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밀키웨이
“이상으로 주간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베르데의 황제, 크록타가 허락한다는 뜻으로 손가락을 까닥이자 대신들이 우르르 방에서 몰려 나간다.
쾅!
그때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통신병.
“회의 중에 송구하옵니다!”
“괜찮다. 무슨 일이냐.”
“블루 놈들의 500만 대군이 타차원으로 넘어갔습니다.”
500만.
작심하면 은하를 점령하고도 남을 군대를 일으켰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기에 크록타는 미간을 좁혔다.
“목적지는 어디라더냐.”
“명예를 되찾은 전사 발파록이 블루 측 정보원과 정정당당하게 결투를 벌여 알아낸 정보로는 지구가 존재하는 차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찾던 그곳이냐?”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사령탑주가 배신을 한 게 아닌지….”
눈을 질끈 감고 생각을 이어가던 크록타는 핫, 하고 크게 웃더니.
“그 얄팍한 블루 놈들은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다. 차원 좌표는?”
“그것 역시 발파록이 입수했다고 합니다.”
“훌륭하군. 3등급 명예 훈장을 수여하라.”
“그리하겠습니다. 그런데….”
당장 블루의 뒤를 쫓아 지구를 박살 내고 기회를 엿보다 귀장식 놈들도 쓸어버릴 계획을 떠올리던 크록타는 통신관이 아직 대전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의문을 표했다.
“내게 할 말이 있느냐?”
“다름이 아니라 명예로운 전사 발파록의 누이, 발라르카가 긴 휴가를 끝내고 복귀했습니다.”
“그런 것까지 내가 알아야 하나?”
“그것이 아니오라…, 복귀할 때 인간과 함께였습니다.”
“인간?”
“아무래도 무력 수준이 일전의 투기장에서 폐하와 일전을 벌인 그놈과 엇비슷한 것으로 보입니다.”
“투기장에 있나?”
“방금 막 6연승을 한 상황입니다.”
“재밌던가?”
“예! 인간치고는 호쾌한 것이. 잡술도 없고 오직 자신의 무용만으로 격전을 벌이는 터라, 벌써 따르는 자가 수백은 되고 지금도 경기가 벌어지고…. 헉, 죄송합니다!”
“되었다. 더 할 보고가 없으면 나가거라.”
“송구하옵나이다.”
안색이 검게 질린 통신관이 회의실에서 나가자 홀로 남은 크록타는 교장과의 일전을 떠올리며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렇단 말이지.”
크록타는 몇 년간 잠들어 있었던 전사로서의 피가 들끓는 것을 느끼며 투기장과 연결된 화면을 켰다.
* * *
“인간의 몸으로 우리 전사들을 6번이나 넘어트린 슈퍼 루키, 쿠위이이이인!”
우오오오오오!
하얀 글러브, 청백색의 옷, 버클에 달린 금주먹, 얼굴의 일부만 가리는 가면까지.
그레이스 멜론은 지금 히어로 코스튬을 입은 채 투기장에 와 있었다.
“이기고 와.”
발라르카는 지구에 도착하고 처음 인간들과 결전을 벌였을 때, 시간만 주어지면 다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심지어 거기에는 매저드와 남만혁도 포함되어 있었고, 베르데의 수명과 압축근이라는 잠재력, 그리고 발라르카의 전투와 관련된 천부적인 재능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단 한 명.
“다녀올게.”
금발을 휘날리며 썩은 피로 얼룩진 통로를 걸어가는 그레이스 멜론.
발라르카는 그녀의 뒷모습으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만큼은 지금이든 미래든,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지구에서 체류하는 동안 많은 것들을 경험했고 강하다는 자들을 찾아다니며 승부를 겨뤄봤으나 만족스럽지 못했다.
종종 발라르카에게 패배를 안긴 각성자도 존재했으나 다음 날 찾아가 다시 겨루면 상대의 수를 학습하고 발전한 발라르카가 백이면 백 모두 승리를 따냈다.
“이기고 와. 저 오만한 근육쟁이 놈들에게 위가 있다는 걸 보여줘. 내게 그랬던 것처럼.”
지구상 유일하게 자신의 성장을 따라오며, 때때로 앞지르기도 하는 인간.
그레이스 멜론.
발라르카는 그녀가 투기장에서 황제와 대면하리라 의심치 않았다.
‘역시, 먼저 오길 잘했어.’
얼마 전, 남만혁의 지구방위대 프로젝트를 듣고 베르데가 지구를 침공해 큰 피해를 입기 전에 막기 위해 리쳇에게 부탁했었다.
‘리쳇, 우리를 베르데 모성으로 좀 데려다줘.’
-제가 그래야 하는 이유는요?
