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교감의 실종 (3)
뚜르르.
“예, 마오 주석님. 별일 아니었습니다. 하하, 저 췐 리오입니다. 뒷방 늙은이의 뻔한 허세에 당할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예, 그럼.”
중국 주석과의 통화를 끊은 췐 리오는 저 멀리 프리실라 루드라가 탄 차량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천하의 프리실라도 한물갔구먼. 흐, 요게 아주 보물이야.”
VZ를 들이미는 것만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히어로를 무력화시켰다는 점에서 췐 리오는 더없이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췐 시장님!”
지금 시간이면 연구소 가장 깊은 곳에서 실험을 하고 있어야 할 인물이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모습에 췐 리오는 불길함을 느꼈다.
“무슨 일인가.”
“큰일 났습니다! 가짜 신이 작동을 안 합니다!”
“현재까지 확보한 물량은?”
“강화계 1604기, 변신계 310기, 구현계 24기입니다.”
“주석께서 요구한 수량의 절반에도 못 미치지 않나. 당장 깨워서 작업 진행 시키게.”
“그게, 저희도 여러 수단을 동원해봤습니다만, 반응이 없습니다.”
“쯧, 자네들은 유능하고 다 좋은데 심약해서 문제야. 따라오게.”
웨이 박사를 뒤에 달고 생산시설 중추로 들어가 연구원들 사이에서 ‘가짜 신’이라 불리는 존재 앞에 섰다.
“래비, 일어나야지.”
짝!
사슬에 묶여 늘어져 있는 어린아이의 뺨을 풀스윙으로 후려치는 췐 리오.
그 살벌한 소리에 주변의 연구원들이 목을 움츠린다.
“여긴, 너 편하게 자라고 만든 방이 아니란다.”
퍽!
구두 굽으로 걷어차거나 악취가 나는 물을 뿌리는 등의 갖은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였으나 래비는 깨어나지 않았다.
“안 되겠네, 래비. 이건 네가 자초한 거다. 웨이 박사.”
“예, 시장님.”
“그거 틀어.”
“알겠습니다.”
웨이가 지시하자 가짜 신의 방에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우리 래비는 꿈이 뭐야? 엥, 나 같은 히어로? 와하하. 아야! 아니, 대단해서 웃었지.
-코는 어릴 때 이렇게 잡아당겨 줘야 아빠처럼 멋있는 사람이 되는 거야. 자, 이렇게. 아프다고? 너도 커서 엄마같이 예쁜 사람이랑 결혼하려면 이 정도 고통은 감내해야지!
-…잘 들어. 래비. 지금부터 진지한 술래잡기를 할 거야. 저 검은 옷 입은 사람들 보이지? 저 사람들이 술래야. 자, 시작!
축 늘어진 래비의 얼굴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흐른다.
“이거 봐, 깨어 있었잖아. 웨이 박사, 진행해.”
“예!”
기술자와 연구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확인한 췐 리오는 눈에 빛이 사라진 래비의 턱을 잡아 들었다.
“너도 네 부모처럼 되기 싫으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해. 이것보다 쉬운 일이 어딨다고 엄살을 부려.”
멍투성이인 래비의 얼굴이 보기 싫었던 췐 리오가 홱 밀치고 흐트러진 옷을 정돈하는 동안 웨이 박사가 다가와 종이 한 장을 건넨다.
“가짜 신의 주입 주기가 점점 줄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코인 안에 있는 특성들이 대부분 소모된 게 아닌지.”
“웨이 박사.”
“예, 시장님.”
“방금 봤잖나. 인간이라는 건 쥐어짜면 뭐든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
“그래서 드리는 제안입니다만, 우리 중국에 순직한 각성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지? …자네, 설마?”
“기뻐해 주십시오. 가짜 신은 사물뿐만 아니라 시체에서도 특성 추출이 가능했습니다!”
둘은 동시에 비열한 웃음을 머금은 채 대화를 이었다.
“당장 알아보겠네. 박사가 큰일을 해내는구먼. 내 반드시 주석께 말씀드리지.”
“감사합니다!”
* * *
프리실라 루드라는 현역 시절, 세 가지 수칙을 세웠었다.
하나, 전력을 다할 때와 아닐 때를 구분할 것.
둘, 적이 조직일 경우 반드시 내부자를 만들 것.
