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록시 데미하트 (2)
록시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믿지 않았다. 땍땍거리는 애들 달래는 건 아카데미에서 충분히 했으므로 그냥 기드빈에게 넘겼다.
“군대 밥 먹다 보면 생각이 달라지겠지.”
그로부터 몇 주 후.
훈련병이 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기드빈의 보고에 녀석을 다시 불러 앉혔다.
“…….”
처음과는 달리 독기가 어느 정도 빠진 모습이었으나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이다.
“의식주, 교육, 일자리를 제공해주마.”
“대가는요?”
“스스로 한계를 정하지 말 것.”
“…알겠습니다.”
내 답이 의외였던지 꽤 놀란 표정이다.
“기드빈이 불편하면 이야기해. 싱크레아에 주택 하나 알아봐 줄게.”
“아뇨!”
기드빈 이름이 나올 때마다 움찔움찔하길래 혹시나 해서 찔렀더니 저런 반응이다.
부함장에게 반했구만 이 녀석.
하기야 저 나이대 애들이 좋아할 인상이긴 하지.
“기드빈은 한계를 넘은 인간을 애정하는 편이다.”
“예?”
“그냥 그렇다고.”
기드빈의 보고에 의하면 이중선택 특성은 가본 곳으로 이동하는 게 한계라고 한다.
이것도 무적 대단한 능력이나 은하 간 이동에는 못 써먹는다.
이걸 돌파하려면 재각성밖에 없다.
나는 재각성의 조건 중에 간절한 마음도 있다고 믿는다.
14세 소녀의 짝사랑, 그것만큼 간절한 감정이 있을까.
“장교 과정이 끝나면 너는 싱크레아 우주군에 소속되니까, 그 안에 어떻게든 하는 게 좋을걸.”
“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알아들었으면서 모른 척은. 됐으니까 가 봐. 특성 훈련 열심히 하고. 그 성과에 따라 기드빈을 네가 원할 때 볼 수 있냐 없냐가 정해질 거다.”
* * *
-기드빈으로부터 보고. 록시, 금일 재각성. 은하 이동 가능.
이 보고를 듣기까지 무려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찾아둔 자원 행성에 거점 건설 시작해.”
그동안 그린과 많은 전투가 있었다. 파파로티나 인근 소행성군에서 자원을 싹싹 긁어모아 만든 프렉시스산 무기들과 솜브리오 함장의 귀신같은 지휘 덕에 어떻게든 버텨내기는 했으나, 이제 그것도 한계다.
소행성 자원이 거의 고갈됐고, 장인들도 프렉시스의 에너지가 예전 같지 않단다.
이런 상황에서의 록시의 재각성은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였다.
-발라르카는 어떻게 할래?
그러나 발라르카가 고향에 안부차 전화하면서 그린과 우리의 전쟁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가서 이야기해봐야지.”
사단 에이스인 그녀가 나와 지구의 정보를 가지고 적진에 가담하면 치명적이기에 어떻게든 설득하기 위해 직접 방문했다.
“할 말이 뭔데.”
감자칩을 끼고 콜라를 마시며 내 이야기를 듣던 발라르카는 으엑, 하는 표정을 짓고는 손사래를 쳤다.
“그 쩐내 나는 곳으로 다시 돌아갈 거냐고? 고향이 침략당한 거면 모를까. 절대 안 가. 아, 그렇다고 너희를 도울 생각은 없어.”
발라르카는 퀸과 대련을 하는 매일이 너무도 만족스러워서 다른 욕구가 들지 않는단다.
그렇다고 마냥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발라르카를 감시하는 드론을 남기고 돌아왔다.
드론에 찍힌 발라르카의 스케줄은 정말 SHQ 사무소와 본인 집이 전부였다.
“발라르카 감시는 관둬, 괜히 심기 어지럽혀 봐야 득 될 게 없어.”
하는 말이나 분위기를 보니 우리를 도우면 도왔지, 그린의 군대에 붙을 거 같진 않았다.
‘이제 내부의 적은 없다.’
그블린의 침공 당시 빌런 짓을 해댔던 국가 수장과 의원들은 진즉에 교감의 힘을 빌려 ‘지구 수호’라는 암시를 걸어뒀다.
외세의 침략이 발생하면 지구 방위군에 가입하고 헌신하도록 말이다.
물론, 내가 알지 못하는 자잘한 변수와 빌런들이 등장하겠으나 이는 밀키 포스와 히어로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우리는 그블린 전에 집중하자. 시간이 별로 없어.”
우주 규모 전쟁을 준비하는 데에, 17년은 길지 않다.
* * *
글로리아 차원, 행성 아줄.
