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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195화 (195/201)

<195화>

퀀텀피직스

쾅!

“인간 따위에게 제국을 맡길 수 없습니다!”

“옳소!”

“이번 기회에 부족 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악습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옳소!”

“국가는 전문 통치자가 경영해야 발전하는 법입니다!”

“옳소!”

베르데 종이라면 누구나 명예와 근육에 집착하기 마련이지만, 어디에든 예외는 존재하는 법.

뜨거운 본능보단 차가운 이성을 우선시하는, 자칭 지성인들이 그레이스 멜론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곤 각지에서 동시에 들고 일어났다.

그들에게 있어 베르데 전통문화는 숨통을 조이는 목줄이었기에 이번 기회에 중앙으로 진출해 구식 법과 전통을 모조리 엎어버릴 계획을 세웠다.

“우리가 나서야 세상이 바뀝니다. 용기를 내어주십시오! 컥!”

“치안부다! 도망쳐!”

그러나 이러한 일이 지금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베르데 치안부는 늘 이들을 감시해왔고, 연설이 정점에 이르는 순간 뛰어들어 선동가를 제압해 끌고 갔다.

이 소식이 황성에 전해지자 그레이스 멜론은 훈방 조치를 주장했으나 신하들은 만류하였다.

“우리 베르데가 이성적인 판단으로 블루 놈들과 견줄 수 있었다면 진작에 그리했을 것입니다.”

그레이스는 이유야 어찌 되었건 일반 시민을 괴롭히는 치안부의 과격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 사건을 통해 확실히 베르데 행성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고 느꼈다.

“…알았어요. 그런데 지구 차원으로의 출진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죠?”

그렇기에 이곳 문화에 깊게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영향을 미칠만한 선택을 지양하는 그레이스였다.

“순조롭게 준비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한시라도 빨리 블루의 침략을 받고 있다는 지구를 돕고 싶었기에 닦달하듯 물었고 이에 대신은 그녀에게서 커다란 압박을 느끼곤 부복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블루가 다음 차원 이동을 시도할 때 같이 열 계획입니다. 그 편이 자원 절약에 도움이 되고 기술적으로도….”

“더 일찍은 어려운가?”

그레이스가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대신들이 헛바람을 들이킨다.

“최, 최대한 빨리 준비하겠사옵니다!”

“그러세요. 가능하면 블루보다 빠르게 지구에 도착했으면 좋겠네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차원 이동에 안건을 마지막으로 회의가 끝나자 대신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재빨리 대전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발라르카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저 할배들, 강자 앞에서 설설 기는 건 여전하네.”

꿀거봉이 잔뜩 담긴 바구니를 안고 오물오물 씹어먹는 발라르카를 한동안 바라보던 그레이스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발라르카, 부탁이 있어.”

“뭐길래 이렇게 분위기를 잡으실까.”

그레이스는 간절한 목소리로 발라르카에게 모종의 부탁을 했고 발라르카는 단번에 거절했다.

“웃기지 마. 너만 지구로 튀겠다고? 야, 내가 너 돕는 이유가 지구에서 편하게 살기 위해서야. 인제 와서 이런 꽉 막힌 곳에서 황제 노릇을 어떻게 해!”

“후우, 무슨 방법이 없을까?”

옥좌의 부서진 손 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하는 그레이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골몰하던 발라르카가 아주 단순하면서도 혁신적인 계획을 입에 담았다.

“—되는 거지, 어때?”

“그게 뭐야.”

“별론가?”

“…아니, 하자. 로맨이 좋아할 거 같아.”

* * *

싱크레아, 퀀텀피직스 연구소.

지구상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들이 모인 곳.

본래는 미시세계와 관련된 각자의 연구를 진행하며 서로 의견을 나누거나 조언을 듣기 위해 설립된 연구소였으나 지금은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든 물리학자가 매진하는 중이다.

“박, 박사님!”

“하워드? 왜 호들갑인가. 아내가 친정으로 간다는 소식이라도 들었나? 껄껄껄.”

“그게 아니라, 얽힘 반응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응?”

“시료 zb-1225번의 경우의 수가 고정됐다는 말입니다!”

“가세.”

박사는 곧장 조수를 데리고 해당 시료를 확인했고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다수의 검증을 통해 증명해냈다.

“이 시료는….”

