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악마, 프로페서 남
“왕이시여. 무지한 시민들이 분란을 일으키고 있사옵니다. 전하의 석상을 훼손시킬 뿐만 아니라 건국 기념비를 욕보이는 등의 역모나 다름없는 참혹한 일이 매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소한 일은 그대들이 알아서 처리하라 일렀지 않았느냐.”
대군을 파견하기에 앞서 살펴야 할 문제가 산더미였기에 아줄의 왕, 아문은 평시 업무들을 신하들에게 넘긴 상태였다.
“송구하옵게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규모인지라 전하께 말씀드리는 편이 낫다고 의견이 모였습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부족한 저희를 살펴주시옵소서.”
신하의 간청에 전시 물자 수송 실시간 보고서를 눈앞에서 치운 아문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자세히 말해보라.”
“3등급 이하 노동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거리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특히 기술자들은 파업을 선언하고 모두 본 행성을 떠났습니다.”
“잡아들이면 그만이지 않으냐.”
못마땅하다는 왕의 눈짓에 신하는 급히 머리를 숙이며 둘러댔다.
“저희도 이 문제를 인지하자마자 손을 썼으나 이미 뿔뿔이 흩어져 모두 잡아들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합니다.”
“얼마나.”
“현재 운용 가능한 워프를 모두 동원한다고 하여도 1년은 넘길 것으로 예상되옵니다.”
신하는 기술자들의 고향이 제각기 다르고 몇몇 핵심 인사는 워프가 설치되지 않은 시골 항성계로 떠났기에 일일이 찾아가 데려오려면 더 걸릴 수도 있다고 조심스레 덧붙였다.
“허, 기술자의 위신이 마법사에 비해 다소 격이 떨어지기는 하나 이렇게 직무를 유기할 정도로 짐이 홀대하지는 않았다. 다른 문제가 더 있는 것이 아니냐.”
“…사실은 얼마 전부터 아랫것들 사이에서 ‘같은 세상에 같은 육신인데, 어째서 누구는 1급 시민이고 누구는 5급 시민인가.’라는 말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계층 간의 갈등이 다시 점화되었다는 소리에 왕은 이마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선동가를 죽여라. 구심점을 들어내면 흩어질 터.”
한동안 시끄럽고 자신의 위명이 더럽혀지겠으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왕이었기에 과감하게 지시를 내렸다.
“선동가를 찾아봤습니다만, 실체가 없었습니다. 그간 쌓인 시민의 불만이 이 소문을 빌미로 터지는 것이라 추측하고 있사옵니다.”
둘러서 자신의 통치가 문제라고 지적한 신하를 노려본 왕은 혀를 찬 뒤 실체가 없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거기서 묘한 불길함을 느껴 더욱 과감한 수를 두었다.
“구심점이 없다면 달라붙을 벌레들을 태워버리면 그만, 전부 치워라.”
“…알겠습니다.”
“기술자들의 빈 자리는 수습 마법사에게 맡긴다. 그들은 어차피 보조자원이었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
아줄의 왕 아문은 시대가 낳은 천재였기에, 마법사라면 누구나 기초적인 함선 조작 기술 정도는 본인처럼 쉬이 습득하리라 판단하고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
신하는 왕의 눈치를 보며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첨언하였으나 왕은 밀어붙였다.
“아줄의 마법사라면 그 정도는 해내야지! 그만 나가도록.”
“예, 예.”
집무실에 홀로 남은 왕이 중얼거렸다.
“이 넓은 세상에 이렇게 인재가 없어서야.”
짤랑, 짤랑.
또다시 문 뒤에서 들리는 귀장식 흔드는 소리에 왕은 짜증스레 답했다.
“들어와라. …사령탑주? 네가 웬일이냐. 옆의 그 악마는 누구고.”
“왕께 인사드립니다.”
정중히 예를 표한 사령탑주는 시종이 문을 닫자 자신이 데려온 악마를 소개했다.
“프로페서 남, 이라는 마법사입니다.”
“마법사라. 조카야, 이자에게선 범인 이상의 마나는 느껴지지 않는구나.”
‘그런데도 마법사라 주장한 이유가 있겠지?’라는 눈빛을 받은 사령탑주가 급히 혀를 놀렸다.
“이 친구는 마나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율할 수 있습니다. 뭐 하고 있나, 보여드리게.”
“그러죠.”
