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블루라인
-차원 전이 확인.
-블루라인으로 식별됨, 적함 점프 중.
-전 함, C-19 포인트로 이동. 발키리, 입자분해파동포 차징.
각 함에 울려 퍼지는 리쳇의 음성. 적이 어디로 올지 몰라 지구를 중심으로 전 방향에 흩어 놨던 전함들이 C-19, 달 앞으로 집결한다.
“후우, 괜히 왔나.”
“차압! 차핫!”
“호요요욧!”
잠중함 1호에 탑승하고 있는 히어로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긴장을 풀고 있었는데, 거기엔 기간트의 마가렛도 함께였다.
“마가렛 예프소비치 님?”
제자리에서 스트레칭을 하는 마가렛에게 안전모를 쓴 엔지니어가 홀로보드를 들고 다가간다.
“예.”
거구의 여성이 돌아보자 움찔한 엔지니어는 어색하게 웃으며 홀로 보드 화면을 그녀에게 보인다.
“콕핏 조율 끝났습니다. 탑승해보시겠습니까?”
“그러죠.”
기간트를 상징하는 화산과 주먹 로고가 박힌 우주전용 히어로 코스튬에 올라탄 마가렛은 기존보다 두 배 이상 확장된 콕핏에 크게 만족했다.
-프레임 분리 결합 기능도 추가해뒀으니 거대화를 해도 문제없습니다.
“리쳇? 오랜만이야.”
-저는 매일 뵙습니다.
“너야 그렇겠지. …우리 언제 출격해?”
긴장이 묻은 마가렛의 목소리에 리쳇은 담담하게 현 상황을 알렸다.
-지금의 아군의 주포 공격으로 적의 척후로 예상되는 1파 대부분을 처리했으나 곧 2파가 도착할 겁니다.
리쳇은 마가렛이 탑승한 유닛의 모니터에 바깥 상황을 띄웠다.
블루라인을 따라 폭발하는 무수한 적함들.
“와, 이 정도로 압도적이면 히어로는 필요 없는 거 아냐?”
-우리 차원 법칙에 적응할 틈을 주지 않고 기습을 해서 한동안은 유리하겠으나 3파, 4파부터는 적의 대응이 달라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때부터 우리가 필요한 거구나.”
-그렇습니다.
“저건 블루 같은데, 그린은 없는 거지?”
-농장주의 공작 덕에 당장은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그 농장주 말인데, 지금 어딨어?”
-싱크레아에서 다른 작전을 수행 중입니다.
“흐음, 그렇다면야.”
-농장주의 행방은 왜 물으셨습니까?
“우리는 전장에 던져놓고 본인은 안전한 곳에 숨어서 놀고 있나 싶어서.”
-원래 그런 인간이지 않습니까. 도량이 넓은 마가렛 양이 이해해주십시오.
“노력해볼게.”
웃음 섞인 마가렛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함 내 스피커로 리쳇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파 소탕 완료, 2파 점프 확인. 예상 적함 수 5만.
-아군 고드름 함대 캐스팅 시작. …3, 2, 1. 발포.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고드름 함대가 적함이 나타나는 족족 두세 대씩 꿰어버렸고 잔존한 적이 주포 차지에 돌입하면 발키리와 넥서스가 캐스팅을 방해해 공격을 지연시켰다.
-3파 확인. 전 함 주포 냉각 중. 히어로 팀 출격 준비.
-각자의 코스튬에 탑승 후 사출기에서 대기하십시오.
-여러분의 목표는 적의 지휘관 함 파괴입니다.
-잠중함 1호 스탠바이, 단거리 웜홀 생성.
-…3, 2, 1, 행운을 빕니다.
-점프.
지구 뒤에 숨어 있던 잠중함이 사라짐과 동시에 아줄의 아이시클 함대가 블루라인을 넘었다.
적함의 주포에는 이미 마법이 차징되어 있는 상태였고, 이를 발견한 리쳇이 기습을 위해 접근 중이던 발키리 함대를 급히 제어하였으나.
쩌정!
늦고 말았다. 한순간에 얼어붙은 제27 발키리 함대가 우주의 쓰레기처럼 제각각의 방향으로 부유하다 어느 순간 바닥에 떨어트린 크리스탈 잔이 부서지듯 산산조각이 났다.
-3파 지휘관 함 위치 확인. 제1 잠중함, 작전 개시.
블루라인 후방으로 이동한 잠중함이 모습을 드러내며 히어로들이 사출되었다.
-적함 일부 선회, 발각된 것으로 예상. 레이저 공격에 유의할 것.
측.
-기간트가 시선을 끌겠습니다.
마가렛이 통신기에 대고 외치자 거의 동시에 무뚝뚝한 남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휘관 함 파괴.