‘잘 풀리면 베르데의 장악, 실패해도 그레이스의 생환은 내가 보장할게. 어때?’
솔깃한 리쳇은 연산을 가속해 여러 번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후, 긍정적인 값이 연속으로 나오자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평소라면 남만혁에게 즉각 보고했을 리쳇이었으나, 퀸을 싸고도는 그에게 알리면 반대할 것이 뻔했기에 이번만큼은 은밀히 진행하기로 했다.
-좋습니다. 지구로 복귀할 차원 열차는 있습니까?
‘내게 호출권이 있어. 번헤드에게 받았지.’
리쳇은 번헤드가 지구의 용병이나 해결사 노릇을 하며 이차원 3인방 중 누구보다 지구 생활에 만족하며 지낸다는 것을 알기에 수긍했다.
그렇게 풀스윙 프로젝트를 위해 차원을 이동하는 잠중함에 몰래 두 사람을 태워 베르데 모성 인근에 내려준 리쳇이었다.
“상대는~ 명예로운 자가 되어 돌아온 발파록! 예? 아, 지금 막 들어온 소식입니다. 우리들의 전사 발파록이 황제 폐하께 3급 명예 훈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오오! 오오오오!
“경기, 시작!”
관중들의 환호 속에 심판의 신호가 울렸다.
발파록과 그레이스 멜론은 투기장 선수 목록을 보곤 이러한 때가 오리라 예상했었기에 크게 놀라진 않았다.
“오랜만이군.”
“우리가 반갑게 인사할 사이는 아니잖아?”
돌아오는 그레이스 멜론의 답에 발파록은 직감했다.
‘내가 알던 그년이 아니다. …아니, 이게 진짜 모습일지도.’
두 사람의 결투는 길지 않았다.
발파록은 그레이스 멜론을 한순간에 압살하기 위해 자신이 보유한 각종 권능을 뒤 생각하지 않고 일시에 총동원하여 때려 박았다.
반면, 멜론은 내구로 모든 공격을 견디며 발파록의 발치까지 걸어가 피할 수 없는 속도로 주먹을 움직여 그의 복부에 대고 비틀었다.
“가속.”
상대에게 접근해 공격한다는 전투의 기본에 충실한 이 별 볼일 없는 공격은 극한의 가속이 더해지는 순간, 사이클론 이상의 위력이 작은 점에 집중된 결과를 낳는다.
“끄으으읍!”
발파록은 복부가 비틀려 내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고통을 느꼈으나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주먹을 그레이스 멜론의 안면을 향해 내리꽂았다.
“내구.”
그것을 이마로 받아낸 그레이스 멜론이 정확히 방금 공격한 지점에 방금보다 더 단단해진 주먹을 뻗었고 직격당한 발파록은 버티지 못하고 주르륵 밀려나며 내장 조각을 입으로 토해냈다.
“이렇게, 이렇게는….”
“발, 발파록 선수 기절! 승자는 슈퍼 루키, 퀴이이인!”
관중들의 환호를 들으며 지구에서 팬에게 인사하듯 손을 사방으로 흔든 뒤에 경기장에서 내려와 대기실로 향하는 그레이스 멜론.
“고생했어.”
기다리고 있던 발라르카가 그녀를 반긴다.
“괜찮아?”
동생을 저렇게 패버렸는데 아무렇지 않냐는 그레이스 멜론의 말에 발라르카는 어깨를 으쓱였다.
“안 죽었잖아. 내 도움이 없어도 알아서 명예를 회복한 녀석이니까, 이번에도 잘 극복하겠지. 그보다는 이 부분, 자세가 미세하게 불안정해. 나라면 받아쳤을 거야.”
발라르카는 방금 경기를 녹화해둔 영상을 재생하며 아쉬웠던 부분을 언급했다.
“아, 거긴 발파록의 권능 때문에 조금 흔들려서 하체의 중심이—”
우승을 목표로 하는 두 사람에게 발파록은 그저 지나가는 길목의 돌멩이 정도 취급이었다.
* * *
“투기장의 주인이자 베르데의 패자! 위대한 황제 폐하 납시오!”
치렁치렁한 망토를 바닥에 끌며 걸어와 경기장에 오르는 베르데 황제의 모습을 눈에 담은 그레이스 멜론은 호흡을 고르며 그 맞은 편에 섰다.
“상대는, 십수 년 만에 무수한 강적들을 무찌르고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선 인간. 슈퍼루키 퀸!”
와아아아!
황제가 망토를 벗고 너클을 착용해 무장을 갖추자 사회자는 시작을 알리고 잽싸게 경기장 밖으로 빠졌다.
“인간. 저 소리가 들리나?”
“환호라면 듣고 있긴 해.”
“베르데의 긴 역사 중, 인간이 투기장에서 나와 대면한 것은 손에 꼽는다.”
