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래비&줄리엣
“래비, 친구가 네게 뭔가를 했을 땐,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단다.”
“그러면요?”
“리액션. 말이든 행동이든 표현을 해야지.”
“시간 아까운데.”
“그게 무슨 뜻이니?”
“제 인생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에게 필요 이상의 감정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래비. 사람을 외형만으로 판단하는 건 위험한 발상이란다.”
“외형이 아니라, 보세요. 선생님도 가치가 없잖아요.”
래비는 추출과 부여라는 특성을 보유한 채 태어났다.
흔히 갓 차일드라 불리는 이 극소수의 각성자는 일반적으로 10살이 되기 전에 성인 수준의 사고력을 가진다.
갓 차일드 중에도 특출난 아이의 경우, 본인이 어린 척을 해야 주변에서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는 점까지 감안해서 평소의 언행을 조절하기에 이른다.
래비가 바로 그런 경우다.
“…지금 내게 뭔가를 했니?”
심각한 얼굴이 된 아동심리 치료 상담사는 아이 앞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될 당황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괜찮아요. 다시 부여했으니까요. 오히려 숙련도가 조금 높아졌을걸요? 트레이닝 스톤 3달 분량 정도?”
기겁한 상담사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래비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버지의 질책하는 듯한 눈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잖아요. 저는 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이 중요한걸요.”
“래비.”
“으, 알았어요.”
래비는 초등학교에서 시행되는 정신감정에서 사이코패스 진단이 내려졌었다.
그러나 집에선 그런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한 부모가 심층 검사를 의뢰한 결과, 래비는 불필요한 사고를 일으키는 뇌 일부를 필요할 때마다 추출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감정이 옅어졌던 것이고.
“으음.”
당장은 몰라도 이러한 행동이 반복되면, 아무리 부여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뇌 조직에 손상이 올 수밖에 없다는 의사의 소견에 부모는 래비에게 다신 그러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래비, 아빠랑 약속 하나 할까? 정말 중요한 순간이 아니면 추출은 쓰지 않기로.”
“그건 히어로로서 하는 말인가요 아니면 부모로서?”
“당연히 부모로서지!”
진지하던 표정을 날려버리고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끌어안는 아버지의 모습에 래비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역시 나를 사람으로 봐주는 인간은 가족밖에 없어.’
* * *
얼마 후.
중국의 각성자로 이루어진 특작 부대가 갓 차일드를 확보하기 위해 투입되었고 래비의 부모는 그들을 상대하다 사망하고 만다.
“진지한 술래잡기, 하는 거야. 래비. 절대 나오면 안 돼. 알았지?”
우상이자 롤모델이었던 아버지가 허무하기 죽는 모습을 목격한 래비는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슬로 몸이 묶인 채 손에 작은 코인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대답해!”
빠악!
래비는 중국인 남자가 휘두른 방망이에 얼굴을 맞았다.
‘안와 골절. 대수롭지 않다.’
뇌의 편도체 일부를 추출해 고통을 느끼는 감각 기관을 마비시킨 소년은 한순간에 분노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으나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 세상에 흥미는 없으므로.
“추출, 부여. 알겠나? 쉽잖아. 이 동전 안의 특성을 로봇에 넣으라고!”
특성을 추출한다는 개념을 9살 때 완벽하게 익힌 래비는 중국인 남자, 췐 리오의 요구를 쉽게 해냈다.
‘상대하는 시간 아까워.’
래비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감상하는 시간을 방해받는 게 싫었기에 남자의 요구를 들어줬다.
“되, 된다. 됐습니다! 췐 시장님!”
“오오!”
췐 리오와 웨이 박사는 환호했다. 이로써 로봇으로 이루어진 각성자 군단을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그것이 헛된 희망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야 이 새끼야! 왜 특성을 한 번 쓰면 사라지는 말해!”
늘 아래를 보거나 눈을 감고 있던 래비가 처음으로 췐 리오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죽어서.”
“뭐라?”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날 도와줬을 텐데.”
사실 그의 아버지와 특성의 효과는 관계가 없었다. 래비는 단지 이들이 자신을 통해 무언가 이득을 보는 것이 고까워 절망을 느끼게 하고 싶었을 뿐.
“건방진 새끼가!”
