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정화
“큭.”
자조 섞인 안토니오의 웃음에 남만혁은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스승님이 네 걱정하시더라.”
입술을 질끈 씹는 안토니오.
“병신새끼. 저항이라도 좀 하지 그랬냐.”
“친조부다.”
“그게 뭐. 남보다 못한 혈육이구만. 그리고 네가 언제부터 가족 챙겼다고.”
“그건….”
“네가 이렇게 뻘짓하는 동안 내 늘어난 마나를 봐라. 안 억울해? 너도 열심히 수련했으면 비슷하게 따라왔을 텐데?”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지는 안토니오의 얼굴을 보고서야 남만혁은 안심했다.
‘인격이 망가지진 않았나.’
“어휴, 남의 배터리나 되는 한심한 새끼.”
“그만.”
“네 마나로 열린 게이트에서 다른 차원의 존재가 튀어나왔고. 그것들이 내 보육원을 공격했다.”
무어라 하려던 안토니오의 입이 바르르 떨리다 이내 다물어졌다.
“대비해두지 않았으면 소민 누나랑 나라, 태양, 마리. 내 가족들이 죽었겠지.”
“…미안하다.”
“나는 네 친조부라는 작자를 용서할 수 없어. 본의는 아니라고는 해도 거기에 일조한 너도 일부 책임이 있고.”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응?”
“네 성격에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면, 이렇게 대화를 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걸 안다. 말해. 원하는 게 뭐냐.”
남만혁은 안토니오가 하는 꼴이 답답하긴 해도 말은 통한다고 여기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 지구방위대 대장해라.”
“뭐?”
“지구방위대. 몰라?”
“처음 듣는다.”
“차원문에서 들어온 놈들이 지구를 헤집으면 처리하는 단체다.”
“그 정도라면 문제없다.”
“규모는 최종적으로 100만 명 정도로 구성될 거고, 전투 인력은 전원 각성자나 마법사로 이루어져야 한다.”
“…노력하지.”
“나중에 타 차원과 전쟁이 벌어지면, 네가 지구 대표로 나서라.”
“하는 데까진 해보겠지만, 내게 그런 권한이 주어질 리 없다.”
“지금부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넓히라는 말이다. 24년 이내에 미, 중, 일, 한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권력을 보유해야 돼.”
죄책감과 스스로의 한심함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안토니오가 남만혁의 과한 요구에 홱, 머리를 쳐들었다.
“되겠냐!”
“되게 해야지. 걱정하지 마. 자금줄은 대 줄 테니까. 그리고 너는 내가 아니었어도 평생 지구방위대에 몸담았을 거다.”
“어째서?”
“지금은 스승님이 대표로 계시니까.”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한다.”
단순한 자식.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남만혁은 힐링 비를 불러 큐링 힐의 특성 효과가 담긴 주사를 안토니오에게 놨고 얼마 후, 골든우드 가문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금안이 그의 비어버린 눈두덩이 안에 생겨났다.
“쉬고 있어라. 금방 끝내고 데리러 올 테니까.”
남만혁이 탑의 상층에 있는 매그너스에게 가려 하자 안토니오가 그의 팔목을 잡았다.
“친조부를 어떻게 할 셈이지?”
“마나 다 뜯어내고 정신 간섭 좀 해서 요양원에 처박을 계획인데, 더 좋은 생각 있냐?”
안토니오는 남만혁이 자신의 예상보다 온건한 방법을 언급하자 말없이 잡았던 팔을 놓았다.
“으음.”
“네 생각해서 많이 봐준 거다. 그렇게만 알아.”
묘한 표정을 짓는 안토니오를 뒤로한 채 아직도 차원문 마법진 중심에 서 있는 매그너스에게 돌아온 남만혁은 신성 폼으로 변한 뒤 그에게 다가갔다.
“조금만 더!”
마법진 주위에 둘러앉아 있던 소환학파 장로 다섯이 기절한 채 매그너스에게 마나가 빨리는 중이었고 남만혁이 그의 바로 앞에 섰을 때쯤엔 차원문이 완성되었다.
“이야, 그 와중에 열었네?”
우우웅!
“케헤헥.”
차원문은 마나 고갈로 인해 피를 토하는 매그너스의 심리만큼이나 불안정한 상태였다.
끼에에, 끼엑!
캬핫, 캭!
찌르릇!
폭 30cm 길에 3m. 주차장 기둥 같은 회색빛 차원문에서 곤충 머리를 한 인간이 튀어나왔다.
처음 한 명을 제외하면 다른 이들은 좁은 문 사이에 끼여 버둥댄다.
“피?”
남만혁은 저들의 갑각 곳곳에 피가 묻은 것을 발견하곤 저쪽에서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키에에엑!
