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교장의 패배
상위 차원 글로리아.
“오늘 투기장에 인간이 나온다던데?”
“그거 때문에 우리 은하 전체가 떠들썩하잖아. 뭘 새삼스레.”
“하긴. 처음이지? 타 차원의 존재가 결승까지 온 거.”
“맞아. 그래서 이 난리가 난 거 아냐.”
[베르데 vs 인간, 세기의 대결.]
[새로운 황제의 탄생을 위하여, 축배 티클티어를 들자!]
[육즙이 흐르는 야생의 타란툴라를 지금 바로 입 속으로!]
하늘로 고갯짓을 한 사내가 투기장 인근에 떠 있는 광고 배너들을 보다 입맛을 다신다.
“내가 티클티어 한 잔 살게.”
“그럼 타란툴라는 내가 쏜다.”
“좋지!”
* * *
“강 님. 인터뷰 괜찮으십니까?”
서울 히어로 아카데미 교장, 강. 그의 얼굴은 피가 엉겨 붙은 수염으로 덮여 있었다.
“인터뷰? 잠시 기다려주게. 이 몰골을 대중들에게 보일 순 없지 않겠나.”
기자는 그걸 아는 사람이 지금까지 그 꼴로 다녔냐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웃는 낯으로 긍정했다.
“그러시죠. 그루밍박스!”
세안 기구가 든 장치를 불러내 그의 세면과 수염 정리를 지켜보던 기자는 점차 드러나는 인간의 얼굴에 소름이 돋았다.
“강. 당신, 인간 맞습니까?”
“음? 아, 이것들 때문에 그러나. 걱정하지 말게. 인간일세.”
교장의 피부는 지금까지 강자들의 특성을 빼앗으며 생겨난 부작용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옹골의 발, 티탄의 눈, 카샤의 불, 엘른델의 손톱, 베르데의 피부, 아줄의 귀. 이건….”
기자가 스캔하자 일순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그의 망막에 자리했다.
“뽑아도 뽑아도 계속 자라더군.”
지구와는 다른 법칙에서 살아온 개체를 흡수하면 마치 보복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어떤 방식으로든 교장에게 외형적인 변화가 생겼다.
“뿌리 기생입니다.”
“오호, 병명이 존재할 정도로 흔한 증상이었나?”
“흔하진 않습니다. 치료법도 현재로선 주기적으로 축출하는 수밖에 없는 거로 압니다.”
“신기해. 이렇게 진보된 세상에도 불치병이 존재하는구먼. 자, 정리 끝났으니 질문하게.”
기자는 징그러운 교장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시선을 돌리고 얼른 준비해온 질문을 읽었다.
“인간의 몸으로 결승전까지 올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곳 사람들은 권능이라는 걸 사용하더군.”
“그렇습니다.”
“그래서였네.”
“예?”
“승리하면 권능은 내 것이 되니까. 아무리 약한 이들이라도 권능 하나씩은 가지고 있잖나. 괜찮은 조합을 짜 실험하다 보니 이렇게 됐어. 예전 생각이 나더군.”
교장의 권능 강탈은 베르데의 황제가 사용을 허락한 것으로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투기장은 권능 수집을 위해 출전하셨다는 거군요?”
“나는 언제나 그래왔네. 그것이 나의 힘으로 이어지니까.”
“알겠습니다. 다음 질문은 만약 우승하신다면 상금으로 무엇을 하실 계획입니까?”
투기장 우승 상금은 한국 돈으로 약 1조에 달하는 막대한 돈이 걸려 있었다.
“만약 우승하고 이곳을 무사히 벗어난다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데 쓰겠지. 기자 양반, 내가 차원 이동을 하는 데 얼마나 들겠는가?”
“권능이 많을수록 비용이 많이 들긴 하죠. 상대의 권능까지 흡수한다 치면, 상금의 8할은 필요할 겁니다.”
“다행이구먼.”
“마지막 질문입니다. 패배할 시 죽음이 확정되어 계신데, 후회는 없습니까?”
교장이 베르데 행성에서 마음껏 권능을 강탈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언급했다시피 황제가 허락해서다.
그리고 교장은 이 황제와 처음 대면했을 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딜을 걸었다.
‘내가 죽으면 빼앗은 권능은 모두 주인에게 돌아간다. 그러니 한 번이라도 패배한다면, 죽여라.’
투기장이 열린 기간은 28일.
그 정도면 국민의 불만을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한 황제는 교장의 제안을 수락했다.
“오히려 좋네.”
“무슨 말씀인지?”