셋, 최대한 나를 숨길 것.
띠링.
“흐음.”
프리실라 루드라는 공항으로 이동하는 중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에 홀로폰을 열었다.
[래비 깨어남.]
교감에게 상황을 보고하는 이의 정체는 연구소에서 웨이 박사에게 실린더를 넘겨받은 여 연구원이었다.
본래 첫 번째 수칙을 준수하기 위해 이번과 같은 사전 조사에선 가능하면 특성을 사용하지 않는 프리실라 루드라였으나 VZ를 본 이상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위해 내부자를 심었다.
“이렇게 또 제자 덕을 보는군요.”
회색 코트의 옷깃을 매만지며 웃는 교감.
남만혁이 재작년 생일 선물로 준 회색 코트는 VZ가 발산하는 파장을 무력화시키는 UVZ가 장착되어 있다.
여 연구원이 넘겨준 정보를 통해 휴먼 기프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낸 교감은 잠깐 고민하더니 어디론가 문자를 한 통 넣은 뒤, 창문을 열고 홀로폰을 던졌다.
운전사는 이를 목격했으나 묻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췐 리오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고마워요.”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교감이 내리자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기자들이 드론 카메라를 앞세워 그녀를 찍어댔다.
“솽류에는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앞으로 일정이 어떻게 되십니까?”
“지금 귀국하시는 겁니까?”
질문 세례에 익숙한 교감은 의례적인 말로만 답한 뒤, VIP 전용 입국 심사 통로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이것이 프리실라 루드라가 목격된 마지막 행적이었다.
* * *
아카데미에 복귀하지 않고 공항에서 모습은 감춘 프리실라 루드라는 자신만 아는 안전 가옥에서 안락한 생활을 영위 중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엠바고를 건 덕에 아직 실종 기사는 나지 않았으나 암암리에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이 소문을 충분히 묵히는 데 걸리는 기간을 열흘이라 예상했고,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지금쯤 갔겠군요.”
교감은 솽류에 도착하기 전에 버렸던 홀로폰에 예약 문자를 걸었었다. 내용은 자신이 실종됐다는 기사를 내달라는 짧은 문장.
과거 프리실라 루드라에게 은혜를 입었던 기자는 군말 없이 기사를 썼다.
한 명이 서히아에서 건 엠바고를 무시하고 기사를 올리자 벼르고 있던 다른 기자들도 준비해둔 기사를 쏟아냈다.
상위권에 모조리 자신과 관련된 기사로 도배된 것을 확인한 교감은 홀로보드를 끄고 잠시 벗어둔 오븐 장갑을 꼈다.
“제자들에게 보낼 케이크가 잘 만들어졌으면 좋겠네요.”
* * *
사람들의 입에서 프리실라 루드라의 이름이 한 번쯤 거론될 때쯤.
히어로 협회가 뒤집혔다.
“이번 임무 못 합니다.”
“왜?”
“스승님이 실종되셨다는데, 도둑 몇 놈이 문젭니까!”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쾅!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일련의 히어로 무리.
그들 전원이 서울 히어로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것을 알아챈 부협회장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손을 저었다.
“니들 마음대로 해!”
세계 각지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당장 생명에 지장이 생기는 사건이 아니라면, 모두 스승인 프리실라 루드라를 위해 발 벗고 나선 것.
그중에는 남아프리카에서 곤충 괴물을 사냥 중이던 그레이스 멜론도 있었다.
“로맨.”
“아니라니까.”
“2주나 실종되셨다잖아.”
“아니, 이 양반이 실종되고 그럴 인간이 아니라니까?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움직이는 데다 늘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괴물이라고. 이거 다 작전이야. 우리까지 나설 필요 없어.”
“루드라 할머니가 대단한 건 알아.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그레이스 멜론의 얼굴이 뾰로통하게 변하자 속으로 한숨을 쉬는 남만혁이었다.
“…알았어, 계획은?”
“그건 네가 생각해야지.”
“어?”
“뭐.”
남만혁은 늘 정직하고 올곧은 퀸이 조금이라도 뻔뻔한 면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으로 학생 시절 은근히 정신교육을 했고.
결과, 남만혁에게만 뻔뻔하게 구는 그레이스 멜론이 탄생했다.
“…그래.”
