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재각성
트레이시 그웬은 수송선을 타고 블루라인을 따라 날다 가장 선이 희미한 곳에 우주복을 입은 지구방위대원을 발견했다.
그는 통신기 무어라 혼잣말을 해댔는데, 들어보니 유언이었다.
측.
“이봐요, 호들갑 그만 떨고 들어와.”
정령을 이용한 은신을 풀고 1인용 우주선 옆에 붙이자 대원은 밝게 웃으며 트레이시에게 다가가 자신이 들고 있던 출렁임 수집기를 넘겼다.
“수고하세요.”
그러고는 잽싸게 1인용 수송선을 타고 사라지는 대원.
흔쾌히 이곳에서 버티겠다고 수락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다.
“우주가 무섭긴 하지.”
무엇도 자신을 받쳐주지 않는 공허, 세상에 홀로 남은 듯한 감각.
멘탈 강화 훈련을 받은 히어로도 우주전을 마치고 나면 정신 상담을 요청하는데, 일반인이 하루면 오래 버틴 셈이다.
수집기를 들고 블루라인에 가까이 붙은 트레이시 그웬은 혹시나 하여 손을 푸른색으로 발광하는 빛 덩어리에 손을 대 봤으나 탐색팀의 최초 보고처럼 어떤 변화도 없었다.
“신기하네. 차원을 넘어서 이걸 쐈다는 거 아냐. 응?”
뚜뚜—
수집기에서 신호가 잡혔고 트레이시 그웬은 타이밍이 참 기가 막힌다고 생각하며 적외선 정령을 이용해 모습을 숨겼다.
‘15분만 수집하면 된댔지?’
뚜뚜뚜뚜뚜—
그때 미친 듯이 신호음을 내는 수집기.
‘고장 났나?’
트레이시가 수집기를 툭툭 때리는 와중.
쭈욱.
블루라인이 위아래로 하나씩 추가로 생기는 것을 목격하곤 급히 통신 채널을 열고 외쳤다.
“여기는 제타 히어로 팀, 하이디. 블루라인이 늘고 있다! 현재 3개 아니, 5개!”
안토니오 골든우드에게로 연결된 통신 채널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다가 이내 짓씹는듯한 목소리로 퇴각 명령이 내려왔다.
-전원 블루라인에서 떨어져라. 기뢰 설치팀과 수집팀도 마찬가지.
대장의 말에 트레이시도 곧장 퇴각하려 하였으나 퀀텀피직스 연구소와 연결된 통신 채널에서 다급한 박사의 음성이 들여왔다.
-하이디! 조금만. 15분만 버텨주게. 그래야 다음 출렁임 때 우리가 닫을 수 있어!
“그러다 내가 죽으면?”
-…120억 인류와 역사가 자네를 영원히 기억할 걸세.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쏘아붙이려던 트레이시였으나 이내 싱크레아에 있는 지인을 떠올리며 한숨과 함께 수락했다.
“후, 알았어. 근데, 그건 알아둬. 만약 내가 살아서 돌아가잖아? 당신 편하게는 못 살 거야.”
-그, 그게 무슨 말….
측.
통신을 닫은 트레이시 그웬은 정신을 집중해 자신의 흔적을 숨기는 데 집중했다.
뚜뚜—
빠각!
시끄럽게 울리는 수집기의 스피커를 뜯어버리고 타고 온 수송선을 자동 운행으로 돌려 지구로 보냈다.
흔들리는 블루라인 앞에 오롯이 혼자 남은 트레이시 그웬은 호흡을 고르며 수집기를 푸른 선에 대었다.
우웅.
수집기가 작동하기가 무섭게 블루라인이 출렁였고 위아래로 쩍 벌어지더니 다른 공간 저편으로 연결되었다.
더욱 깊은 우주, 그 안으로 보이는 엄청난 숫자의 빛.
저 별보다 많은 발광체가 아줄의 함선이라는 것을 알아챈 트레이시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적어도 5천만.’
운명이 갈릴 뻔했던 4차 침공의 10배. 트레이시는 그제야 자신의 특성이 왜 죽음을 예견했는지 이해했다.
‘나만 죽는 게 아니라, 싹 다 죽는 거구나.’
밀려오는 함선들이 차원 너머에서 마법을 차지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1열에서 관람하던 트레이시는 큭큭 웃으며 응급처치용 붕대를 뜯어 자신의 팔과 수집기를 묶었다.