박사를 바라보는 수십 쌍의 눈. 그들의 목울대가 꿀렁인다.

“양자얽힘 현상이 고정되었네. 이 시료를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하면, 우리가 바라던 ‘점프’와 ‘클로즈’가 가능하겠지.”

박사의 확언에 환호하는 조수들.

“이제 저 블루라인을 닫을 수 있는 겁니까?”

조수 중 하나가 실험실 중앙에 배치해둔 대형 홀로보드 위로 떠 있는 지구와 지구를 둘러싼 푸른 선을 가리키며 묻자.

“아직은 아닐세. 이제 저쪽의 값을 찾아내야지.”

“다음 출렁임 발생 때 가능하겠군요.”

“연구소의 총력을 동원하면 차원 출렁임 발생 직후 바로 닫을 수 있을 게야.”

“하지만 출렁임 현상의 데이터를 수집하려면….”

“그래, 누군가 가까이 가야 해. 히어로에게 부탁해야겠군.”

“무인 연구선을 보내도 되지 않을까요? 밀키 마이닝에 요구하면 들어줄 겁니다.”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연구가 아직 불완전하다는 걸 잊었나? 최대한 다른 신호는 배제해야 하네. 특히 타 차원의 기술은 더욱.”

“아.”

다른 차원의 기술은 아직 완벽하게 분석되지 않았다.

식별되지 않은 신호가 섞이면 일이 어그러질 수 있다는 박사의 말에 연구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누구에게 부탁하는 게 좋을까요?”

“미니하버가 당장 먼저 떠오르는데, 자네들은 어떤가?”

미니하버는 몸집을 작게 만드는 특성을 보유한 히어로로, 지구에서 활약할 때는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문적으로 처리했었다.

드넓은 우주이니 그라면 블루라인에 달라붙어도 레이더에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박사의 판단이었으나.

“미니하버는 4파 방어 도중 전사하셨습니다.”

“이런.”

히어로 특성이 적힌 리스트를 보던 조수 한 명이 박사에게 걸어가 손가락으로 한 사람의 이름을 가리킨다.

“이분은 어떻습니까.”

“하이디?”

하이디는 트레이시 그웬의 히어로 명이다.

“예, 서히아 출신이고 지금까지 맡은 의뢰를 실패한 적이 없으며 미니하버 이상으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로 유명합니다.”

“음, 좋네. 그렇게 하지.”

“그런데 박사님, 한 명에게 맡길 생각이십니까? 여럿이 낫지 않을까요?”

“그러면 들킬 우려도 있고, …실패하더라도 한 명만 희생되는 편이 낫지 않겠나.”

“…그렇군요.”

“하이디에겐 모든 사실을 알리게. 그녀는 히어로야.”

“알겠습니다.”

* * *

아줄의 5차 침공에서 살아남은 히어로들은 대개 두 가지 선택을 한다.

밀키 마이닝에서 만들어둔 호화 우주 정거장에서 다음 침공이 있을 때까지 휴식을 취하든가 아니면 각자의 가정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던가.

“사람이 없으니까 이렇게 썰렁하구나.”

그러나 트레이시 그웬은 그들과는 다르게 지구로 내려왔다.

커다란 이유는 없었다. 죽기 전에 망해버린 지구를 한 번쯤 눈에 담고 싶었을 뿐.

휘우우웅.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밀키 마이닝의 순찰선을 발견한 트레이시가 작게 웃는다.

“누가 알았겠어. 남 교수가 밀키 마이닝의 창립자일 줄이야.”

찍, 찍찍!

샤샥!

인간이 사라진 지 몇 주 되지도 않았건만, 세상은 동물들 차지가 되었다.

“꺅!”

사람을 겁내지도 않고 발밑을 지나가는 쥐와 바퀴벌레 무리에 괜히 혼자 분위기를 잡던 트레이시가 기겁하며 옆으로 폴짝 뛴다.

그때 방금 지나갔던 순찰선이 되돌아오더니 트레이시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착륙했고 안에서 몇 사람이 걸어 나왔다.

“하이디 씨?”

“네?”

엉거주춤한 자세를 바로 하며 답하자 그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휴대용 홀로보드를 건넸다.

“대체 홀로폰은 왜 꺼두고 다니십니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죠.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겠다 싶기도 했고.”

“…퀀텀 연구소에서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우리 지구방위대는 이 의뢰를 최우선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임무라 판단했습니다.”

