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암습
“그것의 준비는?”
“모두 갖춰졌사옵나이다. 왕이시여.”
사령탑주의 확언에 고개를 끄덕인 아줄의 왕, 아문은 푸른빛으로 일렁이는 차원의 선 너머를 가리켰다.
“전진하라.”
* * *
아줄의 선봉 함대는 다중 실드를 두른 채 지구방위대 설치팀이 깔아둔 기뢰를 과감하게 선체로 부딪치거나 사격해 폭파시켰다.
그 광경을 아줄의 진영 좌익에서 지켜본 남만혁은 입맛을 다시며 일어나 옆에 놓아둔 우주복을 집어 들었다.
“지금 하게?”
“어,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괜히 촐랑대다가 혼자 남지 말고.”
“뭐래, 내가 애냐. 읏.”
헬멧을 들고 트레이시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에 푹 씌우는 남만혁.
“우주복 한 벌뿐이야? 너는?”
“나는 괜찮다.”
“야.”
남만혁의 몸은 마나로 이루어졌기에 영역만 전개한다면 우주에서도 큰 어려움 없이 생존할 수 있다.
“그런 거 아니다. 그리고 다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잘 들어, 지금부터 이놈들에게 한 방 먹이고 튈 건데, 어리바리 까다가는 너나 나나 다 죽어. 정신 차리라는 소리야.”
“알았어.”
선봉이 길을 뚫고 2진 3진의 주포에 대량의 마나가 응축되는 것을 감지한 남만혁의 행동이 빨라졌다.
남만혁은 재각성 이후 계획을 급히 수정했다.
본래 이 함선의 주포로 왕을 암살할 계획이었으나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당장의 5천만 함대를 처리할 방도가 없다.
그래서 임기응변으로 떠올린 것이 바로.
“미르토스.”
남만혁은 의지력을 한계까지 짜내 미르토스 해변을 압축했고 이어 그것을 움켜쥐며 외쳤다.
“영역, 전개.”
포이즌 마법을 매개로 삼듯, 남만혁은 자신의 첫 번째 낭만을 매개로 삼아 영역을 펼쳤다.
“윽.”
일순 폭발하듯 터져 나온 막대한 양의 마나에 트레이시 그웬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엉덩이를 매만지며 일어나며 남만혁을 살피자 그는 주홍빛 뿔을 드러낸 채 벽을 짚고 서 있었다.
‘마나 고갈?’
아무리 위장을 잘했다고는 하나 적진 한중간에서 남만혁을 챙겨 지구방위대로 복귀할 자신이 없어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민하는 그때.
다시 동공에 초점이 생긴 남만혁이 여느 때처럼 익살스럽게 웃자 그제야 졸였던 마음을 놓는 트레이시였다.
“이 자식이, 갑자기 분위기 잡고 난리야. 쫄았잖아!”
“크크, 됐다. 가자.”
“뭐 했어?”
“나가보면 알아.”
남만혁은 트레이시를 자신의 영역으로 감싼 채 개인실 밖으로 나왔고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곤 크게 만족했다.
“잘 얼었구만.”
함선 내부는 우주의 온도를 들여온 듯, 차갑게 얼어붙은 채였다.
“이게, 네 영역이라고?”
“반쯤 우주 덕이긴 하지만. 뭐, 그런 셈이지.”
본래라면 물이 우주에 나오는 순간 압력이 낮아지면서 끓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남만혁의 마나와 의지력을 머금고 증폭된 엄청난 양의 물은 자체적인 압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온전히 주인의 의지에 따라 우주의 온도만 받아들여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FF나 칠링 남매가 보면 좋아하겠네.”
트레이시는 남만혁이 구현한 작은 영역 밖으로 손가락 끝을 내밀었다가 쩌저적 살얼음이 어는 모습에 히익, 기겁하며 재빨리 손을 회수했다.
“촐랑대지 말라니까.”
“알았어, 그런데 이거 범위가 어느 정도야?”
“글쎄, 딱히 경계를 정하진 않았어서.”
깡!
얼음이 된 블루를 발로 걷어차 부수며 기관실로 향한 남만혁은 메인 마나 코어를 발견하곤 다가갔다.
“리쳇.”
손목의 시계에서 선을 뽑아 마나 코어에 연결하고 잠시간 기다리자 리쳇이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잠시만. …오케이. 시동 걸릴 거야.
