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영주는 쉬고 싶다-25화 (25/150)

#25화.

회귀 전의 제이콥은 절대로 저렇게 수줍음이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왠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귀 전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기 때문인지 감정이 무딘 사내였으나 지금은 아니란 소리니까.

“제이콥, 오랜만이구나.”

“도련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 데일 경에게 고집을 부렸습니다.”

제이콥이 데일을 쳐다보았다. 데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숙이는 제이콥.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제이콥에게 감사받을 일이 있었나.

“데일 경에게 들었습니다. 체키 마을로 오신 것도 도련님 때문이고, 고블린에게서 저희 마을 구해주신 것도 도련님 덕분이라고요.”

“아···.”

물론 제이콥을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감사를 받을만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회귀한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보기엔 우연이 겹친 것뿐일테니.

“우연이었는데···.”

“아닙니다. 그 우연이라도 저희 마을에 큰일이 닥칠 뻔했습니다.”

하긴 내가 가지 않았으면 그곳은 참상이 벌어졌을 예정이었지.

“마을사람들 모두가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도련님이 마을에 방문해주지 않았다면···.”

생각도 하기 싫은지 제이콥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 감사는 받아둘게.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뭐든 물어봐주십쇼.”

“어떻게 오르트 단장님의 종자가 된 거야?”

데일에게 제이콥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궁금했다. 그 깐깐한 오르트 단장의 눈에 어떻게 들었을까.

회귀 전의 제이콥은 분명 기사가 아닌 사무계열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사가 되었다.

어떻게 이 궁금증을 참을 수 있겠는가.

제이콥이 어떤 천재성을 가지고 있길래 오르트 단장의 눈에 들었을까.

“네 이야기를 들려주렴, 제이콥.”

기대 어린 내 시선을 못 이긴 제이콥이 입을 열어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는 매번 거절했음에도, 점점 후계자 경합에 다시 참여하는 게 확실시 되어가고 있었다. 이대로면 다시 경합에 참가하게 된다.

그것만은 안 된다.

“방법이 없을까.”

그냥 후계자 경합을 다시 참여하는 것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일부러 대충하는 거지.

하지만 분명 나는 대충할 수 없을 거다.

“웬만한 후계자 경합에서의 임무가 영지민을 위한 것이니까.”

죄 없는 영지민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 그럼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

“가출···.”

이것만큼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기고 싶었다.

어떡해야하는 걸까. 하지만 가출 말고는 마땅히 떠오르는 대안이 없다.

“가출···.”

해야겠지.

“편지를 남겨야겠어.”

그저 찾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편지에 적을 생각이다.

후계자가 확정될 쯤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적으면 되겠지.

“테시아르 어머니에겐 따로 편지를 보내야겠어.”

몇 번의 대화 끝에 옛날처럼 사이가 돌아가는 중이다. 이러던 중에 가출을 감행하면 테시아르 어머니가 많이 슬퍼하시겠지.

가끔은 몰래 오겠다는 말을 적어두면 테시아르 어머니도 안심하실 거다.

“그렇다면 이제···.”

짐을 꾸렸다. 많은 짐은 아니었다. 그저 간단히 여행할 수 있을 만큼의 짐. 나머지는 가출지에서 사면 된다.

이제 어디로 가출을 할지 정했다. 그리고 아자르 교수가 강의 중에 했던 말이 기억났다.

-용병을 할 거면 자유도시에서 하는 게 최고다. 자유도시만큼 용병을 찾는 데가 따로 없다.

“로토 왕국이랑 가장 떨어진 곳에 있는 게···.”

대륙에는 2강 4중 2약 나라가 있다.

2강은 미케네르 제국과 나테아르덴 제국.

4중은 로토 왕국과 배넌 왕국, 폴커니 왕국, 에피아 신성제국.

2약은 포르티 왕국과 팸 왕국.

이렇게 총 8개의 나라가 존재했다. 그리고 이 8개의 나라를 제외하고, 남은 게 자유도시였다.

“이곳이 좋겠네.”

조르던 자유도시.