“종의 왕이시여. 그린의 전쟁놀이가 길어지는 이유를 알아 왔사옵나이다. 전송을 허락해주십시오.”
“허한다.”
회귀 전 남만혁의 목을 쳤던 아줄의 왕. 그는 최근 그린이 프렉시스 행성 인근에서 어떤 세력과 전쟁을 한다는 보고를 듣고 조사를 명했었다.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정보를 살피던 왕은 수염을 쓸며 입을 열었다.
“구세대 전함들 아닌가.”
“예, 그 골동품을 운용하는 자들은 인간으로 밝혀졌습니다.”
“우리 차원의 인간이던가?”
“여기면 어떻고 다르면 어떻겠습니까. 고작 인간—”
“허슨. 우리 행성이 왜 ‘아줄’인지 모르는가.”
종족 명이 행성 명이 되는 경우는 딱 하나뿐이다.
“…허억! 그, 그분과의 접점은 없었습니다. 그랬다면 그린이 저렇게 전쟁놀이를 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땅이 구체라는 것을 알기도 전에 외부의 누군가가 이름을 붙인 경우다.
오직 자신의 편의를 위해 종과 행성 명을 일치시켜서 말이다.
“주의하게.”
“죄송합니다. 실은 저자들의 출신을 찾는 데 그린도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만, 전쟁이 시작된 지 수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못 찾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격리된 차원의 종족이 아닐는지요.”
“그건 그것대로 위험하군.”
격리가 적용될 정도로 문명이 열등함에도 다른 차원으로 진출을 했다는 건, 어떤 방식으로든 중앙우주국과 접촉을 했다는 의미다.
왕좌의 손 걸이를 매만지며 고민하던 왕은 결국 명령을 내렸다.
“다른 차원의 존재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저 인간들의 거점을 지워라.”
아줄의 왕은 터전을 파괴한 정도로 행성에 ‘아줄’이라는 이름을 붙인 절대자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선대가 남긴 기록을 통해 알고 있었다.
“폐하, 그…. 송구하오나, 그래서는 저희만 손해일 뿐이옵니다.”
귀를 부르르 떨며 고개를 푹 숙이는 신하의 모습에 아줄의 왕은 잠시 그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다 말을 이었다.
“짐이 그러한 이치도 모르겠느냐.”
털썩.
“부디 용서를!”
“이대로 그린의 호황을 지켜볼 수는 없다. 짐이 전송한 전략을 그대들이 검토해 진행하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 * *
파파로티나에서 오던 수송대가 프렉시스 인근에서 블루 소속으로 추측되는 함선에 의해 나포되었다는 소식이 남만혁에게 전달되었다.
“여기서 블루가 왜 나와!”
한숨과 한탄과 신음을 흘린 남만혁은 곰곰이 이유를 추측하다 이내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그린이 신나는 꼴을 못 보는 건가.”
얼마 전, 남만혁은 강습함에서 붙잡은 포로를 통해 그린의 행성이 호황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잠겼던 소비 시장이 활성화되어 전쟁 부흥을 이루는 중이라고 했던가.’
“늘 그린을 아니꼽게 여기는 블루가 이 정보를 듣고 가만히 있는 게 더 이상하긴 한데….”
-모든 수송선 통신 두절.
“썩을!”
블루는 10살이 되기 전에 정신 마법에 대한 교육을 필수적으로 받는 종족이다.
수송선에 타고 있는 이들 중 블루의 정신 지배를 저항할 지성체는 없다.
‘즉, 그들이 알고 있는 정보. 파파로티나의 위치가 곧 들통난다.’
-그린, 퇴각 중.
“왜? 아!”
그린은 명예를 추종하는 종답게 블루의 간섭을 알아채고 물러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아줄의 왕은 알았다.
-프렉시스 좌표 23, 199, -12에 다수의 함선 출현! 블루의 고드름 함대로 추정!
빙결 속성 마법사들이 함선의 에너지 코어를 매개로 마법을 사용하면 어떤 이적을 일으키는가를 증명하는 함대.
그들이 쏘아낸 마법은 빔 계열 주포보단 느리지만 압도적인 물리력과 유도 성능을 가졌으며 어지간한 실드는 가볍게 찢고 적함을 관통한다.
그러한 마법이.
-적 함대에서 사출된 투사체의 개수 약 1천!
“X 됐네.”
이건 넥서스가 아무리 절묘한 기예를 펼쳐도 프렉시스를 구원할 수 없다고 판단한 남만혁은 록시를 불렀다.
-예, 제독.
소위 계급장을 단 소녀가 응답하자 남만혁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네 차례다. 프렉시스와 파파로티나의 사람들 전부 데리고 넥서스로 튀어. 여유 되면 주요 물자도 챙기고.”
