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습격당한 하나 보육원
“잘 왔다! 내 집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 잔소리하는 사람이 두 명이라 좀 괴롭긴 하겠지만.”
양 의원과 양소민이 이 집에 산 지도 벌써 몇 개월. 김태양은 자신이 태릉에 들어가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며 두 아이를 데리고 부엌으로 향했다.
달그락, 달각.
화르륵!
부엌에는 오늘 식사 당번인 마리가 웍을 흔들고 있었다.
“태양 오빠? 아, 같이 왔구나.”
“소민 누나가 올 때 데려오라길래. 이야, 마리 못 본 사이 키가 더 컸네?”
“만혁 오빠가 파츠를 보내서.”
얼굴을 붉히며 자기 팔을 쓰다듬는 마리의 모습에 김태양은 자신의 형과 그의 연인을 떠올리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너를 응원할게. 마리.”
“응?”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기울이는 마리에게 돌연 줄리엣이 다가가 손을 붙잡았다.
“나랑 같아!”
“아, 네가 걔구나. 만혁 오빠에게 이야기는 들었어.”
“히히. 너 좋아.”
“그래, 그래.”
줄리엣의 갑작스러운 스킨쉽에도 마리는 당황하지 않고 줄리엣을 보듬었다.
“소민 누나는?”
김태양이 짐을 풀고 내려와 식탁에 앉으며 묻자 마리가 줄리엣을 래비 곁으로 보내며 답했다.
“양 의원님 일이 길어져서 저녁에나 온다네. 점심은 우리끼리 먹으면 될 거 같아.”
“흐흐, 좋네. 오랜만에 왕창 시켜 먹어야지.”
“안 돼.”
“아, 왜!”
“오빠 곧 국대 선발 있잖아. 몸 관리해야지.”
“하루 정도는—”
“안돼. 짜장면으로 만족해.”
“탕수육까지만 해줘!”
“…오늘만이야.”
“역시 우리 마리 최고!”
“언니에겐 비밀로 해.”
“당연하지!”
한편. 줄리엣은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인형을 발견하곤 밝게 웃었다.
“토끼다! 귀여워~, 앗?”
줄리엣이 인형을 만지기 위해 손을 뻗자 인형이 벌떡 일어나 아장아장 걸어온다.
“래비, 래비! 이것 좀 봐!”
움직이는 하얀 토끼 인형에 시선을 뺏긴 줄리엣이 래비를 잡아끌자 그는 인형 대신 조종하는 사람으로 추측되는 여성을 쳐다봤다.
“그쪽이 주나라?”
“응.”
래비는 이곳에 도착하기 전, 비행기 안에서 하나 보육원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그중에 주나라라는 인물도 있었다.
남만혁을 협박하기 위해 침입하는 빌런들이나 한 컷 따기 위해 도촬하는 파파라치들을 무자비하게 격퇴해서 한때 뉴스에도 난 여자.
휴먼 기프트 연구소에서 무수한 특성을 다뤄본 래비의 육감이 말하고 있었다.
‘달인 수준의 각성자다.’
“왔냐. 화보는 잘 찍었고?”
“그럭저럭. 그보다 오빠는?”
참고로 주나라는 김태양을 오빠라고 부르지 않는다.
“만혁이 형? 오는 중이랬으니 곧 도착할걸.”
그걸 본인도 잘 아는 김태양이었다.
“퀸 언니랑?”
“최근엔 어지간하면 같이 왔으니까 이번에도 그렇겠지?”
“칫.”
줄리엣은 주변의 대화를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작은 토끼 인형을 품에 끌어안았다.
“꺄아아!”
“이제 그 인형은 네 거야.”
“정말요? 고마워요! 연예인보다 예쁜 언니!”
“합격.”
주나라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줄리엣의 통통한 볼을 살짝 찔렀다.
그리곤 너는 할 말 없느냐는 눈으로 래비를 바라보는 주나라.
침묵이 한참 이어졌고 김태양이 팔꿈치로 래비를 툭 건들자.
“…기품이 넘치는군.”
래비가 짜낸 최대한의 칭찬이었다.
“넌 보류. 줄리엣, 이 인형은 너만의 히어로야. 앞으로 잘 가지고 다녀. 화장실 갈 때나 잘 때도.”
“네!”
무슨 당연한 이야기를 하느냐는 듯한 줄리엣의 태도에 흡족해한 주나라가 인형의 기능에 관해 설명했다.
그걸 모두 들은 줄리엣은 해맑게 웃으며.
“보디가드!”
그 외에도 다양한 기능이 존재했으나 처음부터 아이가 모두 이해하리라 생각지 않았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주나라였다.
“맞아.”
그리고 인형의 가치가 엄청나다는 것을 이해한 래비는 볼을 떨며 입을 열었다.
