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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185화 (185/201)

<185화>

블러드우드 님 (2)

바살트로스라는 괴물을 처리한 뒤로 우리는 용병계의 뜨거운 감자인 그블린전에 곧장 투입되었다.

“진영을 선택할 자격이 있는데도 베르데로 가겠다는 이유가 뭐지?”

부길드장은 우리가 베르데에 붙겠다고 하자 의아해하며 물었다.

“거기에 자유가 있으니까.”

죄지은 놈이 사회제도에 의해 한번 압박당하고 나면 자유를 갈망하기 마련이다.

그게 사기꾼의 허언이라도 믿고 싶어지는 것이 지성체의 심리 아니겠는가. 그래서 계속 밀어붙이고 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 들고 있던 의뢰서를 내게 건네는 부길드장.

“다른 곳에서 묻거든 차라리 돈을 많이 줘서 그렇다고 해라.”

그의 말처럼. 그린에서 제시한 금액은 블루의 20배에 달한다.

이는 우주전에서 부족한 전투력을 외부에서 수혈받기 위함인데, 사실상 자기들의 유효사격 거리까지 접근하는 동안 고기 방패 노릇을 하라는 뜻이다.

그린의 함대 사거리는 블루의 7할 정도라 기습만 안 당하면 우주는 블루가 고전할 이유가 없는 전장이다.

그린은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용병에게 돈을 뿌려대는 거고.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야.”

씩 웃고 길드에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안토니오가 얼굴을 오만상 구긴 채 입을 열었다.

“이 짓. 언제까지 해야 하지?”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이 녀석은 대부분의 시간을 은폐 마법 수련에 투자했다.

그런데도 아직 2인승 함선 하나 은폐시키지 못하고 있다.

한심함과 애잔함을 담아 녀석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네가 성공할 때까지.”

“네 요구가 상식 밖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겠군.”

“할 수 있다고 말한 입이 누구 입이더라?”

“큭!”

나이 좀 먹고 무게 잡아봐야 금나무가 금나무지. 근본적인 성격은 여전하다.

자존심 살살 건드리면 눈에 핏발 세우고 몰두하는 거 말이다.

코트 자락이 펄럭일 정도로 강하게 몸을 돌려 숙소로 돌아가는 안토니오.

‘조만간 성공하겠어.’

이건 아카데미 시절에도 많이 겪어본 패턴이다. 저러고 나면 다음 주 강의에는 반드시 내게 한 방 먹일 마법을 준비해오곤 했으니까.

“야, 스승님이 지켜보신다고 생각해.”

“시끄럽다!”

* * *

“블러드우드 길드가 베르데에 붙었다는데? 전에 광장에서 동조하던 애들도 전부 같이 출진한다고 그러더라.”

“누구 배로?”

“블러드우드에서 한 대씩 뽑아줬대. 총 33대였나.”

“33대? 모인 애들 200명 넘지 않아?”

“20인승 모델이니까 충분하지.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아줄이 우세한 전장인데 베르데에 합류했다는 거지.”

“이유는 뭐래?”

“자유와 돈. 블러드우드가 이번 전쟁이 끝나면 새 신분과 막대한 돈을 주기로 약속했어.”

“그 피에 미친 놈이 그렇게 부자였나?”

블러드우드는 피만 보면 눈을 뒤집고 사람을 죽여대는 살인광이라고 소문이 난 상태다.

물론, 남만혁과 리쳇이 퍼트린 소문이다.

“상위 차원의 바살트로스를 2시간 만에 토벌하는 실력이니까, 자기네 차원에선 잘나갔겠지.”

“씁, 그러면 어느 정도 안전은 보장된다는 거네. 나도 블러드우드 용병단에 가입해볼까?”

“몸 사리기로 유명한 네가?”

“이번에는 느낌이 와.”

“무슨 느낌?”

“자유.”

자유는 최근 2주 동안 레드플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다.

“야, 네가 그거 선동이라며.”

“그렇긴 한데, 며칠 생각해보니까 아예 틀린 말은 아니더라고. 나는 간다. 너도 잘 생각해봐.”

남자는 그대로 의자를 박차고 길드로 향해 블러드우드 용병단에 가입했고, 이와 유사한 일이 레드플 전역에서 벌어졌다.

그렇게 모인 용병단 입단 희망자들은 1천 명을 웃돌았고, 이는 남만혁의 예상을 넘는 숫자였다.

“지출이 꽤 크겠어.”

리쳇의 보고에 짧게 감상을 표한 그는 그 자리에서 소형함을 다수 구매하고 그들을 모조리 태워 우주로 나왔다.

의뢰서에 적힌 포인트에서 베르데의 군인과 조우한 남만혁은 의뢰주와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요구사항은 전면 수용했다.

