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패황을 투하하자!
“5파의 지휘관급 포로들이 전부 ‘자우트’를 언급하며 자결했습니다.”
5파는 지구의 압승이었다.
아줄의 왕이 의도적으로 병력을 4차의 절반만 지원해주는 수작을 부린 것도 승리 요인 중 하나였으나 무엇보다 히어로들의 끈끈한 결속과 지구의 함대에 주포를 차지할 시간을 준 것이 컸다.
“그놈이 총지휘관인가?”
안토니오 골든우드의 질문에 보고하던 지구방위대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홀로보드를 건넨다.
“예, 호밍보우가 지휘관 함을 격추하고 이자를 포박했습니다. 그런데 허슬리라는 자가 면회를 요청했습니다.”
“허슬리?”
“양자였다고 합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좋은 사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몰래 풀어준다든가 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대원의 첨언에 안토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지.”
* * *
“아버지.”
풀어헤쳐진 머리, 뜯겨나간 귀, 목에 걸린 쇠고리.
저 쇠고리는 허슬리와 악스가 머리를 맞대 만든 MZ라는 아티팩트다.
특성을 봉인한다는 VZ에서 영감과 힌트를 얻어 제작한 시험작.
“…허슬리냐, 이것을 풀어다오. 마나를 느낄 수 없으니 답답하구나. 부탁이다.”
남아 있는 한쪽 눈만 반개하며 고개를 든 자우트가 허슬리를 발견하고 간절하게 말하자 유전자를 조작당한 그의 아들은 냉담한 얼굴로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은 제 친부모를 죽였습니다.”
“그딴 5급 시민이 너를 키웠으면, 지금의 네가 있을 것 같아!”
목에 걸린 쇠사슬이 거칠게 움직이는 자우트의 몸짓을 따라 철그렁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왕국에서 가장 좋은 것만 골라 너에게 먹이고 주고 익히게 했다. 그런데 너는 나를 이런 식으로 외면하는구나.”
“보답을 바라셨으면 제 유전자를 조작하지 마셨어야 했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이 이렇게 절절하게 외치는데도 저는 작은 연민조차 느껴지지 않습니다.”
눈을 꾹 감은 자우트는 어느 순간 입꼬리를 길게 찢더니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아들아. 우리는 글렀다. 현상 유지에 집착하는 아줄은 언제고 늘 새로운 강함을 찾는 베르데에게 굴복하게 될 것이다. 그는 마지막 기회였던 나를 버렸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셨습니까.”
“곪아가는 나라를 쇄신시키는 것이 쿠데타라면 그래, 네 말이 맞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글렀구나. 너라도 군문에 몸을 담았다면 다음 대를 노려보겠지만.”
“저는 생각 없습니다.”
“차라리 잘되었다.”
“예?”
“너는 지구의 지배자가 되어라. 이곳은 아직 약하다.”
“패장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선동과 날조에 귀를 기울이는 병사, 국왕의 시기, 불량 마나 코어, 부족한 보급품. 이번 전쟁은 질 수밖에 없게 설계되어 있었다.”
“추한 변명을 할 바에 차라리 허황된 약속을 하라고 가르친 건 당신입니다.”
“지구는 이제 시작하는 차원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지. 일반적인 일이 아니다.”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요행이라는 뜻이다. 이번 전쟁이 끝나고 바로 그린 놈들이 쳐들어온다고 가정하면, 과연 승리할 수 있겠느냐.”
“지겠죠.”
지구의 모든 역량이 아줄을 막는 데 소모되고 있음을 잘 아는 허슬리였다.
“그때를 노려라. 그린의 침공을 막고 대표가 돼라. 그것이 나의 바람이다.”
“저는 일개 병사입니다.”
자우트는 자신을 빼닮은 아들을 보며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었다.
“이 쇠고리를 풀어다오. 내 마나를 너에게 넘기마.”
“그건 위법입니다.”
“공으로 죄를 사하는 것은 어느 차원이나 기본이니, 이곳도 그럴 터. 감수해라.”
길게 한숨을 내쉰 허슬리는 잠시 망설이다 자우트의 목에 감긴 쇠고리를 풀었고 그러자 경고등이 켜지며 간수가 튀어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헉? 지원 요청! 자우트가 허슬리 중위를 인질로 잡았다!”
“비켜라! 다가오면 인질은 죽는다. 수송선과 식량을 내놓는다면 안전하게 돌려보내 주지.”
“큭, 당신!”