펑!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강한 빛이 시야 한쪽에 머문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한 히어로들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화려한 적함을 단신으로 터트리고 적의 레이저를 마치 춤이라도 추듯 여유롭게 회피하며 이탈하는 히어로.
-스위프트. 잘하셨습니다.
-다음 목표는?
-중간 지휘관의 위치를 특정했습니다. 파괴하십시오.
이번에는 천여 개의 타겟이 존재했고 히어로들은 스위프트의 활약에 질 수 없다며 긴장을 털어버린 채 작전에 가담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블루라인이 재차 출렁였다.
-블루라인 재활성화 확인.
-4파 점프로 예상, 전 발키리 함대 입자분해파동포 차지.
-히어로들은 즉시 표시한 위치에서 이탈하십시오.
프렉시스와 싱크레아에서 찍어낸 발키리의 숫자는 20만에 달한다. 격전 중에 일부가 파괴되었다고는 하나 5만 단위로 점프해오는 블루를 상대로는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리쳇은 판단했다.
하지만 그 예상을 비웃듯.
-블루라인 대규모 확장 감지!
한순간에 지구를 둘러싼 푸른 선을 찢고 나타난 4파의 함선 수는 눈으로 모두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
-점프 중인 적함의 수, …약 500만.
상황 전파를 위해 시끄럽던 각 채널의 통신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동시에 멎었다.
-500만? 50만이 아니라?
-이건 후퇴하는 게 맞아.
-그래, 싱크레아로 복귀했다가 전력을 갖춘 다음 되찾자.
모든 히어로가 강한 신념과 멘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떠밀려서, 주변의 시선 때문에, 전쟁 영웅이 되어 명성을 높이기 위해.
이런 허술한 동기와 욕망을 가지고 참전을 택한 히어로는 막강한 적 앞에서 의지가 꺾이기 마련이다.
-후퇴는 없습니다.
-저걸 상대하겠다는 거냐? 개죽음이다!
-도망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서 실패하면 모두가 죽습니다. 당신들이 바라는 욕망도, 결국은 자신을 봐줄 사람이 존재해야 가능합니다.
-나는 싱크레아로 가겠어!
-저들이 싱크레아는 가만히 둘 것 같습니까?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지금이 가장 강한 순간입니다.
통신기에는 온갖 욕설이 흘러나왔고 몇몇은 울음까지 터트렸다.
그러는 사이 리쳇의 제어를 받는 발키리 함대가 입자분해파동포를 뿜었고 점프해온 적 함대는 예상했다는 듯이 고드름을 발사해 파동포의 궤적을 뒤틀거나 위력을 약화시켰다.
파괴된 적함은 3천 미만. 아이시클 함대가 지구 차원의 법칙과 공격에 완전히 적응한 것이다.
-저거 봐, 저걸 어떻게 이겨!
다수의 그 히어로의 말에 동조하던 찰나, 무뚝뚝한 채널에 울린다.
-두렵다면 내 등 뒤를 따라와라. 겁쟁이들.
-이 오만한 놈이! 세상 사람들이 다 네 편인 거 같지?
-오만한 놈이라, 늙은 겁쟁이보다는 훨씬 낫군. 비석에 적힐 글귀로는 말이다.
히어로는 두 무리로 나뉘었다. 두려움을 삼키고 적함을 향해 쇄도하는 무리와 두려움에 질린 채 뒤로 빠져 관망하는 무리.
-이 새끼가!
스위프트를 욕하는 이들 대부분은 관망 조에 속해 있었다.
-뉴욕 그래플링. 너는 불가능을 넘어선 경험이 있나?
몰래 스위프트를 향해 소형 입자분해파동포를 조준하던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화들짝 놀라며 뻗었던 팔을 내렸다.
-…있다.
-나는 모든 분야에서 나를 능가하는 사내에게서 처음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순간이 바로 그러했다. 너는 어떻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스위프트는 초진동 바람 칼날로 다수의 적함을 갈랐고 그런 그의 활약을 주시하던 뉴욕 그래플링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각성자 레슬링 대회 우승.
-분명 그 대회에서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겠지.
-…….
-하지만 너는 트로피를 들었군.
-그것과 이건 다르다!
-그 순간을 믿어라. 뉴욕 그래플링. 너는. 우리는. 불가능을 넘어 이곳에 있다.
그때 스위프트의 존재를 위험하다고 여긴 아줄의 지휘관이 그에게 집중사격을 지시하자 지금까지와는 규모가 다른 공격이 스위프트를 향해 발사되었다.
-빌어먹을!
위험에 처한 스위프트를 향해 급히 쏘아져 나가는 뉴욕 그래플링.
본래 리쳇은 지금처럼 주요 히어로의 목숨이 위험할 시 잠중함 2호에서 대기 중인 도수정에게 단절을 요청하는 것으로 위기를 넘길 계획이었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는 상황을 그대로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연산을 가속해 고민했다.