처음 넘어온 곤충 인간이 애절하게 살려달라 외쳤으나 남만혁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마나를 실은 발길질로 그를 걷어차 차원문 안으로 다시 쑤셔 넣었다.
“너희 행성 일은 너네가 해결하세요.”
남만혁은 그리 말하면서도 광학미채를 둘러 은신한 다수의 드론을 저쪽으로 넘겼다.
“문 닫아.”
“끄륵, 1분. 1분….”
마나가 고갈되어 빈사 상태임에도 1분을 고집하는 매그너스의 모습에 남만혁은 더 없는 한심함을 느끼고 그의 턱을 걷어찼다.
뻑!
매그너스의 기절과 함께 닫히는 차원문. 사이에 끼어 있던 곤충 인간의 팔다리가 잘려 나왔고 남만혁은 이를 재빨리 애시드 좀비를 불러 녹였다.
“미지의 바이러스는 항상 조심해야지. 안 그래요?”
“맞, 맞네.”
근처에 있던 정령 학파의 마법사가 남만혁의 물음에 얼떨결에 답한다.
“그쪽은 낯이 익네? 정령탑에서 봤던가?”
“그렇긴 하네만, 잘 모를 걸세. 뒤에 있었던지라.”
“아, 정령탑에서 케르베로스 사체를 넘겨달라던 장로. 맞죠?”
여기서만큼은 남만혁과 얽히고 싶지 않았던 정령탑의 장로는 침묵으로 응했다.
“뭐 좋습니다. 댁이 증인이 돼 주쇼. 나중에 딴소리하면 안 됩니다.”
“무슨 증인 말인가.”
“여기서 벌어진 일을 중앙마도협회에 알리면 됩니다.”
정령탑의 장로는 다소 번거롭기는 하나 문제 될 일은 아니었기에 수락했다.
“정말 그거면 되는가?”
“예.”
남만혁은 이곳의 최고 어른이라 할 수 있는 이에게 확답을 받아냄으로써 와전될 수 있는 이번 일과 앞으로 차원문을 불러낼 때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를 마법계에 알리고자 했다.
“알겠네, 그리하지.”
“그럼 그쪽은 됐고. 자, 아프면 아프다고 하세요.”
거품을 문 채 널브러진 매그너스의 심장과 복부에 손을 댄 남만혁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끄아아악!”
“금방 끝나니까 참으세요.”
마치 치과 의사와도 같은 덤덤한 말투로 마나를 뽑아내는 광경에 공포를 느낀 주변 마법사들이 마치 짠 듯이 동시에 한 걸음 물러난다.
“끝났습니다.”
매그너스의 체내에 존재하는 모든 마나를 흩어버렸다. 그리곤 뺨을 후려쳐 강제로 깨우고는.
“지금부터 너는 마나를 모으거나 마법과 관련된 행위를 하면, 죽는다.”
격의 차이로 때려 박는 남만혁의 세뇌는 마나를 잃어버린 마법사가 항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매그너스는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신음을 흘리며 긍정했다.
다른 마법사들의 부축을 받아 올라온 안토니오가 그 광경을 목격하곤 생각했다.
‘저런 형태의 세뇌가 가능하다면, 마법을 쓰지 말라고 하면 되었을 텐데. 굳이 죽을 길을 열어두는구나.’
대상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면, 한 번의 기회를 부여한다. 그럼에도 대상이 또다시 잘못된 길을 선택한다면 용서 없이 죽인다.
안토니오는 그런 남만혁이 선과 악의 경계에 선 인간이 악으로 떨어지길 바라는 악마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는 여전히 개새끼구나.”
마법사에게는 더없이 잔혹한 처사였으나 변함없는 남만혁의 모습에 어쩐지 마음이 놓이는 안토니오였다.
* * *
“살려뒀더구먼?”
“예, 그편이 더 본보기로 유효할 거 같아서요.”
“잘했네. 한 번은 브레이크가 필요한 시점이었어.”
매저드는 고생하고 돌아온 남만혁에게 정령탑에서 받은 귀한 차를 건넸다.
후릅.
“감사합니다. 안토니오가 좀 불쌍하기도 했고요.”
“동기를 챙기는 건 좋은 일일지. 자네도 들었는가? 소환학파는 대 정화를 시행하기로 했네.”
“네, 당사자에게 들었습니다.”
중앙마도협회는 세간에 물의를 일으킨 소환학파에 대한 징계를 정하기 위해 마법계의 어른들을 모셨고, 거기에 그랜드 위저드 매저드도 참석했었다.
“안토니오가 책임자네.”
“그래야죠.”