“아들아. 사관 아카데미에서 포로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았더냐.”
실망과 희망이 뒤섞인 자우트의 눈빛을 본 허슬리는 그가 끝까지 자신을 아들이 아닌 도구로 여겼다는 것을 확신하며 주머니에 넣어뒀던 물건을 꺼냈다.
찰칵.
자우트는 자신의 팔목에 쇠고리가 걸리자 급속도로 차오르던 마나가 다시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안, 안 돼.”
스르륵 풀리는 자우트의 팔을 밀치며 빠져나온 허슬리는 간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됐습니다. 제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별것 아니었습니다. 중위님.”
간수의 다급한 반응은 처음부터 연기였고 통신기는 아예 켜지도 않았다.
자우트를 내려다본 허슬리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고맙습니다. 티끌같이 남아 있던 감정을 완전히 없애줘서. 이제 당신이 효수당하는 것을 동료들과 함께 마음 편히 감상할 수 있겠습니다.”
“아, 아들아. 잠깐—”
허슬리는 자신의 옷깃을 붙잡고 늘어지는 자우트의 손을 뿌리치고 개운한 표정으로 감옥을 나섰다.
등 뒤로 들리는 아버지였던 것의 절규를 음미하며.
* * *
“이봐, 들었어? 전하께서 친정하신대.”
“아, 지구 차원 말인가? 그것 때문에 거리가 종일 시끄러워.”
“40년 만의 친정이니까 당연하지. 하위차원이라면서?”
“나도 쓰레기선 운행하는 악마에게 슬쩍 물어보니까, 이번에 꽤 고전 중이라는 것 같더라고.”
“그 악마, 사령탑주랑 친하다던데. 거기서 나온 소스면 진짜일 가능성이 크겠어.”
“아무래도 그렇지. 참, 자네도 한때 군인이었잖은가. 복귀하는 건 어때?”
“켁, 내 나이가 몇인데 이 사람아. 그냥 마누라 궁둥이나 긁으며 사는 게 낙이야.”
“큭큭, 알았어.”
아줄의 모성에 지구 공략 실패 소식이 퍼졌고 이는 당연하게도 남만혁의 공작이었다.
왕과 그 신하들을 조급하게 하여 틈을 만들기 위함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왕성은 이런 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
“전하, 제6군단 출진 준비가 갖춰졌사옵니다.”
“한 번 더 확인하라. 특히 마나 코어. 왜 내가 볼 때마다 오류가 발견되는가. 이번에도 문제가 생기면 담당자에게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고 전하게.”
“명심하겠사옵니다.”
기술자를 급히 고용하느라 실력이 부진하였기에 벌어진 사고였고 이에 왕은 두 번 세 번 검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좀 더 군을 보강한 다음 출진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회의를 파한 왕은 시종을 불러 물었다.
“프로페서 남은 뭐 하고 있던가?”
시종은 빙긋이 웃으며 자부심에 가득 찬 어조로 답했다.
“우리 역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유를 물어보니 ‘이만한 제국을 유지하는 데는 그만한 역사가 있을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흠. 그러면 자네가 가서 알려주게. 왜 우리가 아직 ‘왕국’인지 말이야.”
“그리하겠습니다.”
* * *
“—이러한 이유이옵니다.”
“…허.”
“하하. 도전자의 위치를 고수하는 것이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선대의 뜻이지요.”
누가 봐도 글로리아 차원의 패권을 쥐고 있는 국가가 왕국이라 자칭하는 것은 어색하다.
이에 의문을 가지고 약점도 찾을 겸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중에, 왕의 수발을 드는 시종이 다가와 길게 떠들어댔다.
요약하면, ‘그린을 정복해야 진정한 제국’, ‘아줄의 발전은 목표를 잊지 않는 마음가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명한 왕’이었다.
뭔 개소린가 싶어 멍하니 쳐다보니 시종은 저 혼자 만족하고 떠났다.
아무튼 이로써 확실해졌다.
‘왕만 처리하면 블루는 한동안 전쟁은 꿈도 못 꿀 거라는 거.’
절대군주제가 그러하듯, 한순간에 머리를 쳐내면 나라는 혼란에 빠진다.
도서관과 궁을 돌아다니며 왕족 계보를 살피고 소문을 수집해본 결과, 현 왕에 비견될만한 유능한 왕족은 없다.
방계에서 데려온다 해도 그 과정이 지난할 테니, 나로서는 환영할 일이다.
‘왕의 친정. 그때가 기회다.’