검은색 외뿔을 지닌 악마는 자신이 보유한 마나 ‘일부’를 풀었고 이것만으로 집무실의 온갖 보호 마법진들이 과부하를 일으키며 쓸려나갔다.
“허어.”
왕은 단순한 마나 방출만으로 이만한 위력을 내는 인물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그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도 처음 이 마나 방출을 겪고 얼마나 곤란했던지.”
“이 녀석이, 그걸 알면서도 여기서 그걸 하게 시킨 게냐.”
“하하, 죄송합니다. 저만 당할 수는 없어서요.”
“악동 같은 성질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하구나. 그래, 악마여. 원하는 계약이 무엇이냐.”
범인처럼 보이도록 철저하게 마나를 숨기고 있던 자가 사령탑주 앞에서 힘을 드러낸 이유가 자신을 만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 여긴 왕은 은밀히 마법을 캐스팅하며 악마의 답을 기다렸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음?”
“그저 존귀한 분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을 뿐입니다. 계약에도 그리 명시되어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령탑주님.”
고개를 끄덕이는 사령탑주의 모습에 왕은 의아했다.
글로리아 차원의 절반을 차지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자신을 앞에 두고 아무런 계약을 제시하지 않는다?
“죄송합니다, 백부님. 제가 이자에게서 마법을 몇 개 배웠던지라 이 자리를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령탑주는 전혀 미안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으음.”
“두 분의 대화에 제가 방해될 듯하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목표를 달성한 선수처럼 한 점 아쉬운 것 없다는 듯한 언행으로 집무실을 나가는 악마의 모습에 왕은 조카에게 물었다.
“네가 보기에는 어떻더냐.”
“신뢰할만한 악마이옵니다. 계약만 잘 맺는다면, 쓸만한 패가 될 겁니다. 종의 제약 때문에라도 먼저 배신할 일은 절대 없으니까요.”
“그렇겠지. 참, 그런데 조카는 나를 팔아서 무슨 마법을 배웠는고?”
“아하하…, 보여드리겠습니다.”
사령탑주는 악마에게 배운 ‘어지러운 전기 구슬’을 시전했다.
파지직!
방안을 돌아다니는 다수의 전기 덩어리를 본 왕은 고개를 주억이며 한눈에 이 마법의 잠재력을 짚어냈다.
“난전에 유리하겠구나. 특히 전용 주포를 만들면 적이 예측하기 어렵겠어.”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그린 놈들을 상대하기에 이만한 마법이 없습니다. 조금만 더 개량하면 지상에서도 충분히 놈들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형태의 마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하나의 뿌리에서 다수의 마나가 분열되는 마법은 이론상에서만 존재했기에 왕은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겼다.
“좋은 인재를 얻었구나.”
한참 이 마법에 대해 극찬하던 사령탑주는 왕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 곁에 두시고 쓰시지요.”
내심 조카가 먼저 제안해주길 기다렸던 왕이었기에 반갑게 답했다.
“그래도 되겠느냐?”
“처음부터 그러려고 데려왔습니다. 얼마 전 제게 왕국에 사람이 없다고 투덜대지 않으셨습니까.”
“어허, 투덜댔다니. 짐에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하하, 죄송합니다. 예전 버릇이 그만.”
“내 그리 알 테니, 가 보거라. 아, 혹시 바라는 게 있느냐?”
“없습니다.”
“말해보래도. 내가 주고 싶어서 그러느니라.”
“그럼…, 지구 차원에서 온 인간의 머리를 제가 소유해도 되겠습니까?”
“이미 네 것이지 않으냐.”
“그게, 궁정 마법사들이 들고 간 뒤로 아직 못 받았습니다.”
“내 이놈들을! 알았다. 당장 보내라고 하마.”
“감사하옵니다.”
끼익.
왕의 텔레파시를 받은 시종이 문을 열자 사령탑주는 들어왔을 때처럼 예를 표하며 물러났다.
측.
“궁정마법사에게 연결해라.”
-…부르셨사옵니까, 전하.
“추출은?”
-막 끝났사옵니다만, 사령탑주의 최초 보고와 다른 정보는 없었습니다.
“새것처럼 잘 포장해서 사령탑주에게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왕은 너풀거리는 커튼 너머의 시계탑을 보며 읊조렸다.
“악마라….”
* * *
그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노동자가 주로 찾는 허름한 펍에 적당한 선동 문구를 퍼트리고 시계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를 발견했다.
“음차원 마나?”