“단순한 새끼들. 어떻게 예상이 빗나가질 않냐.”

베르데의 요구는 몹시 단순했는데, ‘아줄의 전방 부대를 습격해 동요시킬 것’이 전부였다.

남만혁은 이를 적당히 포장해 단원들에게 알렸다.

“쩐주께서 블루 정찰만 하고 오랍신다.”

으….

침울해하는 선원들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남만혁.

지상에서도 정찰이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이나 우주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군이 레이더로 확인하는 순간 저쪽에서 레이저가 빛의 속도로 날아온다.

심지어 데이터를 전송하는 경로를 실시간으로 추적해 광선이 궤도를 틀기도 한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저들의 포격이 전부 마법에 기원하기 때문이다.

“걱정 마라. 내가 앞장선다. 너희는 따라만 와.”

으음.

여차하면 미끼로 내주고 도망쳐도 된다는 남만혁의 발언에도 크게 반기는 기색이 없는 선원들.

남만혁은 화면에 떠 있는 각 함의 범죄자들과 눈을 마주치다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 함선 하나만 나포해도 우리 전부 대대손손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오오.

“한탕 하러 가자, 새끼들아!”

와아아!

* * *

“황제시여, 레드플에서 고용한 용병들이 예상보다 실력이 좋아 해당 전장에서는 아군의 승리가 점쳐진다고 하옵니다.”

“그런가.”

“블러드우드라는 약 3주 전에 창설된 신생 용병단입니다. 특히 대장기로 보이는 소형선이 블루 놈들의 선봉을 농락하고 있습니다.”

블루라는 단어를 듣고 나서야 시선을 신하에게로 옮긴 황제가 계속해보라는 듯 턱짓하자.

“목격한 이들은 하나같이 ‘블루의 공격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피한다’라고 합니다. 실력이 출중한 듯하니 포상을 내리셔서 아군의 사기를 올리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상벌의 본보기로 삼아 널리 퍼트리는 것은 황제 역시 즐기는 기초 계책 중 하나였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하라.”

* * *

-부단장, 그린 놈들이 수송선을 보낸다는데?

한참 격전을 치르다 쉬는 와중, 통신으로 들려오는 걸걸한 음성.

“올 때가 되긴 했지. 네가 가서 받아와.”

-내가?

전직 해적이자 용병단에서 유일하게 자기 함선을 가지고 나온 녀석이다.

놈에게는 허울뿐인 1번 대 대장 자리를 줬었다.

“보여주기식으로 보급품 좀 던져주고 갈 거다. 적당히 해 먹고 단원들에게 골고루 뿌려.”

-아암, 생색은 내 전문이지! 맡겨주쇼! 부단장!

시루떡 만지는 데 콩고물 안 묻겠나. 해적이 용병 됐다고 버릇이 어디 간 것도 아닐 테니, 적당히 쥐여주는 게 덜 시끄럽다.

“슬슬 되어야 하지 않나.”

내가 일부러 크게 혼잣말을 하며 옆을 돌아보자 안토니오가 내 눈을 피한다.

“무슨 고장 난 전구도 아니고. 깜빡, 깜빡.”

작전에 투입되기 직전, 안토니오는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내게 오더니 자신 있게 말했다.

“‘다시는 나와 내 마법을 무시하지 마라!’였던가? 이야. 대단하네.”

“큭, 그건!”

그리고 막 블루의 전함 사이로 침투하자마자 풀렸다.

놀란 리쳇이 이 악물고 회피 기동을 해 간신히 살아나왔다.

이게 또 신묘한 것이 아무리 리쳇이 운용한다 해도 수많은 블루의 함선을 뚫고 나올 수는 없는 상황이었는데,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은폐 마법이 발동됐다 꺼지길 반복하더라.

그 덕에 블러드우드 단원들은 우리를 거의 신처럼 떠받들고 있다.

“어이쿠, 이거 겁나서 말을 못 하겠네. 또 적진 한복판에서 마법 풀릴까 봐.”

“이…!”

“내일 오늘이랑 똑같은 시간에 또 간다.”

“뭐?”

“블루는 오늘과 같은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훨씬 더 촘촘하게 진영을 바꿨겠지?”

“그런데 거길 왜 또 간다는 거냐!”

“그래야 낚이니까. 너는 그렇게 알고 준비해.”

“미친놈!”

* * *

“폐하, 신을 보내주십시오.”

“마르스 장군.”

일군을 다스려야 할 장군이 직접 전장에 서고 싶다는 말에 황제는 미간을 좁혔다.

“이곳을 제외한 모든 전선이 아군에게 불리한 상황입니다. 이 활로를 제가 뚫어 보이겠습니다. …무엇보다 제 피가 끓고 있습니다. 폐하.”