* * *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폐하! 양위라니요!”
“여러분은 제가 황제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법은 법입니다!”
“그 법에 타 종족도 상관없다고 적혀 있었나요?”
“물론입니다! ‘남녀노소 하위상위 구분하지 말고 강한 지성체를 대장으로 삼을 것’, 법전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게 잠재적 적이어도 통용된다고요?”
“예. 저희는 그렇게 살아남았고 강해져 왔습니다.”
그레이스 멜론은 손 걸이가 부서진 옥좌에 어색하게 앉아 대신들과 논쟁 중이었다.
“좋아요, 제가 황제라고 칠게요. 저의 첫 명령은 발라르카에게 황제의 자리를 주겠다는 거예요.”
“불가능합니다. 황제는 오직 최강자로 증명된 자여야만 합니다.”
“발라르카는 여기 계신 누구보다 강하잖아요.”
“하지만 폐하께 졌습니다.”
이번 논쟁은 이미 두 번째다. 처음엔 싫다며 친 지구 파인 발라르카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강함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그래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결투를 했고 그레이스 멜론은 의도적으로 패배했다.
이를 귀신같이 알아차린 관중들과 발라르카가 격분하자 그레이스 멜론이 사과한 후 다시 대결을 벌였고, 격전 끝에 승리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에 이른다.
“저 지구인이에요. 아줄이 침공 중인 지구요.”
“인지하고 있습니다.”
대신들이 하나같이 ‘그게 무슨 문제라도?’라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기에 그레이스 멜론은 머리를 짚으며 옆에 있는 발라르카에게 도움을 바라는 눈짓을 보냈다.
“야, 이 포도 맛있네. 이름이 뭐? 꿀거봉? 내가 없는 동안 이런 특산품을 만들었단 말이지. 햐.”
그러나 그녀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에 그레이스 멜론은 극단적인 처방을 놓는 것으로 이 옥좌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당장 아줄과 전면전을 벌이자고 해도 제가 황제인가요?”
“예.”
“우주에서 국민 전부가 죽어 나가도요?”
“말은 나오겠으나 행동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쿵!
우람한 몸집을 지닌 대신들이 가슴팍을 치며 뜨거운 기세를 피워 올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그레이스 멜론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그제야 그레이스는 가끔 남만혁이 왜 ‘어휴, 모르것다.’라고 한숨을 쉬며 일을 진행하는지 조금 이해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지금부터 우리는 지구를 전력으로 지킵니다. 필요하면 아줄에 침공도 할 거고요.”
쾅!
대신들은 동시에 바닥을 발로 치며 소리쳤다.
“원하는 바입니다!”
“더 많은 전쟁을!”
“모든 블루의 귀장식을 뜯어버리겠습니다!”
“무근육자에게 징벌을!”
“새로운 패황을 아줄의 모성으로 투하하자!”
“가보세요. 언제든 출진할 수 있도록 준비하시고요.”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대신들이 떠나자 그레이스는 아직도 옆에서 다람쥐처럼 포도를 입 안에 쑤셔 넣는 발라르카가 괘씸해 발로 걷어찼다.
“악, 왜!”
“너 이러려고 나 데려왔지.”
씨익 웃는 발라르카.
“눈치 참 빠르네. 로맨이 가장 걱정하던 게 뭐야. 우리와 블루가 동맹을 맺는 거잖아. 그거 막느라 바빠서 너랑 결혼도 못 하는 거고.”
“…응.”
“이제 우리 애들 데리고 지구로 가 봐라, 로맨이 뭐라고 하겠냐.”
“좋아하겠지?”
“좋아만 할까, 당장 너를 안아 들고 응? 막 손자 계획까지 세우고, 어휴. 말을 말자.”
얼굴이 붉어진 그레이스가 되물었다.
“그럴까? 하지만 이런 쪽 감정 표현은 잘 안 하는 사람인데….”
“너는 그냥 로맨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면 돼. ‘세계의 절반을 줄게.’ 그럼 좋아 죽을걸?”
발라르카의 속셈은 사실 지구의 문화가 자신의 취향에 딱 맞아 이를 지키기 위함이었으나 그레이스를 납득시키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해 중간에 로맨을 끼워 넣은 것이다.
그리고 이는 통했다.
“…히. 아들이랑 딸 한 명씩 낳자고 할까.”
마음만 먹으면 베르데를 절단낼 수 있는 괴물이 소녀처럼 웃는 모습에서 발라르카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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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