-예, 써!
경례를 올려붙인 록시가 넥서스를 타고 프렉시스와 파파로티나를 종횡하는 동안 남만혁은 프렉시스 방위군에 이런 상황을 대비해 지정해둔 합류 포인트까지 퇴각할 것을 명했다.
남만혁의 명령이 막 떨어졌을 때는 파파로티나의 인부와 프렉시스의 장인들이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나 불과 몇 분 차이로 들이닥치는 블루의 공세를 보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프렉시스가 아이시클 함대가 쏜 고드름들에 의해 꿰뚫리는 모습.
“내가 저기 있었으면…. 히익.”
천연 용광로라고 할 수 있었던 프렉시스의 핵이 차갑게 식었고 급속도로 붕괴되었다.
아이시클 부대는 이젠 단순한 돌덩이가 되어버린 프렉시스를 한 번 선회하곤 사라졌다.
-아이시클 함대, 파파로티나에 출현.
“파파로티나에 남은 사람은?”
-없음.
파파로티나도 프렉시스와 같은 수순을 밟았다.
본래 소행성군의 자원을 채굴하기 위한 거점이라 행성이 사라지는 것 자체는 크게 아쉽지 않은 남만혁이었으나 블루의 존재가 이쪽을 벌써 인지했다는 것이 크게 아쉬웠다.
“앞으로 글로리아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겠어.”
-동의.
“록시는?”
-무사해. 될 수 있는 대로 다 옮겼다는 보고를 마지막으로 기절했어.
넥서스는 비활성화 시 글로리아에 머물고, 소환하면 남만혁이 존재하는 차원에 나타난다.
이를 이용하기 위해 싱크레아로 일찌감치 자리를 옮긴 남만혁은 인적, 물적 자원을 모조리 수송하는 데 성공했다.
“어떻게 위기를 넘기긴 했네. 지금부터가 문제지만.”
프렉시스의 파괴.
지구의 문명을 급속도로 끌어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그블린을 상대할 무장과 함선을 제작하던 무기공장을 잃었다.
싱크레아 제2 은하에서 확보한 자원 행성만 30개가 넘는 현 상황에서 프렉시스의 소실은 남만혁에게 큰 타격이었다.
하지만 불행 속에는 늘 행운이 숨어 있는 법.
“오, 오오! 이 반응!”
“이곳이라면 더 큰 에너지를 얻을 수 있소!”
“오염되지 않은 다크메타라니!”
남만혁은 아직 넥서스에 남은 장인들이 허리춤에 달린 모종의 측정 장비를 보며 환호하기에 급히 리쳇에게 이유를 알아 오라 지시했다.
-싱크레아의 우주는 새것처럼 깨끗해서 항성 에너지 포집률이 글로리아의 수백 배래.
“그게 뭔 말이야.”
-프렉시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대체가 가능하다는 거지.
주먹을 불끈 쥔 남만혁은 자신이 보유한 로봇과 언데드를 최대한 동원해 항성과 가장 가까운 행성에 새로운 공장을 건설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한 장인의 제안이 있기 전까지는.
“그런 곳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에너지 낭비가 심합니다.”
“그러면?”
“초기 투자 비용이 많이 들긴 해도 일단 설치만 해두면 항성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기술이 있습니다.”
“그런 기술이야 나도 몇 개 알아. 문제는 중앙우주국이 경고를 하냐 안 하냐지.”
경고가 중첩돼 격리가 풀리면 모든 계획이 끝장이다.
남만혁이 이를 경고하자 장인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중앙우주국이 우려할 정도의 기술은 아닙니다.”
“그게 뭐지?”
“다이슨 스피어.”
그 유명한 걸 남만혁이 모를 리 없었다. 진작에 리쳇과 상의해봤으나 도저히 현실적인 효율이 나오지 않아 오래전에 접었었다.
“그거 보내고 고정시키는 에너지가 더 많이 들지 않아?”
“글로리아나 지구 차원이라면 맞는 말씀입니다만, 여기는 글로리아 대비 227배, 지구 대비 9배이니, 무조건 해야 합니다.”
남만혁은 몰랐으나 지금 직언한 장인은 일전, 그린의 오물로 터빈을 돌리자고 제안해 ‘최초의 아이디어 공모전 우승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던 인물이었다.
“리쳇, 네 생각은?”
-아무리 효율이 높아도 항성까지 보낼 에너지가 없으면 소용없잖아.
“그래서?”
-록시를 붙여줘.
“얼마든지.”
당사자가 없는 계획이 디테일하게 짜일 무렵, 기절한 록시가 전신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린다.
“으, 으으.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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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