일개 병사로 시작해 장군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올록 마르스.

“허한다. 반드시 명예롭게 생환하도록.”

“예!”

장군이 떠나고 얼마 후.

통신을 담당하는 신하가 사색이 된 채 대전으로 들어와 들은 바를 황제에게 알렸다.

“마르스 장군이, 전사하셨습니다.”

“무어라?”

“용병단이 길을 열고 그 뒤를 따랐으나 어느샌가 용병단이 사라졌고, 장군님은 블루 놈들의 표적이 되어—”

쾅!

“당장 그 용병단 놈들을 소환하라!”

황제가 손걸이를 때려 부수며 고함치자 신하는 부복하며 보고를 이었다.

“현재 놈들의 위치가 오리무중이라…. 송구하옵니다. 폐하.”

핏발선 눈으로 신하를 쏘아보던 황제는 분을 참지 못하고 일어나 옥좌를 박살을 내버린 뒤에야 말문을 열었다.

“두말하지 않겠다. 찾아라. 이 몸이 직접 응징할 것이다.”

냉정하고 차가운 목소리. 황제의 급격한 온도 변화에 신하는 뒷목을 치고 오르는 오한을 느끼며 답했다.

“예, 예. 폐하.”

* * *

-황제 출진.

“걸렸다.”

“뭐가 또.”

뚱한 표정의 안토니오가 묻는다.

어휴, 사내자식이. 구박 좀 들었다고 애처럼 왜 저러냐 진짜.

장군이 데려온 함대를 블루의 선봉과 붙여 소모전을 유도할 계획이었는데, 이번에는 은폐 마법이 아예 풀리지 않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

미리 이럴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단원들은 싹 토꼈고 우릴 앞세웠던 그린의 장군은 블루의 포격을 몸소 받아내어 우주의 먼지가 되었다.

“그린의 황제가 출진했다.”

리쳇의 정보망을 통해 우리 위치를 뿌렸으니 오늘내일 중으로 올 거 같긴 했다.

근데 황제가 직접 나설 줄이야.

안토니오의 표정이 또 굳는다. 지가 실수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야, 오히려 잘 된 거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라.”

“최악이군.”

“뭐가.”

“네놈에게 위로받다니.”

썩어들어가는 안토니오의 얼굴. 낄낄 웃은 나는 녀석의 등을 치며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해. 이번만 성공하면, 이전의 실수는 스승님께 말 안 할게.”

“…흥.”

콧방귀를 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안토니오.

하여간 이 녀석은 예나 지금이나 스승님을 팔면 다루기가 참 쉽다.

-황제 도착까지 1분 30초.

“오케이, 큼.”

나는 단원들이 들을 수 있는 블러드우드 전용 채널 통신기에 대고 말했다.

“지금부터 나는 그린의 황제를 친다.”

화면에 비치던 해적들이 모든 동작을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너희는 그 혼란 중에 블루든 그린이든 전함을 훔쳐라.”

채널은 삽시간에 단원들의 목소리로 시끄러워졌고, 내가 손을 젓고 일전에 보급품을 받아왔던 해적을 가리키자.

“저, 저요?”

“궁금한 거 물어.”

“아, 그…. 저희는 같이 안 가도 되는 거죠?”

“그래. 그런데 너희가 탄 함선에는 전부 자폭 기능이 달려 있다. 내가 이 스위치를 누르면 터지는 아주 단순한 구조지.”

“…….”

“뭐, 걱정하지 마라. 의리 없게 그린에 정보를 제공한다던가 이대로 내빼지만 않으면 내가 이걸 누를 일은 없다.”

움찔하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다. 저지르고 내빼기 좋아하는 범죄자 기질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광경이라 하겠다.

‘쓰레기들.’

“정말입니까? 저희는 나포만 하면 된다고요?”

“한 대만 끌고 레드플로 가라. 거기에 내가 고용해둔 해체업자가 있으니 도움을 받아서 부품별로 팔면 걸릴 일도 없을 거다.”

“단장님이랑 부단장은요.”

“우리는 처음부터 황제를 만나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상.”

전직 해적이 마이크를 놓고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통신 채널을 끄려는 찰나.

“그럼 네가 약속한 우리 자유는!”

누군가의 외침. 나는 내려놓던 통신기를 다시 잡았다.

“너는 이미 자유롭다. 만약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너 자신에게 물어라.”

“그게 무슨—”

뚝.

저들과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이유가 없다.

-그린의 모선 접근 중.

자, 드디어 이번 작전의 피날레를 화려하게 장식할 순간이 왔다.

준비도 완벽하다.

“후우, 후웁. 할 수 있다. 해낸다.”

…내 뒤에서 불안하게 중얼거리는 저 피나무 자식만 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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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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