“그것참 영광이네. 그래서?”
“그 인간들은 우리 시민들의 야유를 받으며 경기장에 올랐다. 그런데 너는 나 못지않은 환호를 받는군. 무슨 수를 쓴 거지?”
“나는 히어로니까.”
“히어로?”
“툼탕 광장 도마뱀 꼬치 가게 주인의 아들은 목공을 좋아하지만, 아직 서툴러서 사고가 나고 말았어. 연습 삼아 만든 비계에 올라섰을 때, 무너진 거야.”
“뜬금없군.”
“강철 더미에 깔린 소년은 애타게 사람들을 불렀지만, 인적이 드문 곳이라 누구도 소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히어로는 귀가 좋아. 극한의 상황에서 요구조자를 찾다 보면 싫어도 발달하게 되거든. 저기, 관객석 가장 앞줄에서 돌아다니는 파란 머리의 소년이 보여?”
도마뱀 꼬치를 가득 담아 목이 터져라 ‘슈퍼히어로 퀸! 이겨! 죽여버려!’라고 외치며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는 소년.
옆에서 손님이 도마뱀 꼬치가 얼마냐고 물어도 팔을 쳐내며 그저 응원에만 집중하는 모습이 황제의 눈에 들어왔다.
“저 꼬치 장수가 그 소년인가 보군.”
“맞아. 그리고 네 옥좌 옆에 앉은 마담, 쉐일라는 얼마 전 칼날 샹들리에가 머리 위로 쏟아져 머리카락이 상할뻔한 적이 있지.”
“들었다. 어떤 군인의 소개로 파티에 참석한 여자가 자기를 구해줬다고 했었지. 그게 너였나.”
“또—”
“그만. 네 수단을 알았다. 은혜를 안겨 부채감으로 자신의 응원을 끌어냈다는 소리 아닌가.”
“전혀 달라.”
“상관없다. 지금부터 저들에게 응원할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것을 이 두 주먹으로 주지시켜주면 그만일 터이니.”
“그거, 나랑 마음이 맞네.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
그레이스 멜론은 베르데에 머물면서 발라르카의 정보력을 동원해 이런저런 소문을 수집했다.
결과, 눈앞의 황제는 기회만 되면 지구를 파괴할 인사라는 것을 알곤 그저 침공을 못 하게 막는다는 초기 계획을 ‘가능하면 죽인다’로 수정했다.
쿵!
시작은 황제의 발걸음이었다.
그저 한 발을 내디딘 것뿐임에도 경기장에 균열이 일며 가장 힘이 크게 모이는 모서리가 파괴되어 글로리아에서 가장 내구성이 좋다는 오르할콘 조각들이 조각나 하늘을 부유한다.
“크록타, 당신에게 제안할 게 있어.”
권능을 두르고 전투 태세를 마친 황제가 겁 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인간에게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답했다.
“듣지.”
“한 방 승부 어때. 전사답게.”
맨손을 보이며 호기롭게 전사를 입에 담는 인간 여자의 모습에 크록타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크게 웃었다.
“크핫! 크하하하! 처음이다. 인간 따위가 이 몸에게 대전사 결투를 신청할 줄이야.”
“그래서 한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좋다, 네년에게 선공을 양보하마.”
“아니, 동시에 하자.”
“음? 어째서 유리한 선수를 마다하는가.”
“그거, 전사답지 못하잖아.”
씨익 웃은 크록타는 파괴적인 권능을 주먹에 부여하며 중얼거렸다.
“진실로 좋구나. 네년의 공격에 맞춰 반응하지.”
그레이스 멜론은 고개를 끄덕이곤 부유로 날아 경기장에서 수직으로 상승했다.
한순간에 시야를 벗어난 그레이스 멜론의 모습에 관중과 황제는 당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에 그녀를 비추는 화면을 보곤 경악한다.
“우주?”
그곳에서는 베르데 모성이 주먹 크기로 보이고 있었다.
카메라가 잠시 행성을 찍는 사이 그레이스 멜론의 모습이 빛살과 함께 접히듯 사라졌고 이곳에 모인 이들 중 유일하게 하늘에 느껴지는 거대한 압력을 느낀 황제, 크록타가 광기 어린 미소를 지은 채 양발을 경기장에 박아 넣고 주먹을 허리 옆에 붙였다.
“와라! 인간 전사. 최고 최강 최적의 일격으로 네년을 전사 묘에 안치시켜주마!”
“밀키웨이—”
황제의 호언에 답하듯 대기를 진동시키는 그레이스 멜론의 목소리가 하늘 저편에서 들려왔고.
“—다이브!”
다음 순간 크록타의 주먹과 슈퍼히어로 퀸의 주먹이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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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