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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177화 (177/201)

<177화>

록시 데미하트 (1)

자신감 덩어리인 퀸이 저렇게 구는 건 나를 놀리기 위함이다. 애초에 할머니에게 한 말로 화를 낼 리도 없고.

해서, 어른들께 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퀸에게 새 와인을 건네며.

“은하 제일 미녀가 지구 일에 끼는 건 좀 그렇지 않냐.”

“흐흥.”

퀸이 입가를 씰룩이며 와인을 홀짝일 때쯤. 잔잔한 클래식이 흐르던 스카이라운지에 돌연 빠른 비트의 음악이 대형 스피커를 통해 튀어나왔다.

“제 손자가 만든 클럽 음악이랍니다. 호호.”

손자 음악 홍보였나. 좋네.

할머니가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아들 자랑을 늘어놓는 사이 나는 퀸의 손목을 잡고 홀의 외곽으로 이끌었다.

“연습했으면 써먹어야지.”

“이 음악에? 너무 빨라.”

나는 퀸의 손을 끌어다 내 허리에 둔 다음 영역을 펼쳐 주변 소리를 차단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둔 탱고, 포르 우나 카베자를 홀로폰으로 틀자.

“하여간, 자기가 원하는 상황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천부적이라니까.”

그리 말하면서 수줍게 내 손을 잡고 먼저 스탭을 밟는 퀸.

나 역시 그에 맞춰 녀석을 따라 움직였다. 탱고의 대표적인 퍼포먼스라 할 수 있는 화려한 턴과 과격한 고갯짓은 없었으나 이마를 맞대고 서로의 호흡을 느끼며 스카이라운지 외곽을 누볐다.

밤~

그러다 격정적이었던 바이올린이 멈추며 곡이 끝났고, 나는 퀸의 손을 놓으려 했으나.

꽉.

“더 추자.”

“다음 곡은 연습 안 했잖아.”

“해볼래.”

‘해볼래’란다. 원래 알고 있었으면서.

나는 웃음을 감추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응? 잠깐, 이쪽은.”

그런데 퀸이 방향을 홀의 중앙을 향해 돌리는 게 아닌가.

녀석이 한 발 내딛기가 무섭게 흘러나오는 리베르 탱고.

어느새 위장용으로 쓰고 나온 뿔테를 벗고 머리를 풀어 헤친 채 턱을 당기고 나를 노려보듯 바라보는 퀸.

-외우주에 진입한 그린의 오물 밀폐 작업 완료. 당분간 추가 위협은 없을 것으로 보임.

됐다. 이제야 편하게 즐기겠구만.

“간다.”

해방감이 때문인가. 종일 전전긍긍하던 문제가 해결되니 기분이 상당히 좋아졌다.

나도 퀸의 격정적인 움직임에 맞추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홀의 중앙에 있었다.

스포트라이트가 머리 위로 떨어졌고 주변의 광경은 점차 희미해진다.

보이는 거라곤 볼이 상기된 퀸.

‘자기가 저질러놓고 부끄러워하는 건 또 뭐야.’

빰!

리베르 탱고에 맞춰 퀸과 나는 동시에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탱고 특유의 정열적인 퍼포먼스로 동작을 이어갔다.

빠밤.

어느 순간 음악이 끝났고 자연스레 움직임을 멈추자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모습이 보였다.

와아아!

영역을 해제하고 퀸과 함께 인사를 하며 우리 자리로 돌아가던 중, 누군가 내 어깨를 강하게 밀쳤다.

돌아보니 허연 면상이 눈에 들어온다. 프로즌화이트.

‘그래, 한 번은 꼬장 피울 줄 알았다.’

나는 의도적으로 다리에 힘을 풀어 테이블 하나를 엎으며 넘어졌고 그 테이블에 앉은 사람 중에는 이 파티의 주최자가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죠?”

“그, 그게 아니라. 저놈이!”

“나가세요. 당신 같은 무뢰배는 제 파티에 참여할 자격이 없습니다.”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퀸에게—”

“프로즌화이트. 용기가 없는 남자를 좋아하는 여성은 없습니다. 하물며 치졸하기까지 하다면…. 더 말 안 해도 이해하리라 믿어요.”

“크윽.”

냉기를 풀풀 흘리며 나를 쏘아보는 프로즌화이트.

밖에서 보자, 이런 뜻인가? 사람 눈 없는 데서 만나면 내가 오히려 좋다.

‘퀸에게 헛수작 부리는 놈들은 미리미리 쳐내야지.’

