자신은 사건집으로 가득 채워진 유료 도서관을 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방문자가 없어 아카데미 지원금으로 운영을 해왔으나 최근 각성자를 동원한 해킹이 성행하면서 전자기기의 신뢰가 상당히 떨어지는 바람에 도서관이 크게 흥행하고 있다.

지구상 가장 바쁜 사람 클럽에 포함되어 있을 그녀가 자신을 위해 시간을 뺀 것은 물론이고, ‘도서관 정보는 반드시 아날로그’라는 수칙을 깨면서까지 도와준 것에 고마움을 느꼈다.

교감은 남만혁이 극찬했던 케이크를 아카이브헤드에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도착한 메일을 열었다.

“이건….”

첨부된 자료는 한 장의 사진과 한 줄의 문장이 전부였다.

먼저 사진은 반짝이는 동전을 두 손으로 감싸고 어딘가를 올려다보는 비쩍 마른 남자아이의 모습이었고, 문장은.

“기억을 잃은 솽류 시민.”

기억이라는 단어에서 흥미를 느낀 아카이브헤드가 3초의 시간을 투자해 기억, 기록한 정보.

프리실라 루드라는 해당 문구로 얼마간의 검색을 거친 결과, 기사 몇 개를 찾아낼 수 있었다.

[매일 8시간의 기억을 잃는 소수의 주민.]

[천하의 우수한 박사들, 솽류로. 이유는?]

[청두 시장 췐 리오, 솽류를 첨단 미래 도시로 만들겠다 선언. ‘노동엔 언데드? 논외. 답은 로봇.’]

“흐음.”

나흘 동안 여러 인맥을 동원해 조사하였으나 겉만 도는 느낌을 받은 프리실라 루드라가 의자를 밀고 일어나며 한숨을 쉬었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군요.”

교감은 연례행사나 강의를 제외하면 어지간해선 아카데미를 벗어나지 않는다.

서울 히어로 아카데미의 실질적 주인이 가볍게 움직이면 아카데미의 명성에 해가 된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귀찮게.”

그렇다. 그녀는 태생부터 밖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는 집순이였던 것이다.

* * *

중국. 청두 시청.

“아이고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렇게 차려입으시고.”

새하얀 정장에 회색 코트를 걸친 프리실라 루드라가 시청에 들어서자 마중 나와 있던 췐 리오가 부산을 떨며 다가가자.

“차 한 잔 내오세요.”

단칼에 잡소리를 끊어내는 교감.

“아무렴요, 자자. 이쪽으로.”

췐 리오는 그녀의 간섭파가 얼마나 강력한지 잘 아는 정치인 중 한 명이었기에 주변에 지켜보는 사람이 많음에도 허리를 굽혔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접객실에서 티 타임이 끝나고도 아무 말 하지 않는 프리실라 루드라의 모습에 안절부절못하는 췐 리오.

“휴먼 기프트.”

움찔.

“거기, 내가 좀 봐야겠어요. 괜찮지요?”

“물론입니다. 제가 안내해드릴까요?”

“그래 주시겠어요?”

“예, 지금 가시죠.”

거절해봐야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는 췐 리오는 프리실라 루드라에게 차를 대기시킬 테니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명분으로 접객실에서 나와 급히 전화를 걸었다.

“웨이 박사. 거기 문제 되는 것들 전부 치우도록.”

-여긴 그런 것들뿐입니다만.

“그럼 다 치워!”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버려진 로봇 고아원에 감사라도 떴답니까?

“농담 아니니까. 빨리 정리해.”

-하는 데까진 해보겠습니다.

덜컥.

통화를 끊기가 무섭게 문을 열고 나오는 프리실라 루드라와 눈이 마주친 췐 리오는 곧장 머리를 숙였다.

“마침 차가 준비됐다고 합시다. 가실까요?”

대답 대신 고갯짓으로 앞을 가리키는 프리실라 루드라.

췐 리오는 마치 자신을 짐승 부리듯 대하는 그녀의 모습에 울컥하였으나 20년 차 정치인답게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다.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그는 운전사가 있음에도 시간을 벌기 위해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1시간이면 될 거리를 2시간이나 걸려 빙빙 돌아 도착하자, 프리실라 루드라가 차에서 내리며 한마디 했다.

“이렇게 청두 지리를 몰라도 시장이 되는군요.”

“그게, 제가 부임한 지 얼마 안 돼서….”

“됐습니다. 입구는 여긴가요?”

“예,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이봐, 열어.”

지하로 통하는 비밀 문을 지키던 두 각성자가 췐 리오의 등장에 잽싸게 문을 열고 뒤로 물러선다.

“오래된 시설이군요.”

프리실라 루드라가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며 말하자 췐 리오는 다른 생각을 하느라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아, 네. 우리가 다시 보강, 음. 리모델링 했을 때도 반세기 전에 유행한 건축 방식이라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필사적으로 주요 시설을 프리실라 루드라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동선을 짜던 그가 순간적으로 안 해도 될 말을 해버렸고, 교감은 이를 캐치하였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질문을 이었다.

“여긴 무엇을 위한 시설이죠?”

그것도 모르고 왜 보자고 한 거냐는 말을 입 안에서 삼킨 그가 억지웃음 머금었다.

