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블러드우드 님 (1)
“그만둬라!”
고속으로 가까워지는 적함의 모습에 안토니오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한다.
“크흐, 간만에 하려니 흥분되는구만.”
“멈추라니까!”
“소리 지르다 은폐 마법 풀리면 어쩌려고 그러냐. 나 같으면 마나 한 줌이라도 더 끌어모으겠다.”
“이, 이!”
남만혁이 조종하는 해적선은 폭탄을 가득 싣고 적함을 향해 아광속으로 돌진 중이다.
“테러의 꽃은 역시 폭발 아니겠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피나무.”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적함이 있음에도 조종대를 놓고 뒤를 돌아보며 웃는 남만혁.
“앞, 앞! 이 미친 새끼야아아!”
쾅—!
* * *
3주 전.
“거기, 형씨. 못 보던 얼굴인데.”
“어, 나도 너 처음 봐.”
“케케케, 이 인간 생긴 거랑 다르게 재밌네. 차림새를 보아하니 용감한 개그맨 나부랭이는 아닌 거 같고, 경찰이지? 좋은 말할 때 그냥 돌아가. 여기 뱃지 들이밀면 죽어.”
“뭔 헛소리야. 우리는 그런 허수아비들이 아니라고.”
“그럼?”
“바로 철의 바다를 핏빛으로 물든 블러드우드다!”
남만혁의 당당한 소개에 미간을 좁힌 레드플의 거지가 고개를 기울인다.
“블러드우드? 시골 항성계의 카르텔인가 본데, 살고 싶으면 나대지 마라.”
“하, 괘씸한 놈. 형님, 형님의 힘을 이 멍청한 거지 놈에게 보여주십시오!”
눈을 가늘게 뜨고 허리를 굽신거리며 자신에게 형님이라 해대는 남만혁의 행태에 안토니오는 자신이 이용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큼, 무슨 일이냐.”
“저기에 큰 거 한 방 터트려주시면, 사소한 오해는 해결될 듯합니다.”
“잠깐, 뭘 하려는 진 몰라도 저 건물은—”
거지가 깜짝 놀라 남만혁이 가리키는 방향의 손가락을 잡으려는 찰나.
쿠르릉, 쿵!
행성의 환경에 영향을 받아 붉은빛을 띠는 벼락이 건물을 수십 차례 강타한다.
굉음이 멈추었을 무렵, 6층 정도 되는 빌라의 외형은 마치 용암을 맺는 나무처럼 붉게 변해 쇳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제 알겠나? 비켜.”
“어, 어….”
어느새 몰려든 인파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안토니오가 말문을 열었다.
“생각이 있는 거 같아서 따랐다만, 계획이 뭐지?”
“명분을 쌓을만한 세력이 필요해.”
“명분?”
“그블린의 전장에 참여할 명분. 그보다 너, 은폐 마법 범위가 어느 정도냐.”
“두 명 정도는 문제없다.”
“도크에 저 소형선 보이지?”
“음.”
“다른 말 안 할게. 저거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수련하고 있어. 그동안 잡다한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스승님은 최선을 다해 너를 도우라고 했다. 수련은 지구에 돌아가서 해도 돼.”
“그러면 늦어. 이게 나를 돕는 거다. 아, 혹시 함선을 은폐할 자신이 없어서 핑계를 대는 거면 지금 말해.”
“큭. 나를 언제까지고 어린아이 취급하지 마라. 남만혁.”
“남자는 친구끼리 있을 땐 항상 어린 애야. 뭘 새삼스레. 시간은… 넉넉하게 3주면 되지?”
친구라는 단어에 움찔한 안토니오였으나 이어지는 그의 말에 다시 얼굴을 구겼다.
“은폐 마법의 마나 배열은 근본부터 다르다. 이걸 확장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해. 특히 스승님의 깨달음이 녹아 있는 부분은 해석 작업도 병행해야 되고—”
“아이, 잘난 수제자 양반께서 주둥이가 왜 이렇게 길어. 그래서 할 수 있어, 없어.”
남만혁이 한심한 눈으로 답을 종용하자 안토니오의 심중에 자리한 자존심이 대답을 차올렸다.
“…당연히 할 수 있다.”
“좋아, 믿는다.”
이후 광장에 위치한 숙소, 구름도살자의 냉동고에 도착한 두 사람은 짐을 풀었다.
“프런트 직원이 너를 아는 눈치던데. 와 본 적 있나?”
“아니, 사진이랑 이름을 미리 보내놨지. 현지에서 직접 예약하면 호구 당하잖아.”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보냈냐는 말을 하려던 안토니오는 급히 나갈 채비를 하는 남만혁의 모습에 그의 팔을 잡았다.
“어디 가나?”
“요 앞에, 잠깐 선동 좀 하러.”
“뭐?”