언제 어떻게 발목이 잡힐지 모른다. 적당한 시기를 봐서 퀸과 나를 잊도록 정신 간섭을 해둬야겠다.

“미안해요. 퀸, 로맨. 저런 자를 초청한 저를 용서하세요.”

“아유, 괜찮습니다. 저런 놈은 어딜 가나 있잖아요.”

“맞아요. 저희는 아무렇지 않아요.”

“그래도 미안하니, 펜트하우스를 내어드릴게요. 제 마음이니 거절하지 마세요.”

일주일간 펜트하우스를 이용해도 좋다는 할머니의 말에 엄한 집 놔두고 굳이 여기서 생활할 필요성을 못 느껴 거절하려 했으나 퀸이 힐로 발등을 찍기에 입을 다물었다.

“아니, 윽!”

“고맙습니다.”

“호호, 저는 그렇게 알고 먼저 가볼게요.”

“네, 들어가세요.”

우리는 그길로 펜트하우스로 돌아왔고, 나는 예정에 없던 격전을 치러야만 했다.

“우리, 저녁은 품격 있게 먹기로 하지 않았어?”

내 떨리는 목소리에 퀸은 화끈하게 나를 벽으로 밀어붙이곤.

“그러고 있잖아?”

* * *

“밀폐한 그거, 다시 못 돌려주나?”

-그린 오물? 어렵지. 급하게 처리하느라 밀폐나 완충이 완벽하지 않아서 추진력을 못 버티고 폭발할 가능성이 커.

“대책은?”

-프렉시스의 장인 한 명이 그 정도 팽창력이면 터빈을 돌려보자고 해서 그쪽으로 구상 중이긴 해.

“오, 천잰데?”

가스가 위험하다고는 해도 다른 행성이나 위성에서 기계로 작업하면 그만이다.

-프렉시스엔 아날로그 에너지를 사용해본 장인도 많으니까.

“그렇게 진행해. 그 장인은 크레딧을, 아니지. 적당한 상 하나 만들어서 줘. 최초라는 타이틀도 앞에 붙여서.”

프렉시스에 영입한 장인들은 천연 용광로를 이용하기 위해 모인 이들이다.

저만한 명상을 쌓인 장인이면, 돈은 이미 충분할 터.

그러니 명예를 쥐여주고 부상으로 용광로 이용 시간을 늘려주는 편이 더 달가워할 거다.

-알았어.

“파파로티나 채굴선들은 피해가 어느 정도래?”

보급함이라곤 해도 우주함인 이상 최소한의 무장은 갖춘다. 호위함도 몇 척 붙어 있었다고 들었다.

-한동안 소행성 채굴은 어려워. 그래도 대부분 기계니까 프렉시스만 바짝 돌리면 금방 복구돼.

“위치 노출은?”

-추적당하던 채굴선은 전부 가짜 좌표로 이동시켰어.

자원 거점이 걸리면 끝장이다.

프렉시스가 멈추는 건 물론이고, 지구로의 침략이 시작됐을 때 우주에서 수를 줄이겠다는 내 기본 전략 자체가 어그러진다.

“멀티가 없어서 문제란 말이지.”

나는 파파로티나 이외의 자원 거점을 찾기 위해 상당한 시간과 돈을 들였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글로리아엔 그런 행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보고뿐이었다.

쓸만한 행성은 전부 개발이 끝났다나.

해적이나 해적으로 위장한 기업이 기를 쓰고 프렉시스를 침공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글로리아의 탐사는 아예 손을 놨다.

“역시 믿을 건 저쪽 차원밖에 없나.”

프렉시스가 띄워진 화면 옆엔 행성 싱크레아가 비춰지고 있다.

저 하위 차원은 지구 이하의 문명이다.

아직 우주 진출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으니 널린 게 자원 행성인 셈.

그래서 열심히 탐사 중이었으나 아무래도 내가 현재 보유한 우주선이 채굴선 아니면 전투선이라 진척이 느리다.

그렇다고 넥서스를 투입하자니 언제 그린이나 해적이 프렉시스를 공격할지 몰라 빼 올 수가 없다.

“지금 싱크레아 차원 탐사가 어디까지 진행됐지?”

-제1 은하만 간신히 밝힌 수준이야.

싱크레아 행성이 존재하는 은하를 1번으로 명명했다.

“자원 거점으로 삼을만한 행성은 없었고?”

수천억 개의 행성 중에 자원 행성 하나 없을까 싶었으나.

-이쪽에서도 구할 수 있는 흔한 것들 뿐이야.

없었다.

“끙….”

