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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169화 (169/201)

<169화>

안녕히 계세요

모두의 시선이 남만혁에게 꽂힌다.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은 모두 비밀로 해주셔야 합니다.”

의료 현장 실습 때나 러시아 시골 물자 배송 이후 인간에 대한 신뢰가 조금은 생긴 남만혁이었기에 내린 결단이었다.

“다 네 선배다. 믿어라.”

남만혁은 메가파이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히어로들을 보며 리쳇을 불렀다.

“여기로 메딕기어 하나 보내. 벽? 뚫어.”

“…외부에서 대량의 에너지가 고속 접근 중. 6초 후 도달.”

탐지계 히어로의 보고에도 몇몇 히어로만이 경계 태세를 취할 뿐, 대부분은 반응하지 않았다.

쯔우웅.

직후. 사선으로 날아온 하이퍼이온캐논이 휴먼 기프트 연구소를 관통, 그 빛의 꽁무니를 따라 메딕기어 한 기가 지하로 진입한다.

육중한 소리와 함께 착륙한 메딕기어는 바닥을 긁으며 속력을 줄여 정확하게 남만혁 앞에서 멈췄다.

“긴급 의료지원팀의 차하성입니다. 상황은 전달받았습니다. 야전 수술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차하성은 큐링 힐의 팀에 소속된 의사 중 한 명이다.

그는 메딕기어가 프로토타입일 때부터 연구에 동참했었기에 메딕기어 운용 능력만 보면, 큐링 힐 이상의 실력은 갖춘 인물이다.

“살려, 무조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다수의 로봇팔을 뽑아내 간이 수술실을 설치하고 격리벽까지 치는 메딕기어의 모습에 히어로들이 매우 놀란다.

메가파이어가 궁금해하는 히어로들을 대신해 몇 가지 질문을 하였으나 남만혁은 두루뭉술하게 넘기거나 침묵으로 응했다.

“후배가 밝히기 싫은 모양이야. 그래도 하나는 확실히 해 주게. 이 로봇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나?”

그가 우려하는 것을 짐작한 남만혁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아뇨. 한 기 운영하기도 벅찹니다. 1mm 움직이는데 비행기가 뜰 에너지를 잡아먹는 효율 최악의 고철인지라.”

“음!”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차하성은 리쳇의 서포트를 받아 줄리엣의 치료를 거의 끝내가고 있었다.

“앗!”

수술 도중 갑자기 눈을 뜨는 줄리엣. 소녀는 자신을 둘러싸고 둥글게 모인 사람들과 눈이 아프도록 밝은 조명에서 과거의 수술을 떠올렸다.

“괜찮니?”

치유계 히어로가 놀란 듯한 줄리엣의 손을 잡으며 묻자.

“저 안 아파요!”

“응?”

“울지도 않고 아프다고 안 할 테니까, 오른손은 남겨주세요!”

물방울을 눈꼬리에 매달고 억지웃음을 짓는 아이의 모습과 지금 나오는 말들로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짐작한 히어로들이 이를 악물었다.

줄리엣은 사람들의 굳은 표정을 화를 내는 것이라 여기고 화상으로 얼룩진 입가를 더욱 끌어 올렸다.

“제발요. 래비는 로봇을 싫어한단 말이에요.”

그때 히어로의 도움으로 사슬에서 빠져나온 래비가 비틀대며 줄리엣에게 다가간다.

이를 발견한 히어로들이 하나둘씩 길을 터주자 종래에 수술대를 비추는 조명 아래에 두 아이만이 남았다.

“래비? 래비야? 싫어…. 보지 마!”

“네가 싫었다.”

“윽?”

“아버지를 기리는 나의 사고에 너는 방해물이었다.”

“우….”

“끝없이 조잘대는 네 목소리에 잠을 깨는 건 고통이었다.”

“나는 래비가 심심할까 봐….”

“기어코 아버지의 얼굴 옆에 네 얼굴이 자리했을 때엔, 너를 증오했다.”

“흐응, 흐으응.”

래비의 바짝 마른 손이 울음을 터트리려는 줄리엣의 얼굴에 닿는다.

“네가 로봇이건 아니건. 짜증 나는 건 똑같다. 그러니, 치료를 받아라.”

“하지만….”

줄리엣의 일방향 소통 특성은 맨살의 오른손이 상대방에게 닿았을 때만 발동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너의 시끄러움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

“…아! 래비는 내가 래비에게만 말을 걸었으면 좋겠어?”

“나 같은 피해자를 늘리고 싶지 않을 뿐이다.”