“음식을 배달시켜놨으니까 오는 거 대충 챙겨 먹고 있어. 금방 올게.”
어쩐지 신나 보이는 남만혁의 언사에 안토니오가 그의 팔을 놓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은가 보군.”
“뭐, 옛날 생각도 나고. 아무튼 수련 빡세게 해둬라. 네 숙련도에 따라 작전 성패는 물론이고 우리 생사가 갈리니까.”
쿵.
안토니오는 호텔의 창을 열어 남만혁의 뒤를 눈으로 좇았다.
그는 선언대로 광장으로 가 이상한 말을 지껄였다.
“왜 우리가 탄압되어야 하는가! 배가 고파 작은 빵 조각을 훔쳤고 놈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아 주먹을 휘둘렀으며 사망자가 발생한 사고 역시 본의는 아니었다!”
레드플은 범죄자들이 모이는 소굴이었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이들 역시 한둘이 아니었기에 행인들은 남만혁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러나 어디를 가던 이런 헛소리를 진심으로 듣는 이가 한 명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
“내 이야기잖아. 가족들이 죽어가는 걸 보느니 도둑놈이 되자는 생각으로 빵집을 털긴 했지.”
그가 턴 빵집은 대형 빵 공장의 창고였다.
“나도 비슷한 상황이긴 해. 주점 주인의 딸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성폭행범이 됐으니까.”
손만 잡은 정도가 아니었다.
“나만큼 억울한 사람이 있겠어? 복싱 챔피언이랑 정정당당하게 맞짱 떠서 이겼는데 정신 차려보니 내가 살인자로 법정에 서 있더라. 참 나.”
그는 챔피언을 상대로 레이저 건을 썼다.
이처럼 자기 긍정을 위해 합리화를 한 범죄자들이 남만혁의 발언에 동조하고 나서자 몇몇 행인이 발걸음을 멈춘다.
“우리도 사람이라는 것을 저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우스꽝스러운 옷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얼굴, 유려한 말투.
행인 하나가 툭 던졌다.
“듣지 마, 사기꾼이다.”
“우릴 이용할 셈이겠지.”
“쯧, 시간만 버렸어.”
그렇다. 남만혁의 말에 동조하는 것과는 별개로 레드플에 이런 선동가들이 흔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 치울까? 귀찮아지기 전에.”
“전에 반반으로 나뉘어서 서로 싸운 거 생각하면, 그게 맞는 거 같다.”
“또 손을 잃을 순 없지. 죽여!”
휘릭, 휙.
냉병기와 총을 비롯한 각종 살상용 무기와 마법이 남만혁에게 겨누어진다.
그러나 남만혁은 그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치다 입을 열었다.
“저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저에겐 여러분을 탄압에서 벗어나게 할 힘이 있습니다.”
“증명할 수 있나?”
“블러드우드 님! 벼락을!”
하늘을 보며 외치는 남만혁의 모습에 안토니오는 속으로 욕지기를 하며 주문을 읊었다.
콰르릉!
광장 중앙에 내려꽂히는 붉은 벼락에 사람들은 매우 놀라며 남만혁을 돌아본다.
“저, 저건 카샤크 님을 죽인 그 번개다.”
“카샤크가 죽었어? 왜?”
“저자가 외친 블러드우드라는 괴물이 그냥 기분 나쁘다면서 건물 채로 태웠다던데?”
꿀꺽.
카샤크는 레드플을 지배하는 4대 세력 중, 그로기라는 곳의 수장이다.
해가 떠 있을 땐 신체가 약해져 바깥 활동을 자제한다는 정보를 리쳇을 통해 입수한 남만혁이 선수를 친 것이다.
“진짠가?”
“센 놈 하나 붙어 있다고 저 말을 믿냐.”
“저런 뒷배가 있는데 여기서 사기 쳐서 뭐 하게. 하다못해 용병 길드에 이름만 올려놔도 서로 모셔가려고 난릴걸?”
“그건, 그렇지.”
남만혁은 어느 정도 분위기가 조성되자 무언가 말할 것처럼 입을 꿈틀거린 뒤에 벤치 위에서 내려왔다.
“계속해!”
누군가 행인들의 마음을 대변해 외치자.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분이 불러서요.”
그렇게 자리를 뜬 남만혁은 구석진 골목을 돌며 미행을 따돌린 뒤에 호텔로 돌아왔다.
옷을 털고 방문을 열자 안토니오가 쏘아붙이듯 물었다.
“왜 중요할 때 그만뒀지?”
“어우, 놀래라 인마. 너 훈련 안 해?”
“대답부터 해라.”
한숨을 내쉰 남만혁이 옷을 갈아입으며 이유를 입에 담았다.
“이런 건 한 번에 밀어붙이면 안 돼. 사상은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서서히 물들여야 오래가거든.”