그으으응.
멎었던 함선의 설비들이 삐걱대며 돌아가는 모습에 남만혁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손을 비볐다.
“좋아, 추가타를 먹여볼까.”
-마나 충전만 해, 나머지는 내가 할게.
남만혁은 자신의 남은 마나량을 가늠하다 멀뚱히 서 있는 트레이시 그웬을 잡아당겨 마나 코어에 손을 올리게 했다.
“마나 좀 넣어라.”
“내가?”
“나는 지금 영역 유지하기도 버겁다. 이거 풀리면 너만 죽어.”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줘.”
몇 번의 설비 조작과 설명 끝에 주포로 트레이시의 마나가 주입되는 것을 확인한 남만혁은 리쳇에게 물었다.
“주변 상황은 어때?”
-영역 내부의 선원들은 대부분 동사. 왕은 아슬아슬하게 범위에 걸쳐서 살았네.
진형상 남만혁의 위치는 좌측 끝 쪽이고 아줄의 왕은 중앙 후방에 위치한다.
영역이 그 근처까지 닿았다면 암살에는 실패해도 적의 수를 상당히 쳐냈다는 뜻이었기에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주포는 빗나가겠지?”
총사령관 함도 얼었으면 모를까, 이 상태라면 쉽게 회피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겠지.
“각도 조금 수정해서 여기, 부사령관이 탄 함선 날리자.”
-오, 이건 통할 거야. 사령관 함이 피하면 맞을 수밖에 없는 위치네.
“끝! 더는 못해.”
헉헉대며 주저앉는 트레이시를 바라본 남만혁은 엄지를 세우곤 곧장 일정한 마나 파동을 코어에 불어 넣었고 직후, 주포에서 거대한 고드름이 생성되어 튀어 나갔다.
“나머지는 운명에 맡기고 우리는 가자.”
고드름에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함선 밖으로 빠져나온 남만혁과 트레이시 그웬.
바깥은 마치 각얼음 속에 들어온 듯한 광경이었다.
남만혁은 이 얼음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조금씩 제어가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곤 길을 뚫으며 이동했다.
“리쳇, 얼마나 남았어?”
-지금 가는 방향으로 15m 정도. …적 공격! 후방!
리쳇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음 바깥에서 아이시클 함대의 대규모 공격이 쇄도 해왔다.
얼음을 아무렇지 않게 부수며 들어온 고드름들이 남만혁의 옆을 스쳐 간다.
-하나 더 온다! 피해!
“피하면 늦어. 도수정, 지금!”
통신기에다 대고 구명줄의 이름을 외친 남만혁은 자신의 뒤에 따라오는 트레이시의 팔을 움켜쥐고 앞으로 던졌다.
“꺄아악.”
잠중함 2호에서 리쳇과 통신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도수정은 신호가 떨어지자 약속된 지점에 단절벽을 쳤다.
트레이시는 아슬아슬하게 단절벽 뒤로 숨었으나 남만혁은 그대로 몸이 거대한 고드름에 관통당해 단절벽에 꽂혔다.
그리고 그 모습을, 트레이시는 무력하게 보아야만 했다.
“안 돼!”
* * *
“피해의 규모는?”
“이번 전장에 투입된 전력의 3할은 전투 지속이 불가능하옵니다.”
“원인은 밝혀졌나?”
“이 광역 동결의 중심지는 그 악마가 탄 함선이옵니다.”
“악마가 계약을 어기기도 하는가.”
“드물기는 하나 본인의 영혼보다 더 값진 것을 지키기 위해 계약을 어긴 악마가 고대에 존재했다고 합니다. 명하시면 더 상세히 조사해 올리겠습니다.”
“되었다. 이제 와서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저 배신한 악마 놈을 죽여라.”
“예!”
광역 동결 마법과 은밀히 날아온 고드름을 간신히 피한 아줄의 왕은 악마를 자신에게 데려온 사령탑주의 의도를 의심했으나 곧 머리에서 지웠다.
“아직은 쓸모가 있으니.”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네가 신경 쓸 것 없다. 그보다 이 날파리들 정리는 얼마나 걸리겠느냐.”
좌익이 얼어붙자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지구 측 함대에 짜증을 느낀 왕이 묻자 신하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답했다.