“아, 아름답다.”
“뭐?”
“너의 눈이.”
래비는 아버지가 연애 시절 어머니께 했다던 대사를 읊었다. 이에 줄리엣이 인형을 툭, 떨어트리며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에 급하게 덧붙이는 래비.
“줄리엣만큼은 아니지만.”
“히끅, …어? 헤헤.”
이 상황을 지켜보던 김태양과 주나라는 서로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눈빛을 교환했고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이것들이, 나도 못 해본 연애를….”
“이 집안에 커플이 몇이냐 대체.”
주나라와 김태양이 탄식처럼 말을 뱉는 순간.
쾅!
돌연 포성이 울렸다.
“꺅!”
줄리엣을 감싸는 래비와 그런 두 아이를 품에 끌어안고 지하 벙커로 이동하는 김태양.
이러한 일이 반년에 한 번씩은 있었기에 보육원 식구들의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마리.”
“찾았어요.”
마리는 미식별 포탄의 접근을 알고 있었으나 남만혁이 설치하고 간 프렉시스산 아크실드를 믿고 방치했다.
현대 문명에서 몇 단계나 앞서나간 방어체계가 일격에 무효화되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인지한 마리가 즉각 남만혁과 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후, 레이더에 잡힌 또 하나의 포탄을 요격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왔다.
“할 수 있겠어?”
“네, 만혁 오빠가 다른 건 몰라도 무기만큼은 안 진다고 했으니까요.”
양팔을 하늘로 뻗은 채 입자분해파동포를 차지하는 마리의 곁으로 일대의 유령들, 3만 명이 몰려들었다.
“만약을 위해서야.”
주나라의 특성으로 불러들인 유령은 다수를 중첩하면 빙의시키지 않아도 일시적으로나마 물리적인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
“고마워요, 언니.”
쾅!
막 유령들이 얽혀 장벽을 형성한 순간, 어떤 소리도 형태도 없이 날아온 무언가가 유령장벽에 막혀 폭발했다.
직후, 불어닥친 엄청난 폭풍이 보육원 창문을 깨고 지붕을 날려버린다.
“하나 더 와요! 요격할게요.”
쭈우웅.
고속 운동 에너지가 탐지되는 지점들에 점사로 발포해 5개의 포탄을 요격하는 데 성공한 마리가 전신에서 열을 뿜으며 주저앉는다.
견갑, 허리, 뒷목, 허벅지 파츠의 외장갑이 열려 내부의 열을 식힐 무렵.
그녀의 레이더에 방금 처리한 숫자의 10배에 해당하는 포탄이 다시 탐색 되었다.
“언니, 포격이!”
“괜찮아. 왔어.”
하늘을 가리킨 주나라의 손가락 끝에는 대낮임에도 빨갛게 번뜩이는 빛이 존재했다.
그것은 일순 하얗게 물들었다가 모습을 감췄고, 동시에 마리의 레이더에 잡혔던 포탄들도 함께 증발하듯 사라졌다.
리쳇이 완벽하게 제어한 입자분해파동포가 인근의 포탄을 모조리 분해한 것.
“고마워, 리쳇.”
-마리, 주나라. 잘 버텼어요.
“이 정도는 해야지. 수리 드론 좀 보내줄래?”
-물론이죠.
주나라는 자신이 열심히 가꾼 정원과 아지트인 다락방이 폭풍과 함께 날아간 것을 확인하곤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리고 그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남자.
“오빠.”
남만혁이었다.
“미안하다. 마트 들리느라 늦었어. 다락방부터 금방 고쳐줄게.”
“괜찮아. 길거리 생활도 해봤는데, 이 정도야. 그냥 용돈이나 좀 줘.”
주나라의 너스레에 녀석의 어깨를 두드린 남만혁은 지하 벙커로 대피했다가 나오는 세 사람을 발견하곤 입을 열었다.
“래비, 줄리엣. 어떠냐. 이게 너희의 일상이 될 거다.”
“상관없다.”
“신나요!”
아이들에게 겁을 좀 주려던 남만혁은 의외의 반응에 잠시 생각하다 피식 웃었다.
‘하긴, 연구소 생활에 비하면 거기서 거긴가.’
남만혁은 엉망이 된 부엌을 둘러보곤 아이들을 데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이렇게 된 김에 바비큐 파티나 하자.”
“언니가 화낼 텐데.”
마리의 중얼거림에 남만혁이 마블링이 가득한 소고기를 꺼내 들었다.
“이걸 보고도 참을 수 있을까?”
“…언니는 마음이 넓으니까.”
황금비율 마블링은 참을 수 없었던 마리였다.