“해본 것처럼 말하는군.”
“글쎄.”
모호하게 답하는 남만혁에게 눈총을 쏘던 안토니오는 이내 추궁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요구한 은폐 마법 수련에 집중했다.
‘알아봤자 나만 피곤하겠지.’
애써 의문을 떨쳐내는 안토니오였다.
* * *
15일.
남만혁이 레드플의 4대 세력을 통합하고 ‘억압을 부수고 우리의 권리를 되찾자.’라는 말 같지도 않은 주장을 행성 전역에 퍼트리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설득된 범죄자의 수는 전체 인구에 비하면 좁쌀만 한 수준이었으나 이는 다음 계획에 필요한 머릿수를 충족하고도 남았기에 남만혁은 작전을 앞당겼다.
“용병단을 만들고 와라?”
“어. 용병단 이름은 블러드우드, 규모는 소형함 33대, 특기는 호위 또는 퇴각 시 후방 안전 확보. 다른 건 네 마음대로 적어.”
안토니오는 남만혁의 요구에 인상을 구기면서 일어났다.
“스승님께서 너를 지원하라는 말 때문에 돕는 것이다.”
“알았으니까, 빨리 가라. 사춘기도 아니고 뭐 시킬 때마다 이렇게 떽떽 댈 거냐.”
“…빌어먹을 놈.”
남만혁의 비난에 손을 부르르 떨며 호텔을 나온 안토니오는 그가 알려준 용병 길드로 가 등록 수속을 마쳤다.
얼마 후, 용병 길드 회의실.
“블러드우드가 움직였다지?”
“예, 길드장님. 역시 이곳 주민들을 선원으로 데려가려는 모양입니다.”
“흥, 그 선동가를 앞세운 놈의 얼굴을 내가 봤어야 했는데.”
“카운터의 요릉 양이 영상을 찍어 뒀는데 보여드릴까요?”
“역시 부길드장이야. 일을 잘해.”
“크릉크릉, 고맙습니다.”
녹화된 영상을 재생하자 두 사람은 동시에 눈가를 좁혔다.
“왜 이렇게 흔들리나?”
“아마 요릉 양이 사슴 종이다 보니 겁이 많아 손을 떤 탓 아니겠습니까.”
“그럴 리가. 지금은 부상 때문에 카운터를 본다지만, 요릉은 한때 최전선에서 활약한 전사. 겁 같은 걸 먹는 녀석이 아니야.”
“그, 사실 요릉 양이 시인했습니다. 본인이 지려서 먼저 퇴근하겠다고요.”
“…그렇게 무서운 인상은 아닌데.”
“듣기론 그를 둘러싼 마나가 살벌했다고 합니다. 당장이라도 누굴 죽일 것처럼요. 사슴 종이 얼마나 마나에 민감한지 아시잖습니까.”
“그 민감함 덕에 여러 번 살긴 했지. 흠, 완전 사기꾼은 아니라는 건가. …부길드장.”
머리를 쓸어 넘기던 원숭이 수인은 부길드장에게 메일을 보냈다.
“‘바살트로스 토벌’ 의뢰 확인했습니다. 전달할까요?”
“그래, 시험해보고 괜찮으면 전장에 던져 놓자고.”
“알겠습니다.”
* * *
오늘도 광장에서 떠들던 중, 행인 하나가 용병 길드에서 나를 부른다기에 느긋하게 할 거 다 하고 이동했다.
“늦었…군.”
부길드장이라는 도마뱀 인간이 찢어진 눈깔로 나와 아무것도 없는 내 뒤를 훑어보더니 어째서인지 안도하며 레드풀 전용망을 이용해 메일을 보내왔다.
[의뢰 명 : 바살트로스 토벌]
[내용 : —좌표를 떠도는 괴수, 바살트로스를 사냥하고 그 증거인 머리를 인양해 올 것.]
[보수 : 90만 크레딧]
“실력을 증명해라. 블러드우드.”
그 말을 듣고 출항한 지 2시간 만에 나는 바살트로스를 사냥하고 그 목을 잘라 레드플로 돌아왔다.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용병 길드의 앞마당에 건물보다 큰 바살트로스의 목을 떨어트리며 착륙하자 부길드장이 무기를 든 채 뛰어나온다.
“너였나. 빠르군.”
피를 뿌리며 굴러가는 바살트로스의 목을 보곤 무기의 손잡이를 꽉 쥐는 부길드장.
“다음 의뢰 내놔.”
“사실 여부를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다. 대기하고 있도록.”
“우리 형님이 한 번 피를 보면 살육을 멈추질 않아서 말야. 이대로 방치하면 그쪽도 위험할걸?”
요릉이 찍은 영상 속의 남자를 떠올린 부길드장은 꼬리를 말아 올리며 답했다.
“…내일 정오까진 메일을 보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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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