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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179화 (179/201)

<179화>

크림슨래빗의 러브레터

쾅!

“저 빌어먹을 블루 새끼들이!”

“진, 진정하셔야 하옵니다. 아직 함 내입니다, 황제 폐하.”

함장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버릇처럼 손 걸이를 쳐대는 황제의 모습에 전전긍긍하며 만류하였다.

함교의 모든 선원이 긴장하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와중, 황제는 거친 숨을 길게 뱉으며 함장에게 물었다.

“원인이 무엇인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블루 놈들이 나타난 원인 말이다!”

“아무래도 전쟁을 너무 즐긴 탓이 아니겠습니까. 저 간악한 것들은 항상 저희를 주시하고 있으니 우리 항성계의 갑작스러운 호황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함장은 잔뜩 겁먹은 모습과는 달리 그린답게 직설적으로 간언했고 황제 역시 그의 태도를 트집 잡진 않았다.

“스루파 함장. 자네, 어제까지만 해도 신병기를 검증할 수 있는, 둘도 없는 무대라며 좋아하지 않았나.”

“그렇긴 합니다만, 블루의 함대가 움직였다는 정보에 즉시 적을 격멸해야 한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속으로 혀를 찬 황제는 간이 옥좌에 등을 기대며 명했다.

“전 함, 복귀한다.”

황제는 베르데 행성으로 돌아가 블루의 난입을 톡톡히 따질 생각이었다.

멀어지는 프렉시스를 바라보던 황제는 작게 중얼거렸다.

“재밌게 놀고 있었는데, 이 눈치 없는 블루 새끼들!”

* * *

행성 아줄의 숲의 성.

“그린의 사절이 성문에 도착했습니다.”

“성 밖에 3일 성안에 7일.”

고민조차 하지 않고 그린의 사절을 뺑뺑이 돌리는 아줄의 왕.

“그리하겠습니다.”

열흘 뒤, 잔뜩 흥분한 그린의 외교관이 쿵쿵대는 발걸음으로 대전을 울리며 들어오자 아줄의 대신들이 호통을 친다.

“못 배워먹은 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그따위 태도를 보이느냐!”

“너희 그린은 기본 예절도 교육받지 못하였는가!”

시끄럽게 떠드는 아줄의 대신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왕이 앉은 옥좌 바로 아래 계단까지 올라선 사절.

“저, 저 무례한! 컥!”

“뭣들 하느냐, 당장 끌어내려라! 흡?”

“내 이를 반드시 베르데의 왕께 따질 것, 헉!”

아줄로 향해야 하는 베르데 사절의 자격은 ‘무력 서열 10위 이내의 강자일 것’이다.

아줄의 진영에서 포위 공격을 당하더라도 도망칠 무력을 가진 자만이 사절로 발탁되며, 베르데 종은 이를 황제 자리 다음의 영광으로 여긴다.

열흘이나 시간을 낭비해 근손실이 온 베르데 사절은 쌓아둔 분노를 기세에 담아 단번에 터트렸고 그로 인해 대전에 서 있던 아줄의 신하 대부분이 휘청였다.

“당, 당장 기운을 거둬라!”

“큭, 네 이놈! 해보자는 게냐!”

“끄윽….”

대부분 내정을 담당하는 이들이라고는 하나 최소한의 무력을 갖춰야 궁에 입성이 가능한 만큼, 지금 보이는 신하의 추태는 아줄의 왕에겐 치욕이었다.

“우리는 베르데의 전쟁에 도움을 줬거늘 어찌하여 그대는 이리 행패를 부리는가.”

“잘 놀고 있는데, 왜 끼어드나. 눈치 없이.”

서로의 격식을 차리지 않는 원수지간이라고는 하나, 그간 왕에 대한 예를 갖추는 것만큼은 암묵적으로 지켜왔기에 대전에 흉흉한 마나가 휘몰아쳤다.

“뭐라?”

왕실 호위대와 신하들이 순식간에 살상용 주문을 캐스팅해 사절을 조준하는 때에.

“—라고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피해 보상을 요구합니다.”

아줄의 왕은 당당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절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호의를 그렇게 여겼다니 유감일세. 원하는 게 무엇인가?”

“폐하!”

“베르데의 왕은 욕심이 많은 자라 한 번 들어주면 계속 요구할 것입니다.”

“다시 고려하심이 어떨는지요.”

대신들의 입을 팔을 휘젓는 것으로 막은 아줄의 왕은 계단 아래의 베르데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괜찮네. 그 인간의 머리에서 정보를 캐내는 게 느려질 뿐이야. 어쩌면 누군가의 실수로 잘못된 정보가 전달될지도 모르지.”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베르데의 사절.

