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기숙사에서는 프리드를 보았다. 그는 한창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하르, 너 진짜 안식기간에 가문에 안 돌아갈 거야?”
“프리드, 말했잖아. 나 검성님한테 따로 가르침을 받는데다가 안식기간에 용병일로 돈을 좀 벌거라고.”
“맞다, 그랬지. 그럼 나는 이제 이만 가봐야지. 안식기간 끝나고 보자.”
“응, 그래.”
내게 작별인사를 고한 프리드는 아카데미를 떠났다. 기숙사에 남아있는 건 나밖에 없는 듯 사방이 조용했다.
아직 안식기간이 오지 않았음에도 대다수의 학생이 가문으로 귀환했다. 하긴 시험 이후엔 따로 성적과 출석을 신경 쓰지 않기에 보통 이 기간 때 내려간다고 들었다.
실제로 아카데미와 가문의 거리가 먼 학생도 있기에 아카데미에서 아직 안식기간이 아님에도 가문에 돌아가는 것을 용납해준다고 하였다.
괜히 복도에서 기대어 서있자 나와는 조금 어색한 녀석을 발견했다.
“모레드트….”
모레드트도 나를 발견한 건지 한 번 얼굴을 찌푸리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강의 때문에 여러 번 마주쳤지만 매번 같은 반응이었다.
“쟨 변함없네.”
이젠 오히려 재밌을 지경이었다. 나쁜 녀석이라고 생각되지만 이렇게까지 나를 무시하는 걸로 보아 오히려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다만 착각이 아닐 수도 있는 게 실제로 강의 때 내가 약간 어려워하면 은근슬쩍 내게 도움을 주곤 했다.
“뭐, 진실은 저 녀석만 알겠지만.”
이제 나는 모레드트를 딱히 나쁘게 보진 않았다.
***
방에 들어온 모레드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을 내가 오해했다는 건 알겠지만….”
모레드트가 실제로 본 수하르는 자신의 들었던 것과 달랐다. 보아하니 가망이 없어서 후계자 경합을 포기한 걸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첫 만남이 좋진 않았기에 마냥 친근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그저 몰래 도와주는 정도로 수하르에 대한 사죄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녀석도 가문에 안 돌아가나 보네.”
모레드트는 한 번도 특정 누구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묘하게 자꾸 수하르에게 눈길이 갔다.
그렇기에 모레드트는 이번 안식기간에 수하르와 화해를 하고 친해져보자고 다짐했다.
안식기간이 오고 모두가 떠났다. 학생이 몇 명밖에 남지 않은 아카데미는 고요했다.
“좋네.”
이런 고요함이 좋았다. 에아 키르턴도, 프리드도, 많은 학생들이 떠났음에도 외로움보다 편안함이 컸다.
“이것도 추가해야겠네.”
내 미래의 힐링라이프에 한 가지 조건이 추가되었다. 고요함.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고요한 곳에 살아야겠다고 추가했다.
눈을 감고 마나호흡법을 돌리던 나를 노크 소리가 방해했다.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누구세요.”
“…….”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내가 옆방소리를 잘못 들은 건가 싶을 때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 모레드트야.”
“아… 들어와도 돼.”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새빨간 얼굴에 모레드트였다. 꼼지락거리는 모레드트는 수줍어하는 것 같아보였다.
나는 모레드트에게 딱히 악감정은 남아있지 않지만 괜히 놀리고 싶은 마음에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무슨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거야?”
“저… 그… 미안했다.”
“뭐가?”
작게 중얼거리며 수줍어하는 모레드트의 모습은 겁먹은 강아지처럼 보였다.
“그 학기 초부터 너 무시하고 그런거….”
“하하하하.”
나는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갑작스레 내가 웃으니 모레드트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치였다.
“그런 건 잊은 지 오래야.”
“그냥 내가 미안해서… 그리고 너랑 친해지고 싶다.”
용기를 낸 모레드트를 보니 내게 자존심이 강한 동생이 있다면 저런 느낌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모레드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할 말이 있다. 학기 중에 나 몰래 도와주느라 수고했어.”