“솽류를 첨단 미래 도시로 이끌어줄 곳입니다.”

먼저 계단을 다 내려간 그가 옆을 가리켰다.

거기엔 쇳빛 마네킹 수백 개가 진공 팩에 포장된 채 행거에 걸려 있었다.

“저건?”

“언데드를 대신할 노동력입니다.”

지금 췐 리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간섭파를 날리지 않고도 알아챈 프리실라 루드라였으나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기대되네요. 언데드는 방부 처리를 해도 여름엔 냄새가 나니까요. 응?”

흐으.

흐으윽.

아주 작게 흐느낌이 들은 교감이 그쪽으로 몸을 돌리자 췐 리오가 급히 그녀의 팔을 잡는다.

“맞는 말씀입니다. 거긴! …부품 제작 시설밖에 없어서 볼만한 게 없습니다. 이쪽으로 가실까요?”

“흐음, 그러죠.”

와하하!

꺄하하!

췐 리오가 이끈 곳에는 어린아이들이 자지러지듯 웃고 있었다.

[휴먼 기프트 보육원]

투명한 문에 급하게 써 갈긴 듯한 글자. 심지어 잉크가 한 방울 흘러내려 기괴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이를 먼저 발견한 췐 리오가 얼른 다가가 잉크를 손으로 닦았으나.

“보육원 운영은 어렵지요.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감사하러 온 것도 아니잖아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리실라 루드라는 투명한 문 아랫부분에 묻은 작은 가루들을 발견하고 저 아이들의 웃음이 진짜가 아님을 간파했다.

‘웃음 가스.’

“아이들과 만나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어이! 애들 데려와.”

“옙!”

아이 중 하나를 물건 다루듯 뒷덜미를 한 손으로 잡아 끌고 오는 직원의 모습에 기겁한 췐 리오가 달려가 그의 뺨을 쳤다.

짝!

“누가 아이를 그렇게 험하게 대하랬나!”

넘어질 정도로 강하게 맞은 직원이 새삼스레 왜 이러냐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자 아예 발길질까지 하는 췐 리오.

“그만하세요. 아이들이 보고 있습니다.”

“후욱, 죄송합니다. 제가 시장 일에 바쁘다 보니 이쪽에 신경을 못 썼습니다.”

“사과는 아이에게 하셔야죠.”

“얘야, 미안하다.”

“꺄하하! 괜찮아요!”

직원이 끌고 오는 도중 뒤꿈치가 찢어져 피를 흘림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구는 아이의 모습에, 프리실라 루드라는 커다란 분노가 일었다.

아카데미의 위신이고 뭐고 당장 췐 리오에게 간섭파를 날려 모든 사실을 불게 하려는 찰나.

웃음을 멈춘 아이가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꼭 안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래비를 구해주세요.”

“이 녀석, 어서 떨어져라! 그분이 누군 줄 알고!”

췐 리오가 급하게 아이를 떨어트리자 프리실라 루드라가 그를 만류하며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제 미래의 노동력을 만드는 분들을 보고 싶네요.”

“그…렇습니까?”

“보이기 껄끄러운 장소라면 돌아가지요.”

“아닙니다! 껄끄럽다니요. 안내하겠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연구소는 사람들이 굉장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실린더는 여기지?”

“예, 웨이 박사님. 2시간 뒤에 결과가 나옵니다.”

“알았네.”

그 중, 유독 어색한 두 사람에게 다가간 프리실라 루드라가 기습적으로 물었다.

“래비는 요즘 어떤가요?”

“래비요? 여전합니다. 처음에 비해 부여 속도가 조금 떨어지긴 했습니다만, 이는 오히려 좋은 징조—”

“웨이 박사!”

고함을 질러 입을 다물게 한 췐 리오가 그의 정강이를 차고는.

“연구소의 비밀을 말하면 어떻게 하나!”

“끄악! 죄, 죄송합니다.”

“루드라님, 이해 부탁드립니다. 이게 국가 기밀인지라.”

“알겠습니다.”

“혹시 가보고 싶은 곳은 없으십니까?”

“마지막으로 래비를 보고 싶군요.”

“그 아이는 아파서 쉬는 중입니다.”

한동안 무언의 대치가 이어졌으나 이것만 끝나면 그녀를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에 급해진 췐 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말을 걸면 안 됩니다.”

“노력하지요.”

그렇게 이동한 ‘병실’이라는 장소에는 벽에서 뻗어 나온 쇠사슬로 전신이 포박된 아이가 정면만을 보게끔 머리가 고정된 상태로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가져왔습니다. 시장님.”

교감이 병실을 살피는 사이 췐 리오는 직원에게 상자 형태의 물건 하나를 넘겨받았다.

“오, 고생했네.”

“옙!”

상자를 손에 쥔 췐 리오는 굽신대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허리를 펴고 턱을 들어 평소의 자세로 돌아왔다.

“췐 리오, 저건 치료가 아니군요.”

“치료 맞습니다. 그렇게 알고 조용히 가시면 됩니다.”

돌연 바뀐 태도에 의아한 교감이 그를 살피다 손에 들린 상자에 시선이 닿았다.

“…VZ.”

――――――――――

❖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