다른 은하로 넘어가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다. 상위 차원에서 워프 게이트라도 가져오지 않는 한, 그블린의 침공이 먼저 벌어질 거다.

-제2, 3 은하에는 장인들이 운송 수단만 지원해주면 직접 캐오겠다고 할 정도로 쓸만한 자원이 많아.

“괜찮은 방법 없어?”

-워프 게이트가 답이긴 한데, 우리가 격리 차원에 소속된데다 하위 차원에서의 사용은 허가가 안 나.

“쓰읍. 워프라, 워프. 음? 어어?”

문득 회귀 전에 본 기사 한 줄이 뇌리를 스쳤다.

[빛보다 빠른 빌런, ‘록시’. 그녀는 사실 갓 차일드였다? 불운한 빌런의 과거와 잔혹한 현실에 대하여.]

“기사를 본 게 사성그룹 인턴으로 잠입했을 때니까…. 9년 뒤? 그럼 올해로 14살인가.”

내가 본 기사에 따르면, 지금이 가장 불행한 시기다.

낮에는 짐승 같은 부모에게 폭행을 당하고 밤에는 강제로 약팔이를 하는 나날.

이 생활에서 삶에 염증을 느낀 록시는 몇 년 내로 가족을 죽이고 빌런이 된다.

“특성이 이중선택이었던가.”

록시의 특성은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동생에 의해 밝혀졌다.

‘언니는 항상 두 가지 보기 중 하나를 고른다고 했어요. 뭔가를 선택하면 갑자기 먼 곳에서 나타나곤 했죠. 지붕 위나 나무 위 같은 곳이요.’

이 이동과 관련된 듯한 특성을 직접 겪어본 게 아니었기에 은하 규모로 가능할지에 대해선 확신이 없었으나 일단 혹시 모르니 리쳇에게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콜롬비아에 있네.

“거기가 집이야?”

-아니, 부모가 마피아에 팔았어.

“언제?”

-신입 교육을 받는 중이라는 거 보니까 얼마 안 됐네.

“데려와.”

예전 같았으면 내가 직접 가서 영입했겠으나, 이제는 밀키 포스를 비롯한 밀키 마이닝 소속의 여러 팀이 세계 각지에 포진해 있어서 말만 하면 알아서 잡아 온다.

14살짜리 불행한 꼬마 하나를 내 앞으로 대령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시간.

“세상 참 좋아졌다.”

“…….”

독기 어린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 중학생 소녀.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키가 상당히 작다.

캡슐 하나면 필요한 영양을 섭취할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성장이 더디다는 건, 그만큼 가혹하게 자랐다는 의미일 터였다.

휘이잉.

차가운 바람과 함께 내 옆에 내려서는 여성.

“어, 왔냐.”

“오늘 쉬는 날인데요.”

FF를 불렀다. 아무래도 나 혼자보다는 동성이 있는 편이 심리적으로 편하지 않을까 해서다.

‘둘이 비슷하기도 하고.’

불행한 과거로 인해 빌런이 된 점이 말이다.

“얘랑 좀 놀아줘.”

“…왜죠.”

FF가 미간을 좁히며 무어라 하기 전에 꼬질꼬질한 중학생 꼬마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뭘.”

“저를 왜 납치한 거냐고요. 미리 말하지만, 그놈들은 나를 위해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을 거예요.”

“알아.”

“알면서 왜!”

“네가 필요하니까.”

“예?”

“네 능력이 필요하다고. 그 선택지인지 뭔지.”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데. 어떻게 아셨죠?”

내가 적당한 핑곗거리를 생각하던 중, FF가 록시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알아. 그냥 그런 특성을 가졌겠거니 해. 괜히 마음고생 하지 말고.”

마음고생 했구나, FF. 녀석 앞에서 온갖 아는 척을 다 하긴 했지.

“이름은?”

“…록시 데미하트.”

본명이었구만.

“남만혁. 로맨으로 활동하는 히어로이기도 하다.”

“그래서요?”

록시의 날 선 반응에 FF가 안쓰럽게 녀석을 바라본다. 자신의 과거와 겹쳐 보이는 걸까.

“너 지니라고 아냐?”

록시가 눈썹을 찡그리자 FF가 설마 하고는 입을 연다.

“램프의 지니?”

“맞아. 소원을 세 가지 들어주는 정령.”

“그게 왜요?”

“록시. 내가 네 지니가 되어주마.”

바람이 불어왔다. 사무소 앞 동백나무가 사르르 흔들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그러다.

퉤!

록시가 내 발치에 침을 뱉었다.

“개소리!”

…똑똑한데?

――――――――――

❖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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