성공하면 히어로의 결집, 실패하면 스위프트의 사망.
‘도박.’
남만혁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잠시 고민한 리쳇은 킥킥 웃으며 도수정에게 연결된 채널을 닫았다.
-못 먹어도 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채널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리쳇이었다.
* * *
지구에 블루라인이 열리기 며칠 전.
남만혁은 1주일이라는 황금보다 귀한 시간을 바친 대가로 아줄의 모성에 은밀히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 너무 오래 걸린 거 아니냐?”
-로카에서 사용하는 차원 열차보다는 낮은 등급이니까 어쩔 수 없어.
거짓말이다. 실제로는 남만혁이 눈치채지 못하게 한 곳을 더 들려 두 사람을 내려주고 오느라 시간이 지체된 것이다.
“하긴, 좀 싸긴 했지. 근데 위에서도 그랬지만, 여기 엄청 살벌하네.”
남만혁은 우주정거장에 맨몸으로 숨어들어 다른 사람의 신분증을 훔치고 거기에 내장된 데이터를 해킹해 수정한 뒤, 관리자에게 뇌물을 먹이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아줄의 지표로 내려왔다.
그는 편대를 이루어 날아다니는 에어콥터들이 하늘을 빽빽하게 메운 것을 보곤 이번 풀스윙 프로젝트가 쉽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소규모라고는 해도 그린이랑 전쟁 중이니까. 그래서 어디부터 치게?
“당연히 조선소부터 조져야지.”
-기껏 들어 왔는데 바로 나가겠다고?
아줄의 모성에는 조선소가 없다. 왕과 1급 시민을 위한 편의, 놀이, 연구 시설만 자리할 뿐.
“바로 가는 건 아니고. 여기 신분 하나 만든 뒤에.”
-신분?
“우주로 자주 나가도 의심받지 않는 직업이 뭐가 있을까?”
-잠시만, …두 개 있네. 우주쓰레기 처리사, 열매의 아이 우주 관광 도우미. 열매의 아이는 지구로 치면 유치원에 다니는 애들 나이대를 말해.
“쓰레기 처리사로 하자. 애들 키워봐서 아는데, 그거 쉽게 못 한다.”
‘정을 떼기도 쉽지 않고.’라고 작게 읊조리는 남만혁.
이에 리쳇은 바로 아줄의 마켓에 접속해 고물 쓰레기 인양선을 구매했다.
“싸네, 여기에 집도 하나 사자. 주변에 사람 많이 없고 왕성이 보이는 곳으로.”
-그 조건에 부합되면서 보유한 크레딧으로 살 수 있는 곳은 시계탑 꼭대기의 다락방뿐이야.
“시계탑 다락방? 그런 게 매물로 나와?”
-예전부터 시계탑 청소부가 머물던 곳이래. 장점은 뷰가 좋다, 단점은 수직 교통수단이 없다는 것 정도. 아, 왕성 권내라 에어택시도 접근이 불가능하다네.
남만혁의 눈에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시계탑이 보였다.
커다란 물방울들로 쌓아 올려진 첨탑의 꼭대기는 구름에 닿을 듯 높았다.
“엘리베이터가 없다?”
-대신 집라인은 타도 된대.
가느다란 선이 시계탑의 꼭대기에서 왕성의 반대편으로 이어진 것을 발견한 남만혁은 턱을 쓸며 물었다.
“저 집라인 어디로 연결되냐.”
-이로든 정거장 전송진.
이로든은 3급 시민이 주로 이용하는 정거장임을 떠올린 남만혁은 입꼬리를 당겼다.
“저 시계탑을 설계한 놈과 지은 놈은 분명 테러리스트였을 거다.”
-왜?
“시계탑 꼭대기, 포탑 설치하기 딱 좋잖아. 집라인으로 정거장에서 무기 옮겨오기도 편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 차원에서 농장주밖에 없을걸.
“흐, 그럼 좋지. 일단 가자. 쓰레기 인양에 자격증 같은 건 필요 없어?”
-필요해. 방금 시험 예약해놨으니까, 30분 안에 시험장에 도착하면 돼.
“오케이.”
이후 남만혁은 시험에 합격한 뒤, 먼 우주로 나가 인양선을 소행성 뒤에 숨긴 뒤 잠중함으로 갈아타고 아줄의 조선소가 밀집된 바야흐 항성계로 점프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장과 건조 중인 함선을 화면을 통해 확인한 남만혁은 진미를 앞에 둔 미식가처럼 손을 비비며 침을 삼키고는.
“이거 고기 향도 안 맡았는데, 벌써 맛있네. 리쳇. 잠중함에 전함 몇 대 있지?”
-발키리 1천, 네 전용 아이시클 함선 하나.
“아이시클로 가자. 첫인상은 화려해야지. 놈들에게 정의의 철퇴를 꽂아주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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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