분노한 췐 리오는 래비의 목을 졸랐고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웨이 박사가 가짜 신을 손상시켜선 안된다며 몸을 던져 막았다.
‘나잇값 못하는 멍청한 놈들.’
래비는 욕망을 좇는 그들의 한심한 작태에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안녕?”
휴먼 기프트 시설의 근무자들이 모두 퇴근하고 당직자들도 조는 새벽. 파란 머리칼의 아이가 쇠사슬 방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예상 못 한 방문에 눈꺼풀을 반쯤 들어 올린 래비는 상대가 자기보다 어린 꼬마인 것을 확인하곤 다시 눈을 감았다.
-졸지 마!
“…?”
-이름이 뭐야?
“이 목소리, 네가?”
“응. 난 줄리엣. 간섭계구 사념을 쏠 수 있어. 빵야!”
-이렇게!
그제야 토끼 인형을 끌어안은 소녀의 전신을 눈에 담은 래비.
“저리 가.”
소녀는 주변을 살피며 몰래 래비에게 다가가 유일하게 드러난 맨 살인 그의 얼굴에 작은 손을 올렸다.
“이제 언제든지 말할 수 있어.”
그러고는 냅다 방을 나가는 줄리엣의 모습에 래비는 의아해하다 이내 신경을 껐다.
-짠~
“…사념?”
-미안, 네 말은 못 들어. 내 사념파는 양방향? 그런 게 아니래.
“말 걸지 마.”
-신기한 거 알려줄까? 우리 래비 이름도 래비다?
품에 안고 있던 그 토끼 인형을 말하는 거라고 짐작하던 래비는 미간을 좁혔다.
‘또 의미 없는 것에 시간을 뺏기고 있다.’
이 사념파를 수신하는 뇌 부분을 추출하려 했으나, 해당 부위는 부모님의 기억이 저장된 곳이었기에 래비는 혀를 찼다.
* * *
-오늘은 콩 토스트가 나왔어. 웨엑, 맛 이상해. 너는 뭐 먹어? 또 딸기향 영양제? 좋겠다. 나도 부탁하면 주려나? 또 ‘너는 3급이라서 안 돼.’라고 하겠지?
‘큭, 저 악마 같은 특성!’
일방적인 정보의 전달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분통 터지는지 줄리엣을 통해 깨달은 래비는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했다.
퍽!
“왜 속도가 떨어지냐고 묻잖아!”
췐 리오는 특성 로봇의 생산 속도가 크게 하락했다는 보고를 듣고 래비를 닦달하는 중이다.
-와! 후식은 바나나야. 히히, 나는 두 개 먹어야지!
코앞의 남자와 매사가 꽃밭인 아이의 얼굴이 겹친다.
“큭.”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하, 이 췐 리오가 만만하게 보였나 보구먼? 어이, 인두 가져와.”
“신기해.”
“뭐라?”
“정상적인 뇌가 달려 있으면 분명 학습이라는 걸 할 텐데. 내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걸 왜 아직도 모르지?”
췐 리오는 래비의 말이 맞는 것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래비의 몸 곳곳을 인두로 지졌다.
치이이익!
고문으로 쾌락을 얻는 혐오스러운 인간을 내려다보던 래비는 다시 눈을 감았다.
-오늘은 뱀 같은 응가네. 윽, 냄새! 앗, 아냐. 나 냄새 안 나!
‘제발, 그만.’
온갖 고문과 세뇌와 설득에도 동요하지 않았으나 줄리엣의 저 알고 싶지 않은 사생활 노출엔 전면 항복을 외치는 래비였다.
* * *
-래비! 멋있는 할머니에게 너 구해달라고 했어. 대단한 사람 같아. 똥스펀지가 존댓말 하는 거 있지!
똥스펀지는 췐 리오 시장이다. 래비는 줄리엣이 그를 왜 그렇게 부르는지 궁금했으나 첫날 이후 이 방에 들어온 적이 없었기에 묻지 못했다.
“치료 중입니다. 그렇게 알고 가시면 됩니다.”
딱히 구원을 바라진 않았으나, 이 사슬을 끊고 나가 줄리엣의 귀에 ‘네 똥 이야기는 정말 듣고 싶지 않아!’라고 쏘아붙여 주고 싶었던 래비였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프리실라 루드라에게 추출을 사용했는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아닌가?’