자업자득이라는 말을 속으로 삼킨 남만혁은 리쳇을 불렀다.
“들었지? 교감님 좀 찾아봐. 그래, 다른 나라 위성 해킹해도 돼. 뭐라고 하면 터트려.”
“잠깐, 터트린다니?”
“농담이야 농담.”
“흐응?”
상체를 숙여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그레이스 멜론의 시선을 피한 남만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리쳇, 터트리진 마. 이제 됐지?”
“좋아, 루드라 할머니는 어디에 있대?”
“잠깐만. …아카이브헤드? 그게 누구. 아, 유료 도서관? 오케이. 연결해줘.”
뚜르르.
-네.
“안녕하세요, 선배님. 로맨으로 활동하고 있는.”
뚝.
끊어졌다.
“다시 걸어.”
뚜르르.
-대체 여기 번호는 어떻게 안 거니!
“프리실라 루드라는 살아 있다.”
-…너, 누구야.
멀어졌던 목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교감님이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당신이던데, 아는 거 있으면 말해.”
-이미 히어로 협회에 다 넘겼어. 그쪽에 알아봐. 그리고 내 정보는 다 돈인 거 몰라?
“교감님을 구하려는 히어로에게 돈을 받겠다? 오, 당사자가 알면 참 좋아하겠어. 아카이브헤드. 네 이름과 지금 발언, 꼭 전해주지.”
남만혁이 먼저 끊으려는 척 연기하자.
-잠깐! 으, 연락 온 쪽으로 메일 보냈어. 바쁘니까 전화하지 마!
“고맙습니다, 선배님.”
뚝.
남만혁의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던 그레이스 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다음 서히아 교감 자리는 네 것이라는 말이 돌던데. 나는 찬성이야.”
실제로 남만혁의 플랜에 아카데미에 계속 상주하며 수십 년간 히어로를 키운다는 항목도 있었으나, 아카데미 생활 1년 만에 플랜에서 지웠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그 귀찮은 걸 또 하라고? 못해, 안 해!”
다사다난했던 아카데미 생활을 떠올린 남만혁은 고개를 내저으며 아카이브헤드가 넘긴 자료를 살폈다.
꼬마 아이의 사진, 최근 교감과 통화한 홀로폰의 번호, 기억과 관련된 몇몇 기사들.
“리쳇, 이 홀로폰 위치 추적은?”
-찾았어. 근데, 저 홀로폰 남은 배터리가 3%도 안 돼. 게다가 방전되면 칩을 태우는 특수 모델이네.
“안의 정보는 다 빼냈지?”
-어.
“그럼 신경 쓰지 마. 괴물 할멈이 의도한 거겠지.”
자신의 실종을 탐색할 단체에 정보를 넘긴 후 고장 나게 함으로써 적에게 넘어갈 정보를 최소화하는 계책.
적이 먼저 찾을 우려도 있으나, 아카이브헤드를 통해야만 이 루트에 접근할 수 있으니 쉽지 않다.
간섭계가 들끓는 히어로 협회 내부에 첩자를 심을 멍청한 세력 따윈 없을 테니, 교감의 이 수는 상당히 유효한 전술이다.
여기서 이미 실종은 그녀의 계획의 일환이라는 게 드러났으나 남만혁은 조사를 멈추지 않았다.
“빚은 빨리빨리 없애버려야지. 에잉,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내가 하는 건데.”
“로맨. 그 말은 나랑 같이 있기 싫었다는 거야?”
“윽, 그게 아니라.”
그레이스 멜론에게 쩔쩔매는 남만혁이 안타까웠던 리쳇은 두 사람 사이로 드론을 끼워 넣고 바닥에 빛을 뿌렸다.
“지도?”
-방금 고스트 핸드 교수의 제보로 프리실라 루드라가 실종 직전에 방문한 위치로 추정되는 장소가 밝혀졌어.
“그건 알지. 애초에 위치를 알려준 게 난데. 아.”
그레이스 멜론의 도끼눈이 남만혁을 향한다.
“그러면 이게 전부, …만혁? 어디가. 나랑 이야기 좀 해.”
“이야기하자는 사람이 왜 주먹을 챙겨! 너는 여기 남아서 곤충들 처리해, 솽류에는 내가 갈게!”
“만혀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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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