그렇게 캠핑 분위기를 내며 남만혁이 ‘나 때는 말야. 산에서 텐트만 쳐놓고—’를 시전하던 중.
“하나만 묻지.”
어색하게 쥐고 움직이던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드는 래비.
“로맨. 당신은 휴먼 기프트 프로젝트를 어떻게 생각하지?”
물음은 남만혁에게 던졌으나 래비의 시선은 마리에게 가 있었다.
남만혁은 즉답했다.
“소꿉놀이.”
래비는 입꼬리를 길게 당기며 소리 없이 웃었다.
* * *
점심 늦게 합류한 퀸을 배웅하는 남만혁.
“이번 건은 내가 알아서 할게.”
“저쪽이랑 관련된 거 같던데, 괜찮겠어?”
저쪽은 다른 차원을 말한다.
“아직은 내 전담이니까.”
“도움 필요하면 바로 연락해.”
“내가 안 그런 적 있었냐.”
확실히, 지원 요청은 누구보다 칼 같았던 남만혁이었음을 떠올린 그레이스 멜론이 가볍게 웃었다.
“후후, 갈게.”
“오냐.”
퀸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소민이 양 의원과 함께 보육원에 돌아왔다.
“어이구야, 이게 누구야. 우리 하얀 은사님 아니십니까.”
“자네는 언제까지 나를 그렇게 부를 건가.”
보육원에서 마주칠 때마다 자신을 은사라고 비꼬아 부르는 남만혁이 불편한 양효민이었다.
“대통령 당선 후 어떻게 하는지 봐서 결정할 것 같습니다? 당해보셔서 알지 않습니까. 정치인 약속 못 믿는 거.”
“나는!”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고 말하려던 양효민은 이 말 자체가 너무도 정치인스럽다는 것을 자각하곤 잠시 말을 멈췄다.
“—행동으로 증명하지.”
“오, 기대하죠.”
양효민이 남만혁의 냉대에 침음을 흘리며 보육원으로 들어가자 뒤에 서 있던 양소민의 얼굴이 드러났다.
“만혁아.”
남만혁은 양소민이 자신을 나무랄 때의 표정과 말투임을 알곤 얼른 주제를 돌렸으나.
“참, 누나. 낮에 일 들었어?”
“남만혁. 내 아버지야.”
통하지 않았다.
“그 이전에 정치인이잖아.”
“정치인이라고 무조건 불신하는 건 옳지 않아.”
남만혁이 생각하기에 정치인은 두 종류로 나뉜다. 개인의 영락을 위하는 정치인과 집단의 발전에 헌신하는 정치인.
각성자 사회가 도래하고 빠른 속도로 강국이 된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대부분 특성을 내세워 인기를 얻고 정치인이 된, 흔히 말하는 벼락출세의 장본인들이다.
남만혁은 다다음 세대쯤은 되어야 시민들이 특성에 현혹되지 않고 제대로 된 정치인을 뽑을 거라 믿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랬고.
“알았어. 노력해볼게.”
이런 구구절절한 내용을 설명해 봐야 아직 20대에 불과한 양소민이 받아들일 리 없다고 여긴 남만혁은 대충 대답하고 넘겼다.
“그래서, 또 가봐야 한다고?”
남만혁의 귀찮아하는 뉘앙스를 십수 년간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지낸 양소민이 모를 리 없었고, 그녀 역시 자신이 잘하면 될 일이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 애들 좀 잘 봐줘. 특히 래비. 너무 똘똘한 놈이라 골치 아플 거야.”
“너 어릴 때처럼?”
무어라 반박하려던 남만혁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과거의 자신과 래비가 비슷했기 때문.
“…나는 그래도 순한 편이었잖아?”
쥐어짜듯 내어놓는 변명에 양소민은 웃을 뿐이었다.
* * *
서울 히어로 아카데미, 매저드 연구실.
“스승님.”
“자네.”
바이올렛과의 시간을 보내던 매저드는 너무 자주 방문하는 제자에게 눈치를 줬으나 남만혁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소파에 앉았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것들 때문에 조사를 좀 해봤거든요?”
“음.”
“이게 아무래도 저번처럼 저쪽에서 뚫고 들어온 게 아니라, 지구에서 열린 통로로 온 같아서요.”
“보세.”
남만혁이 홀로보드에 지도를 띄우고 지표상의 마나 흐름을 실시간으로 측정해 표시하자 유독 몇 군데 뭉친 곳이 보였다.
매저드는 미래의 기술과 남만혁의 영역이 매끄럽게 연동되는 모습에 속으로 감탄하며 지도를 들여다봤다.
“제가 보기엔 마탑에서 일을 벌인 거 같은데. 스승님 생각은 어떠세요.”
“자네의 추측이 맞아. 이곳 어딘가에서 문을 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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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