아줄의 왕이 말하는 ‘그 인간’이 투기장에서 황제와 맞붙었던 자라는 걸 떠올린 것이다.

일반인 신분을 위장해 사적으로 마탑에 맡겼음에도 왕의 귀에 들어갔다는 건, 중대한 정보가 뽑혀 마탑이 보고를 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베르데의 사절은 고민 끝에 벌레를 씹은 표정으로 계단에서 내려와 예를 표했다.

“베르데의 사절, 카시오프가 아줄의 왕께 인사드립니다.”

“흐음.”

그러나 사절의 예상과는 달리 아줄의 왕은 마탑에서 인간의 머리를 연구 중이라는 보고만 들었을 뿐, 그 외의 어떤 정보도 전달받지 못했다.

실제로 그랜드 위저드 매저드가 교장에게 심어둔 특별한 마나를 뚫지 못한 마탑의 마법사들이 애가 타는 중이다.

“부디 저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황제가 그 인간의 머릿속을 얼마나 궁금해하는지 아는 사절이었기에 굴욕을 감내하고 머리를 숙였다.

“용서하겠네. 짐도 본의는 아니라고 하나 그대들의 행사에 간섭하고 말았으니 이 부분은 보상하지.”

그렇게 베르데의 사절은 아줄의 왕으로부터 실수의 인정과 작은 보상을 얻었고, 아줄은 마탑에 맡겨진 인간의 머리가 저 자존심 강한 베르데의 머리를 숙이게 할 정도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사절이 떠난 뒤, 대전에서 오늘 벌어진 사절과의 협상을 복기하던 아줄의 왕이 짧게 읊조렸다.

“재밌어지겠군.”

전쟁 부흥.

그것은 베르데만의 특권이 아니었다.

* * *

2065년, 4월. 지구.

“할배!”

빽 소리를 지르며 공방에서 튀어나오는 크림슨래빗의 모습에 머신팩토리는 기침을 하며 답했다.

“쿨럭, 또 왜 그러느냐.”

“밀키 마이닝이 뿌렸던 의뢰 말야. 완성했어.”

밀키 마이닝은 그블린과의 우주전을 대비한 히어로 슈트 제작을 위해 지구의 명망 높은 장인들에게 의뢰를 넣었다.

“완성은 누구나 하지, 이 녀석아.”

“품질도 지금까지 내가 만든 슈트 중 최고야.”

“허허.”

14년 전, 남만혁 후배의 소개로 찾아온 불청객. 크림슨래빗.

첫 만남이야 어쨌건, 이젠 머신팩토리에게 그녀는 가족처럼 소중한 존재였다.

“또 그렇게 웃는다. 내가 인생 다 산 사람처럼 굴지 말랬잖아.”

“알았으니 가져오너라. 내가 네 러브레터를 한번 봐야겠다.”

“뭐가 러브레터야!”

“이번에도 실수인 척하고 만혁이 고 녀석에게 보낼 거 아니냐.”

세간에 알려진 대로 그레이스 멜론과 남만혁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크림슨래빗이었으나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았다.

“뭐, 그게 어때서. 자.”

머신팩토리는 그녀의 뻔뻔함에 둘이 닮긴 닮았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가져온 우주용 히어로 코스튬을 살폈다.

말캉.

“그게 싱크레아 산 소재냐?”

“맞아. 초록숨결이라는 건데, 우주에서도 광합성을 해서 인간이 내쉬는 이산화탄소를 공기로 바꿔줘.”

“산소 비율은?”

“지구와 동일. 내가 그런 기본적인 걸 놓쳤을까 봐? 할배, 나 크림슨래빗이야.”

자신의 과거를 보는 듯한 그녀의 당당함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머신팩토리는 코스튬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토타입으론 괜찮다는 평을 받을 게다.”

“완성품이 아니라는 거야?”

“잘 듣거라. 만혁이가 준비하는 일은 한낱 빌런을 상대하기 위함이 아니다.”

죽을 날을 받아둔 이에겐 때때로 인과를 관통한 통찰력이 깃들기도 하는데, 바로 지금의 머신팩토리가 그러했다.

“그러면?”

“모르지.”

“그게 뭐야.”

“아무튼 네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적을 상정하고 다시 만들 거라.”

‘창작자는 늘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정보의 양을 늘려야 한다!’라는 머신팩토리의 충고에 따라 온갖 영화와 만화를 독파한 크림슨래빗이 최근 본 SF 물을 떠올렸다.

“음, 우주 괴물?”

“그것도 괜찮겠어.”

“에휴, 알았어. 다시 만들어 올게.”

“이건 퀸에게 주면 좋아하겠어.”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히어로는 아직까진 그녀가 유일하다.