“자네들과는 다르게 나는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하지 않나. 기자 양반, 자네도 내가 부럽지 않나.”
“부정할 수 없군요. …당신은 정말 베르데 같은 인간입니다.”
“허허, 칭찬으로 듣겠네.”
측.
-양측, 경기 준비해주십시오.
진행자의 목소리가 대기실에 울리자 기자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경기장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만족하고 가시길.”
기자는 그의 죽음을 확신했다.
“노력하지.”
-우리들의 영원한 챔피언께서 등장하십니다! 모두 예의를 표하십시오!
관객들이 벌떡 일어나 입구를 향해 예를 표한다.
-황제 폐하 납시오!
베르데. 이들은 당대에 가장 강한 자를 황제에 앉힌다.
계단을 밟고 올라온 황제는 베르데 종이라면 누구나 꿈의 경지라 일컫는 19단 압축근에 성공한 이로, 시간만 주어지면 행성도 두 주먹으로 부술 수 있는 괴물이다.
참고로 압축근이란, 단련을 통해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근육을 1/100 크기로 압축한 것을 말한다.
-우리의 황제 폐하께 맞서는 겁 없는 도전자, 강!
오오!
무모한 도전을 하는 이에게 언제나 찬사를 보내는 베르데 종답게,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두 선수 준비되셨습니까. 좋습니다. 경기, 시작!
두둥!
북소리와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고 황제는 팔짱을 낀 상태로 교장의 권격을 받아냈다.
교장은 지금까지 강탈해온 온갖 특성과 타 차원의 기술을 활용해 황제를 공격하였으나 작은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그게 끝인가?”
어린 시절, 호기롭게 어른 각성자에게 대들었을 때 들어본 말이 황제의 입에서 나오자 교장은 헛웃음 들이켰다.
“하!”
교장은 이대론 답이 없다고 여기고 자신의 자아를 유지하고 있던 ‘인간’이라는 축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그러자 등에선 거미의 다리, 어깨에는 티탄의 팔, 또 하나의 귀가 달리는 등, 그의 육체에 그동안 흡수한 특성의 원주인들의 특징이 돋아났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교장의 피부가 완전히 녹색으로 변했다는 것.
“네놈을 부수고 먹는다.”
교장의 변화는 단순히 외형에서 끝나지 않았다. 원주인들의 특징들이 나타난 만큼, 그 본연의 힘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상승한 전투력은 기존의 두 배 이상.
“너 같은 존재가 네 고향에 많으냐?”
“모른다!”
“몇 번 지구 출신이지?”
“…큭.”
“네 세계선에 신성은 존재하는가?”
“커헉!”
한 번의 공방마다 황제의 질문과 함께 나가떨어지는 교장.
“흐음. 너 같은 강한 생물이 둘 이상이면 나도 위험하겠어.”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중얼거리는 황제.
“흐흐.”
황제의 공격에 의해 타 종족의 신체들이 뜯겨나간 교장이 쓰러진 채로 조소를 흘렸다.
“왜 웃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늙은이에 비하면.”
“늙은이? 자세히 말하도록.”
교장이 둘 이상만 되었어도 위협적이라 생각한 황제는 그보다 강한 이가 존재한다는 말에 급히 되물었다.
“아쉬워…. 남만혁 그 꼬맹이의 특성을 무리해서라도 흡수했어야….”
점차 호흡의 폭이 짧아지는 교장의 모습에 황제가 의료진을 불렀다.
“당장 치료해라!”
“죄송합니다. 이미 숨이 끊어졌습니다.”
“쯧. 머리만 떼서 블루에게 가도록.”
아줄에게 부활 주문을 걸어 달라는 부탁은 황제에게 있어 큰 치욕이다. 그것을 감수할만한 일임을 안 의료진은 군말 없이 교장의 머리를 들고 떠났다.
* * *
얼마 후. 베르데 황제의 어전.
“뭐라?”
“특수한 형태의 마나 때문에 부활에 시간이 꽤 걸린다고 합니다.”
“얼마나 걸린다더냐.”
“그것이….”
“어서 말하지 못할까!”
“20년은 필요하다고.”
“이 블루 새끼들이 장난질을 쳐!”
신하들과 있을 때는 점잔을 빼지 않고 본성을 드러내는 황제였다.
“진, 진정하시옵소서!”
팔걸이를 쾅쾅 내리치며 분을 삭인 황제가 고갯짓으로 다음 보고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강, 이라는 자가 넘어온 지구를 조사해봤습니다.”
“찾았나?”