그녀는 죽더라도 임무는 완료하고 죽을 생각이었다.
‘박사 새끼는 마음에 안 들지만, 할 건 해야지. 그런데 이렇게 중요할 때 그 두 연놈은 대체 어디서 뭐 하는 거야!’
쯔우웅.
지구를 향해 쏘아지는 광대한 마법들. 지금까지와는 규모가 다른 위용에 트레이시 그웬을 포함한 히어로와 지구방위대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홀리….”
아무리 도수정이라도 지구 전체를 보호할 단절은 펼치지 못한다. 잘해봐야 반구 정도일까.
아니나 다를까, 북반구 쪽에 희미한 막 같은 것이 생기더니 저들의 공격 일부를 막아낸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막힌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마법들이 지구의 대기를 찢고 지표에 충돌하려는 순간.
측.
전체 채널이 열렸고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허허, 이쪽은 걱정하지 마시게.
그랜드 위저드 매저드.
그의 발언 이후 지구로 향한 모든 마법이 한순간에 마나 알갱이로 화해 우주로 녹아들었다.
트레이시 그웬도 한 때 그의 아래에서 마법을 수학했기에 저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디스펠 에어리어?”
모든 마법을 분해하는 디스펠 마법이 상시 적용되는 영역.
이것을 지구를 덮을 정도로 전개하는 매저드 교수의 마나량에 입을 다물지 못했으나 이내 질타하듯 들려온 그의 음성에 정신을 차렸다.
-다음 공격을 막는 게 한계야. 뭣들 하나? 지구를 지키겠다는 작자들이 이 노인네만 고생시킬 셈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스승님. …적의 주포가 대기 상태인 지금이 기회다. 전원 작전에 따라 공격하라.
트레이시 그웬은 서서히, 하지만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함선들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팔을 뻗으면 닿을 것 같으나 실제로는 꽤 떨어진 곳에 있던 함선 한 대가 돌연 감속하더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곤 몸이 얼음처럼 굳었다.
‘들켰다!’
거의 바로 앞에 정지한 함선에서 채찍을 닮은 속박 마법이 펼쳐져 자신을 휘감으려 하기에 재빨리 몸을 비틀며 거리를 벌렸으나.
휘릭.
“윽!”
이미 발목이 붙잡힌 뒤였다.
그대로 함선 안으로 끌려간 트레이시는 아줄들에게 둘러싸였고 이내 자신의 이마에 손을 대려는 모습에서 기억을 읽히겠다고 직감하곤 자결을 결심하려는 찰나.
“잠깐.”
“프로페서?”
“임시라고는 해도 내가 이 함선 주인인데, 이렇게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게 맞냐?”
“긴급 상황에서는 선조치 후보고가 통용됩니다만.”
“오, 그래? 아문 형님께 한 번 물어볼까?”
“…죄송합니다.”
“쯔쯔, 이 인간은 내가 데리고 놀 테니까, 볼일들 봐.”
“이번 건은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
“허이고, 쪼잔한 새끼. 맘대로 해라. 나 같은 악마랑 기 싸움해서 무슨 이득을 보겠다고.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니 만년 2등급 시민이지.”
“큭!”
“내 위는 아문 형님인데, 니가 뭐 어쩌게. 3등급으로 내려치기 당하기 싫으면 그냥 입 다물고 명령에 복종이나 해. 그럼 혹시 알아? 너의 충심에 감동한 내가 아문 형님에게 네 이름을 언급할지?”
“정말입니까?”
“네가 하기 나름이지. 아무튼 꺼져.”
“…예.”
트레이시 그웬은 지금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네가 왜 여기—”
“쉿. 내 방으로 가서 이야기하자.”
* * *
남만혁은 자신의 영역으로 외부의 관찰과 개입을 완벽히 차단한 뒤, 트레이시 그웬을 풀어줬다.
강하게 묶였던 팔과 발목을 돌리며 안도의 숨을 쉰 그녀는 남만혁을 올려다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블루가 허둥대던 건 전부 네가 내부에서 공작한 덕이고 지금은 블루의 왕을 죽이기 위해 잠입해 있다고?”
“요약하면 그렇지. 다음이나 다다음 주포 공격에 섞어서 뒤통수 치고 튀려고.”
“지구가 못 버티면?”
“스승님 계시잖아.”
“어떻게 알아.”
“안나벨 곁을 떠날 분이 아니거든.”