안토니오는 ‘지금부터라도 전면에 나서야 나중에 거대 집단의 수장이 되지 않겠냐? 뭐, 네가 스승님을 실망시킬 셈이라면 할 말 없고.’라는 남만혁의 문자 한 통에 이를 악물고 가문 정화에 앞장섰다.
“만족하는가?”
가족을 위험에 빠트린 사건이 이렇게 끝나도 되느냐는 매저드의 물음에 남만혁은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탑을 갈아버리고 싶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친구 가족이고 뿌린데.”
“성장했구먼.”
“제가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편협해지다 어느 기점을 넘으면 다시 모든 것을 포용하기 시작하네. 아이였을 때처럼 말이야. 최근 자네는 이 기점을 넘은 듯허이.”
“…‘너도 늙었다’는 말을 참 돌려서 하시네요.”
“껄껄.”
* * *
“매그너스 님, 약 드실 시간이세요.”
“안 먹어!”
“어휴, 노인네가 성질은. 그러지 말고 이것만 입에 넣으세요.”
큼지막한 숟가락에 약을 올린 간호사는 노인의 입에 반강제로 약을 집어넣었다.
“우웁, 웁!”
“물 드릴게요. 삼키세요. 그렇죠. 잘하셨습니다. 저는 이제 저녁때 다시 올게요.”
“오지 마!”
“네~.”
탁.
문이 닫히자 치매 노인 행세를 하던 매그너스의 표정이 돌변한다.
“빌어먹을.”
뒤늦게 올라오는 수치심을 입가의 침을 짜증스레 닦으며 애써 잊은 매그너스는 주변을 살피곤 베개 아래에 숨겨둔 종이를 은밀히 꺼냈다.
[싱크레아 차원문 프로젝트 수정안]
[1. 대량의 마나 보단 고밀도의 마나 필요]
[2. 차원문 생성 도중 타 차원 생명체의 난입도 고려해야 함]
[3. 바이오 생명체로 마나 배터리를 생성하는 건 한계가 있었음.]
[4. 새로운 마나 응집 형태 발견! 이 방식을 마법진에 적용할 시 이론상 무한 유지가 가능함.]
남만혁에 의해 세뇌당한 매그너스였으나 그는 마지막 남은 좁쌀만 한 마나로 아주 작은 저항을 해냈고 지금과 같이 마나를 쓰지 않는 선에서 연구를 할 수 있었다.
“마법진만 그리면, 내 가설을 증명할 수 있다.”
새로운 마나 응집체계 발견. 최초의 차원문 영구 유지. 불행한 과거를 딛고 우뚝 선 마법사.
찬란한 미래를 상상한 매그너스는 기어코 욕심을 부렸다.
“넘어가면 돼.”
이론상, 타 차원은 지구와는 다른 법칙으로 구성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자신에게 걸린 세뇌도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확신할 수 없어 지금까지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이렇게 사느니….”
하지만 매그너스는 간호사에게 치욕스러운 말을 들으면서까지 이 생활을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해 깊은 회의감이 들었고, 창문 없는 병실을 둘러보다 결단을 내렸다.
“윽.”
그는 아무도 모르게 제작해 심어둔 치아형 마나 배터리를 뽑아 병실 곳곳에 설치했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마나를 새로운 응집체계 형태로 유도한 뒤, 시동어를 읊었다.
“열려라.”
놀랍게도 비교적 아주 적은 마나 만으로 안정적인 차원문이 열렸다.
크기가 협소하기는 하나 한 명이 통과하기에는 무리가 없었기에 매그너스는 신속하게 차원을 넘었다.
“됐다!”
낯선 세계. 온통 녹색으로 이루어진 세상이었으나 매그너스는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고 여기에도 마나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환희했다.
“오오, 오오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철컥.
그는 자신의 관자놀이에 대어지는 차가운 감촉에 전신이 굳었다.
-내가,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매그너스는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드론과 그 위에 떠 있는 홀로그램을 목격하곤 기겁했다.
“네가 어떻게!”
-그 연구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까진 모른 척 할랬거든? 그런데 널 살려달라던 안토니오가 먼저 연락하더라. 친조부가 선을 넘었다고.
“잠깐!”
-쳐내기로 정하면 가족이라도 망설이지 않는 점을 보면, 확실히 안토니오도 네 핏줄이긴 해.
“여기서 연구만 할 수 있게 해다오. 지구로 돌아가지 않겠다! 컥! 으극, 그거걱!”
드론의 총구가 매그너스의 치아를 박살 내며 입 안으로 들어간다.
-기회는 이미 한 번 줬잖아?
절망으로 물드는 매그너스의 눈을 쳐다보던 남만혁이 신호를 보내자 드론에 달린 총구가 불이 뿜었다.
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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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