“죄송합니다. 아무리 찾아도 흔적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중앙국에 의해 재격리에 들어간 게 아닌지….”
순간 두 눈에 핏발이 서는 황제의 모습에 침을 삼킨 보고자가 유언을 남기려는 때에.
“알았다.”
“헛! 관대한 아량에 감읍하옵나이다!”
보고 이후 황제가 말없이 무언갈 고민하는 듯하자 술렁이던 어전이 정적에 휩싸였다.
“앞으로 20년 동안 베르데는 전쟁 물자 비축에 들어간다.”
“혹, 강이란 자가 넘어온 지구를 침략하실 의향이신지요.”
“그렇다. 저런 개체가 태어나는 행성을 내버려 두어서야 되겠느냐.”
“하오나….”
“전쟁! 당장 폐하의 용언대로 진행하겠사옵니다!”
몇몇은 우려를 표했으나 대다수는 대환영이었다. 블루와의 대규모 전쟁이 종식된 지도 벌써 60년.
강자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힘을 표출하길 원하고 그 창구가 지금까지는 각지에서 벌어지는 투기장이나 스포츠가 전부였기에 불만이 쌓여 있었다.
황제는 이 불만이 언제고 크게 터질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화근 제거와 더불어 일거양득의 수로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만약 이 일을 남만혁이 봤다면 세상 모든 쌍욕을 입에 담으며 교장의 아가리에 핵탄두를 처넣고 30번쯤 터트렸을 것이다.
* * *
“어, 시X. 뭐야.”
-왜?
싱크레아에서 넘어와 지구의 생태계를 어지럽히던 곤충들을 리쳇의 보조와 함께 처리하는 와중, 갑자기 느껴지는 불길함에 나도 모르게 욕을 입에 담았다.
“몰라, 누가 내 욕했나?”
어제 탄산음료에 바퀴벌레 녹여서 판 블랙 기업 하나 조져서 나 욕할 사람이 많기는 하다.
뚜르르.
몸이 으슬으슬해서 벗어둔 코트를 걸치는데, 품에서 홀로폰이 울린다.
[스승님]
“예, 스승님.”
-바쁜가? 시간 나면 연구실에 들르게.
“바쁘긴요. 지금 갈게요.”
어차피 정리도 끝나서 사무소로 복귀하려던 차였다.
얼마간의 비행 끝에 스승님의 연구실에 도착해 문을 두드리자.
“바이올렛, 열어주게.”
바이올렛?
“네, 교수님. 들어와.”
안나벨이 문을 열어 들어온 연구실은 그간 보였던 실험 도구들이 싹 치워져 연구실이라기보단 일반 가정집처럼 보였다.
“자네 왔는가.”
“스승님?”
침대에 누워 있는 매저드. 몇 달 전에 왔을 땐 멀쩡하셨었다.
“괜찮네. 앞으로 20년은 더 살 수 있어.”
“이런 상태로 말입니까?”
“허허, 나이가 들면 다 그런 거야. 그렇지? 바이올렛.”
“…교수님께서 얼마 전부터 나를 바이올렛이라고 부르셔.”
안나벨은 이젠 별명이라 생각하기로 했다며 어깨를 으쓱이곤 따뜻한 차를 타 와 매저드에게 건넸다.
“자네도 들게.”
후릅.
차를 마시는 동안 스승님은 아무 말 없이 창밖과 안나벨을 번갈아 보았고, 종래에 한숨과 함께 말을 토해냈다.
“강이가 죽었네.”
“교장이요?”
“그 녀석 몸에 심어둔 내 마나가 소실되었네. 당분간은 시신에 남아 흐르겠지만…. 흩어지겠지.”
나는 잘되었다고 느꼈으나 스승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입을 닫고 기다렸다.
“자네, 혹시 묘한 시선을 느끼지 못했나?”
“시선이라 하시면?”
“소름이 돋는다던가, 마른기침이 난다던가 말일세.”
“스승님 전화 받기 직전에 그런 느낌이 들긴 했습니다.”
“그렇다면 확실하군. 내가 전에 말한 심계를 기억하는가?”
“예.”
우리 언데드 클럽 애들이 요즘 두식이네 성에 놀러 가 있어서 모를 수가 없다.
“그곳에서 언데드 웨이브를 일으킬 때 이와 유사한 느낌을 받았네.”
“다른 차원의 무언가가 지구를 노린다는 건가요?”
“늙은이의 괜한 걱정이었으면 했네만, 자네까지 느꼈다면 그럴 가능성이 클 테지.”
…그블린이 벌써 쳐들어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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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