내 손을 모레드트가 잡았다.
“그거 알고 있었구나.”
나와 모레드트의 앙금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애당초 앙금이라 할 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궁금한데 왜 나를 그렇게 무시한 거야?”
“사실은…….”
모레드트는 나라는 사람을 오해했다고 말했다. 모레드트는 내가 후계자 경합을 자진사퇴한 게 가망이 없다고 포기해버린 인물이라 짐작했다고 했다.
“에이, 난 그냥 쉬고 싶어서 포기한 거야.”
“뭐?”
“너 귀족이 하는 일이 뭔지 알아?”
모레드트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생각을 마친 모레드트가 말했다.
“영지관리와 주변 귀족간의 화합?”
“그렇지. 그런데 그 영지관리가 엄청 빡세단 말이지.”
“어…? 그거 보통은 다 도와주는 가신들이 있잖아.”
“모레드트, 생각을 해봐.”
내 말에 모레드트가 다시 생각에 잠겼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영지관리를 가신들이 아무리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최종승인은 영주가 하는 거야. 당연히 영주는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이겠지.”
“그렇지.”
“그럼 결국 모든 사안이 최종적으로 귀족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게 적은 일이 아니야. 남작이나 자작 정도면 모르겠는데 백작이나 그 위의 귀족이라고 생각해봐.”
보통 귀족은 작위가 높을수록 다스리는 영지도 넓거나 많았다.
“진짜 죽어가는 거야. 너희 아버지는 공작이시잖아? 너 끼니를 거르고 일하는 아버지 본 적 없어?”
곧바로 모레드트가 대답했다.
“봤지.”
“그렇지! 끼니를 거를 만큼 귀족의 일이 힘들다는 거야.“
이런 내 열변에도 모레드트는 내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뭐, 결국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그렇게 힘들게 일할 생각이 없어.”
회귀 전에 많이 고생했으니 말이다. 모레드트가 고개를 저었으며 내게 말했다.
“그래도 너랑 다르게 나는 가주가 될 거야. 일이 많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어.”
“그건 너의 자유니까, 내가 뭐라고 할 게 못 되지.”
“그래도 이제 너에 대해서 조금 알겠어.”
내가 아카데미에서 보여주었던 모습과 다르게 게으른 생각을 가진 나였지만 딱히 모레드트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속이 후련해 보이는 모레드트였다.
“나는 게으른 건 별로 개의치 않거든. 가망이 없다며 시도조차 안 하고 포기하는 게 싫을 뿐이지.”
***
팔짱을 진 검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구나.”
“헤엑….”
새벽훈련을 마치고 온 탓에 온몸에 힘이 없었다. 검성이 곁눈질로 나를 훑어보았다. 내 옷은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래도 열심히는 했구나.”
“네!”
“그래서 오늘부터 나는 네게 검술을 가르쳐줄 생각이다.”
드디어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들떴다.
하지만 이어진 검성의 말에 나는 실망해버렸다.
“물론 사르키드 가문의 비전 검술은 아니다.”
“예?”
“이 녀석아, 핏줄도 아닌 녀석에게 가문의 비전을 알려주겠느냐. 나한테 딸이나 손녀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도대체 어떤 검술을 가르쳐주는 걸까.
“너도 들어는 봤겠지?”
“어떤걸요?”
“모든 검술은 기본동작으로 시작된다는 말이다.”
세로베기, 가로베기, 찌르기의 세 동작이었다.
“당연히 알고 있죠.”
“그 세 동작을 바탕으로 너는 새로운 검술을 만들거라!”
검성의 말을 듣자마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헛웃음에 뒤늦게 입을 가려보았지만 검성은 가차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정수리 부근에서부터 통증이 몰려왔다.
“윽.”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다. 검성은 그런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자고로 검술은 기본동작만 제대로 익혔으면 누구나 만들어낼 수 있다. 다만 그 검술의 뛰어남은 사람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겠죠.”