바이올렛과 쌓은 추억이 가득한 지구를 파괴되게 놔둘 분도 아니고, 라는 말을 덧붙인 남만혁의 추가 설명에 트레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있을 줄은 알았지만, 그런 사이셨을 줄이야. 하여튼 알았어. 그래서 지금부터 어쩔 건데.”
“왕이 죽으면 블루 모성으로 돌아가서 여러 개의 블루가 되도록 찢어두려고. 지구는 생각도 못 하게.”
“왕이 살아남으면?”
“그러면 뭐, 기도메타로 가야지.”
“무슨 기도.”
“우리의 슈퍼히어로, 퀸이 해결해주길 바라는 기도? …그런데 퀸 어딨냐?”
“너랑 같이 간 거 아니었어?”
남만혁은 이 순간 소거법으로 몇 개의 경우의 수를 쳐내자 가장 그럴듯한 가설 하나가 남았다.
“설마….”
* * *
“불가능하옵니다.”
“왜.”
지금까지 꼬박꼬박 존대하던 그레이스 멜론이었으나 지구로 차원 이동이 어렵다는 보고를 듣자 절로 반말이 튀어 나갔다.
“그, 그게 블루 놈들이 출진의 규모를 크게 확대하는 바람에 좌표 계산이 어그러졌습니다. 저희는 왕의 친정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계산하면 얼마나 걸리죠?”
싸늘한 그레이스의 눈빛을 받은 대신은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트리며 답했다.
“3시간은 필요합니다.”
“오래 걸리네요. …지금 출진한 블루의 규모는 어느 정도죠? 그리고 왕은 얼마나 강한가요.”
“국경에서 함대가 빠지는 규모로 보면 5천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블루의 왕은 글로리아 차원에서 두 번째로 강합니다.”
“첫 번째는요?”
“폐하이십니다.”
“…지구의 전력만으로는 왕을 막기 힘들겠죠?”
“당연합니다. 아, 물론 폐하에 준하는 무용을 지닌 분이 계신다면 고향별이 파괴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레이스는 순간 매저드 교수와 남만혁을 떠올렸으나 두 사람 다 이번 전쟁에 참전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1시간 안에 여세요.”
“노력하겠습니다.”
“돈과 사람 모두 갈아 넣어서라도 여세요.”
“예, 옙!”
순간 베르데의 대신들이 패황의 격이라 칭하는 기세를 자신도 모르게 뿜어낸 그레이스는 사색이 된 대신들이 물러가자 불안한 마음을 발라르카에게 토로했다.
“함선만 5천만이라는데, 우리가 갈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글쎄. 로맨이 있으면 괜찮을지도?”
“왜?”
“걔, 물 구현하잖아. 우주에서 물은 엄청난 무기가 되거든. 1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걸?”
“아!”
“뭐, 지구의 해변 수준의 규모면 소용없는 데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본인이 죽겠지만.”
“발라르카.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알았어, 너는 꼭 로맨 이야기만 하면 그러더라.”
“흥.”
* * *
“엥?”
남만혁이 뜬금없는 탄성을 내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열세인 지구방위대를 응원하던 트레이시 그웬이 돌아본다.
“왜? 어, 너 눈이.”
거울로 자기 눈을 들여다본 남만혁은 머릿속으로 주입되는 정보들을 살피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습관을 들인 보람이 있네.”
남만혁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부터 눈을 뜨면 미르토스 해변을 초소형으로 압축 구현해 최대한 유지하는 습관을 들였고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어왔다.
어쩌면 늦었다고도 볼 수 있었으나 남만혁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이 바로 재각성이 가장 필요한 순간이었으니까.
“재각성한 거지?”
“응, 미르토스만.”
해변을 구체 형태로 구현한 남만혁이 손바닥으로 밀자 트레이시를 향해 날아간다.
“겨우? 이거로 뭘 하기에는, 헛? 뭐야.”
트레이시가 검지로 쿡 찌르자 관통해야 할 손가락이 깊숙이 빨려 들어간다.
“바다를 그 크기로 줄여둔 거라.”
“…이거, 얼마나 키울 수 있어?”
강한 압력을 받아 바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움켜쥐고 아직도 푸르게 빛나는 남만혁의 두 눈을 보며 묻는 트레이시.
“글쎄, 해봐야 알겠는데.”
그녀는 어쩐지 눈앞의 남자가 악마 같은 웃음을 짓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웃음이 멋있다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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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