자신의 눈을 피하는 래비의 모습에서 그의 심정을 읽은 간섭계 소녀는 어느새 진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히히, 뭐야. 히힛.”

두 아이의 대화가 끝나자 처음부터 말하려 하였으나 타이밍을 잡지 못해 가만히 있었던 차하성이 입을 열었다.

“팔은 기계로 교체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들 걱정하지 마세요.”

놀란 두 아이와 웅성거리는 히어로들.

“그걸 진작 말했어야지!”

“맞아! 괜히 가슴 졸였잖아.”

“우우~”

차하성은 그들의 장난스러운 야유가 안도에서 나오는 것임을 잘 알기에 의식하지 않고 로봇팔 조종에 집중했다.

“지금부터는 아플 수 있으니까 마취를 할 겁니다. 곧 잠이 올 텐데, 푹 자고 일어나면 다 나아 있을 겁니다.”

“네, 연구원니이임….”

줄리엣이 잠들자 래비가 털썩 주저앉는다. 이를 옆에 서 있던 남만혁이 부축하며 소년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쩔 셈이냐.”

“무슨 뜻이지?”

“재각성했잖아. 너.”

눈 주변에서 사납게 날뛰던 기운이 고스란히 소년의 체내에 갈무리되는 것을 목격한 남만혁은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았다.

“특성은 불행을 낳는 힘이다. 연구소의 인간들이 한 주장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방금까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특성을 추출할 생각이었다. 타인이 가진 힘에 욕심을 내지 않는 세상이 오면 나와 아버지 같은 불행한 인간도 줄어들 테니까.”

“지금은 달라졌다는 소리로 들리네?”

“…그래. 그런 힘들이 모여 줄리엣을 살렸으니까.”

“네게 줄리엣은 어떤 존재냐.”

입을 다물고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다 천천히 고개를 젓는 래비.

“모르겠군. 사슬에 묶여 있는 동안 이 녀석의 얼굴이 많이 떠오르긴 했다.”

“또?”

“또라니?”

“아니, 왜. 손을 잡아보고 싶었다던가 항상 옆에 있어 줬으면 한다던가. 많잖아.”

짙은 눈썹을 찡그린 래비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남만혁을 쳐다보곤.

“교미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그래. 그런데 앞으로 어쩌려고. 뭐, 하고 싶은 건 없어?”

남만혁의 물음에 래비가 마른 웃음을 짓는다.

“이 특성은 너무 위험하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를 확보하기 위해 지금과 같은 일이 계속 일어나겠지.”

“한동안 숨어 살면 돼. 실제로 그러는 각성자들도 꽤 있고.”

“흥, 내가 숨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하나.”

래비에게 대한 정보는 아직 풀리지 않았으나 곧 많은 이들에게 공개될 것이다.

이번 사건을 빌미로 중국을 벼르고 있던 히어로 협회가 집요하게 파고들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이 휴먼 기프트라는 연구소는 반드시 전면에 드러난다.

그러면 래비의 얼굴과 특성이 히어로와 관련된 모든 잡지 1면에 실릴 터였다.

“추출, 부여. 내 특성이다. 나는 여기서 이 동전에 들어 있는 힘을 로봇에게 부여하는 일을 해왔다.”

“재각성한 특성은 뭐지?”

“특성 소멸. 이 능력은 인간에게 부여된 특성을 지울 수 있다. 영원히.”

요구조자 수색을 위해 자리를 비운 히어로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남만혁과 래비의 대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특성 소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염려 놔라. 줄리엣을 구해준 너희들의 특성은 건드려지지도 않으니.”

“그 말은, 네 의사와 무관하게 지울 수 있는 특성이 정해진다는 건가?”

“내 원수에게만 발현되는 특성이다.”

“아쉽네.”

“무엇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남만혁을 쳐다보는 래비.

“변이계나 간섭계 중에 자기 특성 때문에 삶이 괴로운 사람이 꽤 있거든. 그런 사람들의 특성을 지우 거나 추출하면 괜찮겠다 싶어서.”

“그런 건 안 된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중국 주석은 네 원수라고 할 수 있는데 안 되냐? 자, 이 사람.”

남만혁이 홀로폰에 간섭계 각성자인 중국 주석의 사진을 띄웠고 그걸 본 래비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내가 마음의 결정을 내렸기 때문인 거 같군.”

“무슨 결정?”

“재각성을 한 순간부터 소멸시킬 수 있는 특성들이 존재했다.”