“그리고 검술에 있어 세 가지의 요소가 있다. 힘, 속도, 기술.”
“아, 그건 강의 때 들어서 알고 있어요.”
검술의 기초 강의에서 나온 내용이었다. 이 세 가지를 중심으로 조화를 이루거나 하나의 극한으로 다루는 것이 좋은 검술이라고 하였다.
“이 세 가지만으로 여러 형태의 검술이 나온다. 힘에 집중하면 누구보다 강한 파괴력이 나오고, 속도에 집중하면 누구보다 빠르게 휘두르거나 찌를 수 있고, 기술에 집중하면 누구보다 현란해지는 거지.”
“네.”
“그렇다면 검술을 어떻게 만드는 것이냐!”
드디어 듣고 싶은 이야기가 나왔다.
“의지다!”
“네? 의지요…?”
“네가 의지를 가지고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검술이 점점 발전되는 거지. 만약 네가 그 누구도 막지 못할 파괴력을 원한다면 의지를 담은 수백 번의 내려찍기로 점점 완벽한 자세를 갖춰지는 거다.”
음, 솔직히 믿기지 않은 이야기였다. 칼데르트 가문의 검술이 하도 보잘것없었기에 내가 잘 모르겠는 것일지 모르겠다.
검술이라기보다 비기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하여튼 네가 할 일은 네가 원하는 검술을 생각하며 매일 검을 휘두르는 거다. 그러다 보면 점차 너만의 검술이 만들어질 것이다.”
여전히 믿기지 않은 이야기지만 일단은 믿어보기로 했다. 감을 키우는 훈련도 처음엔 믿기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위기감지라 할지 살기를 느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럼, 저는 매일 의지를 담은 검을 휘두르면 되는 걸까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또 뭐가 더 필요한데요?”
“대련이다. 그런데 마땅히 대련 상대가 없으니 한동안은 내가 대련해주겠다.”
한 가지 사실을 바로 깨달았다. 검성이 나와 대련한다고 생각해보았다. 중간에 어떻게 되건 결말은 내가 검성에 맞는 걸로 끝이 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오전에도 맞고, 오후에도 맞겠구나.’
안식기간의 평일은 검성에게 하루 종일 맞는 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래를 예측한 나는 눈물을 머금으며 말했다.
“검성님, 감사합니다!”
내 대답에 흡족하다는 미소를 지은 검성을 보니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빨리 아카데미에서 졸업해서 검성한테 도망치든가해야지.’
왜 아버지가 검성에게 이런 부탁을 하신 건지 아버지를 원망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안식기간에 맞이하는 첫 주말은 유적을 가기로 했었지만 가지 않았다.
‘내 검술을 어느 정도 만들고 나서 가보자.’
내가 만들 검술로 오크들을 상대하면 내 검술에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전날까지도 기본동작 세 가지에 각각의 의지를 담아 휘둘렀고, 검성과의 대련을 통해 점점 나만의 검술이 만들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다만 칼데르트가의 검술도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야, 회귀 전에는 칼데르트 검술을 익혔으니 어쩔 수 없지만.’
습관이라는 게 무서운 법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주말은 오전에 내 검술을 다듬으며 오후에 실버 용병으로 승급하기로 결정했다. 승격 임무로 내려진 다섯 가지의 임무는 생각보다 쉬웠다.
굳이 다섯 개를 모두 할 필요가 없이 세 가지만 완수하면 됐다.
그렇게 숙고 끝에 나는 하루 안에 끝날 수 있을 법한 임무 세 가지를 골랐다.
“고블린 다섯 마리 처치, 수상한 동굴 탐사, 야광초 스무 개 채집.”
이 세 가지 임무였다. 고블린은 주로 동굴에 살고, 야광초는 어두운 곳에서 자란다.
즉, 운이 좋다면 수상한 동굴을 탐사하며 야광초를 수집하고, 고블린까지 처리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수상한 동굴에게 고블린과 야광초가 있다는 전제하에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