“하루 안에 정리하고 지구를 반으로 쪼개겠습니다.”
“그대의 기백은 훌륭하나 저 하위종 놈들을 만만히 여기지 말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아줄의 왕이 전황을 살피며 지시를 내리던 중, 낭보가 전해져왔다.
“악마를 처리했습니다.”
통신관이 들뜬 얼굴로 어느 함선의 장군이 저격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이었고 상세한 내용을 들은 왕은 흡족해했다.
“그에게 이번 전쟁이 끝나면 기대해도 좋다고 전하도록.”
이후 아줄의 함대는 동결된 아군 함을 수습하는 여유를 부리면서도 전선을 밀어붙이는 위용을 뽐냈다.
아무리 히어로들이 분발하고 발키리, 고드름 함대가 기적 같은 활약을 한다 해도 압도적인 전력 차이 앞에서는 한계가 명백했다.
그나마 남만혁이 좌익을 붕괴시킨 덕에 이렇게라도 항전할 수 있는 것이었고, 이는 누구보다 안토니오 골든우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죽어? 그놈이요?”
“하이디와 단절공이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영상도 여기….”
부관이 가져온 영상을 확인한 안토니오는 눈을 꾹 감고는 나지막이 욕을 뱉었다.
“병신같은 새끼. 화려하게 가던가. 히어로라는 놈이 병신처럼 도망치다 죽어?”
“하이디를 지키다가 그렇게 됐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이 소식이 퍼지는 건 막으세요. 동요할 사람이 많습니다.”
부관은 당신도 그런 거 같다는 말을 입 안으로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히어로 중에 이탈자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놔두세요. 이름은 적어두시고.”
“알겠습니다.”
첫 교전 이후 발생한 사건들에 대해 간략히 보고를 마친 부관은 잠시 지구방위대 대장의 눈치를 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침공, 저희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안토니오는 무심결에 고개를 저으려다 바로 세웠다.
치밀하게 전략을 짜고 행동하는 남만혁이 고작 적의 3할을 줄이는 것으로 목숨을 다했다.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그 이상으로 해낼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심정을 대장이라는 자리에 앉은 자신이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알기에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 * *
아줄 6차 침공, 45분 경과.
지구를 둘러싸고 있던 발리키 함대는 고철 덩어리가 되어 우주를 떠돌아다녔고 고드름 함대는 마나가 고갈된 마법사들의 관짝이 되었다.
글로리아 차원에서 베르데를 만나기 전까지 불패의 신화를 썼던 그들의 물량과 마법이 하위차원을 향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라 하겠다.
“록시, 네가 무리 좀 해야겠다.”
록시는 가슴이 뻥 뚫린 채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고 말하는 자신의 상관이자 괴물을 께름칙한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해보죠. 그런데 괜찮습니까?”
“뭐? 아, 이거. 문제없어. 마나 모이는 대로 재생될 테니까.”
남만혁의 육체는 자신의 인지에 부조화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생성된 요식행위에 가깝다.
그는 충분한 마나만 존재하면 머리가 날아가도 재생되는 생물이다.
“처음부터 말했어야지. 내 심장만 괜히 고생했잖아!”
웜홀을 타고 온 잠중함에 의해 구출된 트레이시가 남만혁을 정강이를 걷어찬다.
“설명할 시간이 있었냐. 그보다는 이번 작전에 집중해. 아, 너는 먼저 복귀해도 돼.”
이번 작전에 자신이 맡은 일이 없다는 것을 안 트레이시는 혀를 차며 의자에 다시 앉았다.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잠중함으로 웜홀을 열어서 적 사령관 함과 충돌. 혼란한 틈을 타 저와 제독님이 적함 내로 잠입해 블루의 왕을 암살. 이후 제 특성으로 탈출. 맞습니까?”
“정확해.”
“통할까요?”
“무조건. 두 번 암습할 거라고는 예상 못 할 테니까. 게다가 블루가 거의 학살하다시피 전선을 찢는 중이니까 방심할 순간이기도 하고.”
“일이 틀어지면, 저 혼자 도망쳐도 됩니까?”
“야.”
“농담입니다.”
전혀 농담 같지 않았기에 남만혁은 어느 때보다 더 집중해서 작전에 임하기로 결심했다.
――――――――――
❖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