홀로보드를 받아 얼개를 살핀 트레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럴만하네요. 알았어요.”

“죄송하지만, 지금 바로 블루라인에 가 계셔야 합니다. 언제 출렁임이 발생할지 모르니까요.”

“하루.”

“네?”

“하루만 쉬고 갈게요. 그전까지는 댁이 인탱글먼트 수집기인지 뭔지를 들고 가 계세요.”

“그게, 저는.”

“지구방위대잖아요? 저랑 같은.”

“…알겠습니다.”

기프트를 받지 못한 일반인이라고 주장하려 하였으나 전달자에 불과한 그도 히어로가 얼마나 고생하고 죽음을 가까이 두는지 똑똑히 목격했기에 이번에는 자신이 목숨을 걸기로 결심했다.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정찰선을 타고 떠나는 대원을 본 트레이시는 어깨를 으쓱이며.

“뭐, 좋은 사람이네. 번호 받아둘 걸 그랬나.”

떠나고 나니 잘생긴 얼굴이 떠올라 아주 잠깐 후회한 트레이시는 이내 털어내고는 초기의 목적대로 학창 시절의 추억이 잔뜩 담긴 아카데미로 향했다.

“진짜 아무도 없네.”

입학시험을 치르던 그 동상문을 지나 강의동, 기숙사를 한 바퀴 순회했음에도 인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참, 교감 선생님이 싱크레아에서 아카데미를 차렸다고 했었던가?”

싱크레아로 넘어간 교감, 프리실라 루드라는 전 세계에 흩어져있던 히어로 육성 기관을 반강제로 통합했다.

프리실라는 ‘우주전이라는 특수 상황에 대응한 임시 조치일 뿐’이라는 말로 세간의 논란을 잠재웠으나, 그녀를 잘 아는 사람들은 통합된 아카데미가 다시 흩어질 일은 없다고 확신했다.

이는 남만혁이 학생 시절일 때부터 교감이 주도해온 물밑 공작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어?”

아카데미 한 바퀴 둘러보고 이제 자신의 종아리 근육을 괴롭혔던 마운틴 짐에 가보려는 차에, 교내 한구석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빛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똑똑.

“계세요?”

“들어오거라.”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온기와 함께 뿌연 증기가 흘러나왔다.

“교수님?”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연기를 헤치고 나아가자 트레이시는 웬 온천탕에 수영복 차림으로 몸을 담근 매저드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한껏 온천을 즐기는 듯한 나른한 표정의 안나벨이 눈짓으로 인사했고 말이다.

“두 사람, 지금 뭐 하세요?”

“보면 모르겠나. 건강 찾는 중일세. 자네도 들어올 텐가?”

“…저는 됐어요. 그보다, 싱크레아로 안 가세요? 여기 위험한데.”

“내가 바이올렛을 두고 어딜 간단 말이냐.”

“흥, 만마 학술회 때는 날 두고 잘도 가더니.”

“그, 그때는 내가 혈기왕성하던 시절 아닌가.”

어째 예전과 분위기가 다른 두 사람과 쩔쩔매는 매저드 교수의 모습에 트레이시가 고개를 기울이자.

“크흠! 그래서 여기까진 어쩐 일인가.”

“그냥요. 전쟁이 코앞이라 뒤숭숭하기도 하고. 뭐, 버킷리스트 수행 중이라고나 할까.”

“그게 전부인가?”

“…헤헤, 사실 다음 침공 때 제가 살 수 있을 거 같지 않아서요.”

트레이시 그웬의 특성은 그녀의 선택에 따른 결과를 직감이라는 형태로 알려준다.

모호하기도 하고 악용되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해진다는 것을 어린 시절에 깨달은 그녀는 누구에게도 이 특성의 진짜 능력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죽을 마당인데 숨겨서 무슨 소용인가 싶어 학창 시절 가장 신뢰했던 어른 중 한 명인 매저드 앞에서 푸념하듯 고했다.

“내 눈에는 그렇지 않네만.”

“네?”

“허허,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늙은이에게는 그런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네. 자네는 안 죽어. 그렇지 않나? 바이올렛.”

“그러네요, 가득 끼어 있던 사기(死氣)가 물러가는 걸 보면. 방금 죽을 고비를 넘겼네요.”

“방금이요?”

――――――――――

❖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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