래비가 만난 사람들의 정신 방벽은 일반인의 경우 과속방지턱, 간섭계 각성자는 꽤 단단하게 엮인 목책과 같았다.
그런데 지금 마주한 이 방벽은, 자신의 특성으로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아득한 높이의 벽과도 같았다.
되려 역으로 침식해 들어오는 간섭파에 얼른 특성을 거두려 했으나 생물처럼 움직이는 벽이 연결된 통로를 억지로 붙잡는다.
‘먹히면 끝이다.’
저것에 먹히는 것도 어쩌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그때.
-히히, 히. …으응? 나 왜 발에 피 나? 흐으응, 흑. 래비, 아파. 호 해줘.
웃음 가스의 효과가 끊어진 줄리엣의 울먹이는 사념이 흘러들어왔고 한숨과 함께 최후의 발악을 시도했다.
‘똥 이야기는 정말 듣기 싫지만.’
줄리엣의 사념 덕에 아버지가 당부한 대로 감정과 자아를 지금까지 온존할 수 있었다.
줄리엣은 래비에게 있어 귀찮은 은인이자 아주 조금. 관심이 가는 인간이었다.
‘우는 소리는 더 싫어.’
자신이 사라져 시무룩해 할 그녀를 떠올리자 없던 오기도 생겨나는 래비였다.
필사의 항전을 각오하는 사이, 통로를 유지하던 괴물은 대뜸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저쪽은, 쉐론 박사? 다행이네.’
괴물이 다른 사람에게로 간 것을 인지하고 나서야 긴장을 푼 래비는 엄청난 심력 소비로 인해 깊이 잠들었고, 잠시 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 정신을 차렸다.
“이거 봐, 깨어 있었잖아. 웨이 박사, 진행해.”
“예!”
‘아직도 이런 게 통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부모에게 메여 있는 척을 한다면, 앞으로 줄리엣이 걱정할만한 폭력이 줄어들 거로 생각한 래비가 억지로 눈물 한 방울을 쥐어짰다.
췐 리오는 좋아했고 래비는 아무 말 없이 코인에서 특성을 추출해 로봇에 부여했다.
-래비, 나 오줌 마려워. 대신 화장실 가줘!
줄리엣의 어이없는 사념을 라디오 삼아서.
* * *
열흘 후, 중국 솽류 공항.
“여기에 로맨 있나?”
공중에 떠서 팔짱을 낀 자세로 모인 이들을 둘러보며 외치는 히어로, 메가파이어.
“여깄슴다.”
그레이스 멜론에게 얻어맞고 남루한 행색이 된 남만혁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오자 메가파이어는 로맨을 사칭하는 이가 아닐까 의심하였으나 그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검은 뿔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남만혁은 로맨으로 활동할 땐 뿔에 검은 천을 두르거나 모자로 숨긴다.
“네가 은사님의 위치를 안다는 게 사실이냐.”
남만혁은 교감이 의도대로 다수의 히어로를 해당 연구소에 투사하기 위해 각성자 커뮤니티에 ‘프리실라 루드라 님 위치 찾았음. 같이 구하러 갈 거면 즉시 솽류 공항으로.’라는 글을 게시했다.
다른 이면 모를까, 로맨은 운석 엔딩을 맞이할 뻔한 지구를 구한 히어로 중 한 명이었기에 글이 가지는 파급력은 상당했고, 불과 몇 시간 만에 수백에 달하는 프로 히어로가 공항에 모였다.
“네, 가시죠.”
그렇게 짧은 글과 말 몇 마디로 선배 히어로들을 선동한 남만혁은 휴먼 기프트 연구소로 향했다.
“저들은?”
입구로 추정되는 장소엔 프리실라 루드라의 홀로폰을 조사해 얻은 정보대로 각성자 두 사람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문지기겠죠. 잠시만요, 선배님이 굳이 나설 것도 없습니다.”
“음?”
문지기는 수백 명이 차례차례 히어로 랜딩으로 자신들 앞에 나타나자 점차 공포에 질려가다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항복을 외쳤다.
“저희는 그냥 고용된 겁니다. 안에서 뭐 하는지도 몰라요!”
남만혁은 중국의 녹을 먹는 저들도 꼴에 전 히어로라 상황 판단이 빠르다고 생각하며 턱을 까닥였다.
“문 열어.”
“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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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