“응, 퀸 생각하면서 만든 거야.”

남만혁을 좋아하는 크림슨래빗이었기에 퀸을 질투할 만도 하건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이 늘 의아했던 머신팩토리가 넌지시 물었다.

“그래도 괜찮으냐?”

“뭐가, 퀸? 상관없어. 우리나라는 한 사람이 여러 명이랑 결혼할 수 있으니까, 내 매력을 가꿀 뿐이야.”

“그래도 너만을 봐주는 남자가 좋지.”

“할배가 할 말은 아니지.”

“나는 상황이 다르잖냐.”

젊은 시절에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머신팩토리는 재각성 후, 세 명의 여성을 부인으로 들였다.

“사랑은 무한할 수 있다는 걸 할배를 보고 확신했는데?”

“…끙, 내가 잘 못 했다.”

“킥킥, 그러게 왜 남의 사랑에 참견이셔.”

* * *

몇 달 후.

“택배요!”

“예.”

“이거 같이—”

“두고 가쇼.”

시리얼로 아침을 때우던 남만혁은 느긋하게 먹은 뒤 설거지까지 하고 나서야 어제 주문한 윙봉을 챙기기 위해 컨테이너 문을 열었다.

“헉, 헉. 에이 씨. 별 재수가 없으려니까.”

끙끙대며 5톤 트럭에서 물건을 내린 택배맨은 러닝 차림의 남만혁이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나오자 욕을 퍼부은 뒤 트럭을 타고 떠났다.

“아니, 큰 거라고 말을 하지.”

냉동 윙봉을 5톤 치 산 적은 없으니 이건 다른 곳에서 온 택배라 여긴 남만혁이 상자에 붙어 있는 보낸 이의 주소를 훑었다.

“미국, 크림슨래빗. …아! 그걸 벌써 만들었어? 이야, 역시 천재는 천재네.”

완충재가 가득 들어간 택배 상자를 열자 안에는 실물 크기의 입간판 5개가 들어 있었고, 꺼내서 세우니.

“의뢰비 올려달라는 시윈가.”

각종 모델 포즈를 취하는 크림슨래빗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이를 한참 살피던 남만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결론을 내렸다.

“신작 샘플인가 보네. 흠, 그렇게 보니 괜찮은데?”

남만혁은 이 입간판을 다양한 곳에서 활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본 품의 포장을 뜯었다.

“오.”

말이 우주용 히어로 슈트지 사실상 탑승용 로봇이나 다름없는 외관에 남만혁을 크게 만족했다.

[제작에 필요한 소재]

[다이슨 스피어 에너지 6분.]

[알토그리움 x 65kg]

[초록숨결 x 310kg]

[날쇠 x 1.5t]

[크림슨래빗 ♡ 로맨]

제작에 필요한 소재 목록을 쭉 훑어 내리다 마지막 문장을 본 남만혁은 황급히 주변을 살펴 그레이스 멜론이 없음을 확인하고 안도하며 목록을 치웠다.

무슨 의뢰를 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어필해오는 크림슨래빗에 익숙해져버린 남만혁이었다.

“여자가 이렇게 느끼하기도 쉽지 않은데.”

남만혁도 처음에는 그녀의 당돌한 호감 표시에 꽤 당황했으나 무슨 일이든 10년 넘게 겪으면 아무래도 무덤덤해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답장은 해야지.”

[제목 : 두 작품 다 좋네.]

[내용 : 퀸부터 뚫고 와라.]

띠링.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바로 크림슨래빗으로부터 답장이 도착한다.

[제목 : 알아.]

[내용 : 결혼식에서 나랑 퀸이 네 옆에 설 거야. 그렇게만 알아.]

남만혁은 크림슨래빗의 포부에 피식 웃고는 홀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다 끝나면 뭔들 못하겠냐. 아무튼 이걸로 히어로의 우주 진출 문제는 해결됐고. 남은 건 지구방위대의 정식 발족인가.”

이에 관해서 이미 리쳇과 계획을 짜둔 남만혁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뚜르.

뚝.

“이게 받지도 않고 끊어?”

뚜르르.

뚜르르르!

-바쁘다.

“진짜 바쁘게 해 줘?”

-…용건이 뭐지?

소환학파와 소환마탑의 주인이자 세계 영향력 6위에 랭크된 안토니오 골든우드가 퉁명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때가 왔다.”

-야, 이 XXX아! 지금 내가 얼마나 바쁜 줄 알면서! X새끼야!

귓전을 때리는 거친 욕에 남만혁은 되려 웃었다.

“그러게, 누가 탑주 하래? 네가 고른 길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 그럼.”

뚝.

받은 건 확실하게 돌려주는 남만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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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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