마법이 주류인 이 행성에도 음차원 마나를 다루는 이는 손에 꼽았고 저 정도로 높은 수준의 마법사는 처음 봤기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가 나왔다.
“어떻게 알았지?”
고개를 홱 돌린 중년의 마법사는 대답 여부에 따라 나를 죽일 수도 있다고 협박하며 답을 재촉했고 나는 이 세상에서 신뢰의 증표나 다름없는 이마의 뿔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알아. 그런 종류의 악마라.”
위장하고 있던 마나를 풀어 슬쩍 흘리자 놈의 경계가 대번에 풀린다.
“헛? 음차원 마나를 다루나? 아니, 악마라 당연한 건가. 이쪽으로 와 보게! 악마의 생태에 관해 물어볼 게 많아!”
“시간이 없어서.”
“하긴, 악마는 늘 시간에 쫓긴다고 하지. 계약 때문에 그러나? 그럼 나와도 계약을 하세. 1시간을 사지. 그러면 내가 아줄 행성 최고의 음식을 대접하겠네.”
처음에는 선동을 위해 퍼트려둔 소문이 무르익길 기다리는 동안의 심심풀이쯤으로 여겼다.
그런데 며칠간 내가 가는 길목마다 기다리고 있는 그와 반강제로 교류를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친해졌고, 최근에는 그가 ‘인간의 머리’를 연구 중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교장의 머리다.’
“궁정마법사 놈들이 가져가서 돌려주질 않는단 말일세! 후, 아무리 백부시라지만 이건 너무한 처사 아닌가. 자네가 봐도 그렇지 않나?”
그는 악마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속내를 말할 대화 상대가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특히 내가 저 시계탑 꼭대기에 살고 쓰레기선을 운행한다고 하자 안쓰러운 눈으로 보며 내 어깨를 두드리더라.
“그린이 맡길 정도로 특수한 존재라면 왕실에서도 조사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먼저 그대에게 충분히 양해를 구했어야 했어.”
“그렇지! 하아, 전하께서도 호들갑이시지. 별 대단한 내용도 없더만. 기프트 따위, 하위 신성의 변덕에 불과할 터인데.”
얼핏 들어도 극비 정보인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 내가 악마종이라고 오해해서 그런 것일 터다.
사령탑주라는 자가 불만을 토로하던 와중 감정이 격에 달했을 때, 슬쩍 왕을 만나게 해 달라는 요구를 했고 대가로 인간의 머리를 돌려받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정말인가?”
“물론. 너는 나를 왕에게 바치고 ‘머리를 주십시오.’라고 말하기만 하면 돼.”
“…꼭 홀리는 기분이군. 만남 자체는 어렵지 않아. 그리고 계약서에 적게, 절대 전하께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고.”
“그러지.”
이후 사령탑주를 통해 왕을 만났고 생전에 나를 죽인 이의 모습을 두 눈으로 담았을 때는 살심 보다 오히려 반가움이 먼저 들었다.
‘반대.’
회귀 전에는 놈이 먼저 나를 찾아 죽였다면, 이번에는 내가 먼저 놈을 찾았다.
“자네의 마나를 보여드리게.”
“그러지.”
이 순간 암살을 시도할까 하였으나 블루의 왕 체내에 고속으로 층층이 쌓인 마나를 감지하곤 그만뒀다.
나는 놈에게 내 존재를 각인시키는 것으로 만족하고 왕성을 빠져나와 은신처인 시계탑 꼭대기로 향했다.
“이거, 계획을 수정해야겠는데?”
-동의. 블루의 왕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사령탑으로 교장의 머리가 돌아오면 좀 살펴봐야겠고. …이 양반 어디 갔나 했더니 이런 데서 죽어 있냐.”
그래도 아카데미 입학을 최종 승인해준 인물이자 지금은 교체하긴 했으나 처음 내게 칩을 선물해 준 사람이었기에 싱숭생숭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사령탑주가 인간의 머리를 보여주겠다며 들뜬 목소리로 호출하기에 가보니.
“—이 남만혁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의 특성을 뽑아먹기 위해 자신이 운영하는 아카데미에 입학시켰네. 이런 식으로 데려온 영재들이 한둘이 아니야. 하지만 매저드와 교감이라는 자의 압박과 견제로 실패했구먼.”
싱숭생숭 취소다. 미친 늙은이가.
이래서 회귀 전에는 스위프트랑 도수정이 졸업 후에 사라진 건가.
와, 소름 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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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