“…잠깐. 그만두는 게 어때?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 네 신변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도 가능할—”

그게 무엇인지 짐작한 남만혁이 드물게 당황을 드러내며 만류하였으나.

“그래서는 줄리엣과 지낼 수 없겠지. 나는 이미 결정했다.”

소멸.

눈을 감고 낮게 웅얼거리듯 말한 래비는 잠시 후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하,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군. 그간 뇌를 너무 추출했던 모양이야.”

딸그랑.

소년의 손에서 떨어진 동전이 빛을 잃은 채 바닥을 구른다.

그걸 짜증을 담아 멀리 차버린 남만혁이 머리를 벅벅 긁더니.

“쓰읍. 하, 그래. 처음부터 없었다고 생각하지 뭐. 잘했다, 건방진 꼬마야.”

큰 변수 하나가 줄어든 것으로 여기기로 한 남만혁은 래비의 머리를 헝클였다.

“부탁 하나 해도 되나.”

“들어보고.”

“나와 줄리엣을 보호해다오. 이왕이면 도심에서 떨어진 장소에서 지냈으면 한다.”

“딱 어울리는 곳이 있긴 한데. 네가 버틸 수 있을 진 모르겠다.”

“안전만 확보된다면 어지간한 조건은 수용할 의향이 있다.”

어른 흉내를 내는 소년을 내려다보던 남만혁은 재차 아이의 머리칼을 헤집고는.

“오냐. 보내주마. 차하성, 수술 끝나면 애들이랑 같이 복귀해.”

“알겠습니다.”

쿵!

“수상한 방을 찾았습니다!”

휴먼 기프트 연구소 내부를 탐색하던 히어로 중 한 명이 비밀공간을 발견했다.

“이 컴퓨터로 업로드한 거 같아.”

엉망으로 엉킨 굵은 전선과 그 사이에서 모니터의 빛에 흘러나오는 협소한 공간.

[전송 완료]

남만혁은 모니터에 떠 있는 메시지를 흘낏 보곤 주변의 전선들을 치우고 바닥에 박혀 있는 본체를 거칠게 뽑아내 카츄에 집어넣었다.

“여긴 됐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죠.”

그런 식으로 남만혁이 연구소 내에 존재하는 모든 하드를 챙겼을 무렵.

흩어졌던 히어로들이 가짜 신의 방에 모였다.

“찾았나?”

“아뇨, 제 탐색 범위에는 아이들만 있었어요.”

“나간 흔적까지는 찾았습니다만…, 아무래도 다른 곳에 갇혀 계신 게 아닌지.”

“음, 여긴 연구시설에 가까우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 일단 오늘은 늦었으니 다들 복귀하고 내일 저녁에 다시 보기로 하지.”

그들이 교감의 탐색을 이어가려는 모습에 남만혁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섰다.

“말한다는 걸 깜빡했네.”

“음?”

뚜르르.

어딘가로 전화를 하는 남만혁의 모습에 히어로들이 의아해하기도 잠시.

-다들 오랜만이네요.

잠옷 차림에 방울 모자까지 쓴 백발의 여성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난다.

“루드라 선생님?”

-메가파이어. 졸업 이후 당신의 비약적인 성장에는 늘 놀라고 있어요. 스승의 날에 메시지 하나 보내지 않을 정도로 대범해진 면도 아주 칭찬하고 싶었답니다.

“그…게. 아내랑 시간을 보내느라. 죄송합니다.”

-후후, 농담이에요. 그나저나 제게 연락을 했다는 건, 휴먼 기프트가 정리됐다는 뜻이겠지요?

“…전부 의도하신 거군요.”

-저도 여러분의 스승이기 전에 한 명의 여자인지라, 무서운 협박을 받으면 히어로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을 때가 있답니다.

당신도 히어로였잖아!

…라고 소리치는 듯한 제자들의 모습에 프리실라 루드라는 입을 가리고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손가락으로 남만혁을 가리켰다.

-로맨이 저를 그곳으로 보냈었습니다. 본인은 바쁘다면서 말이죠.

히어로들의 불타는 시선이 남만혁에게 꽂힌다.

“교감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나쁜 놈이 되지 않습니까.”

-아, 인사를 잊을뻔했군요. 저와 아이들을 구하러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히어로 여러분.

뚝.

그것으로 통화는 끊어졌고 가짜 신의 방에는 적막이 흘렀다.

메가파이어가 입을 열기 직전, 남만혁은 잽싸게 메딕기어에 올라타더니.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부우우웅!

튀었다.

“야!”

“거기 서!”

“잡아!”

――――――――――

❖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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