여러 자유도시 중에 가장 큰 곳이었다. 위치적으로도 좋았다.

미케네르 제국을 기준으로 왼편이 로토 왕국이고 오른편에 있는 곳이 조르던 자유도시다.

“로토 왕국과는 머니까, 날 찾진 못할 거야.”

게다가 조르던 자유도시의 근처에는 나테아르덴 제국까지 있다.

“근처에 큰 나라가 있으면 용병일도 많이 있을 거야.”

가출지도 정했으니, 이제 편지만 남았다. 나는 가족들에게 남길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

정신을 차린 밀리아는 옛날과 다르게 머리가 개운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어느새 의무실에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왜 여기있는 거지?”

밀리아가 침대에 일어나 자리를 뜨려는 순간이었다.

철컥.

팔에서 쓰겨지는 반발력과, 쇠사슬이 부딪히는 소리. 자신의 팔이 침대와 쇠사슬로 묶여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뭐야? 내가 왜 묶여있는 거야.”

밀리아는 자신이 왜 묶였는지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거기, 누구 없어?”

분명 의무실 밖에서 누군가가 밀리아를 지키고 있을 게 분명했다. 밀리아는 그 점을 눈치채고 그 누군가를 불렀다.

누군가의 정체는 기사였다. 밀리아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 데일이었다.

“데일, 내가 왜 여기에 묶여있는 이유가 뭐야.”

“기억나지 않으신 겁니까?”

밀리아는 점점 초조해져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만 커져갔다.

“기억이 나질 않아.”

“아가씨께서는 마족과 동화했습니다.”

“뭐···?”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밀리아에겐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마족이랑? 동화? 어떻게?”

“그야, 전 모릅니다. 하지만 수하르 도련님께서 마족과 동화하려는 아가씨를 막아냈다고 합니다.”

밀리아는 수하르란 이름을 오랜만에 듣는 것만 같았다. 수하르에 대해서 밀리아가 생각했다.

“수하르···.”

분명 밀리아가 죽이고 싶어하던 인물이 수하르였다. 실제로 암살의뢰까지 넣었다.

그런데 밀리아의 수하르에 대한 증오가 사라졌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자신이 한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 거야···.”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생각하는 밀리아였다. 데이브 오빠를 죽이려고 했고, 수하르에게 암살의뢰까지 넣었다. 그리고 기억나진 않지만 마족과의 동화.

지금의 밀리아에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도련님 말로는 목걸이가 문제라고 했습니다.”

“목걸이···?”

자신이 매번 차던 목걸이를 생각했다. 메드락 목걸이.

“누가 줬었던 거지···?”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있었고, 밀리아 자신도 모르게 빠져버린 목걸이였다.

“도무지 생각이 정리되질 않아.”

확실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수하르가 밀리아를 구해줬다는 것.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일단 고맙다고 말해야겠어.”

어찌 됐건 밀리아는 마음속에 품었던 증오가 사라져서 한결 편한 기분이었다.

“밀리아 누님!”

“···수하르?”

의무대의 창가에 수하르가 있었다. 수하르는 밀리아에게 물었다.

“목걸이는 어떻게 얻은 거야.”

“나도 그게 기억이 나질 않아. 그냥 어느 순간부터 있었던 거 같아. 그보다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잘 들어···.”

수하르의 이야기를 듣어도 밀리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땅에서 마족이 안 보인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수하르의 이야기를 전부 믿을 수밖에 없었다. 밀리아 자신이 목걸이를 쓰고 다니면서 악행이라고 불릴 만한 짓을 많이 했었기 때문이다.

밀리아는 자신의 전속시녀인 레아에게도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고마워. 나를 멈춰줘서.”

“다른 사람들은 아직 누님을 못 믿고 있지만, 내가 설명해뒀으니까, 금방 괜찮아질 거야.”

수하르가 떠나고, 혼자 남은 밀리아는 다시 잠을 청했다. 전과는 다르게 깨끗해진 정신 덕인지 한결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

조르던 자유도시에 왔다. 긴 시간에 걸렸지만, 온 보람이 있었다.

“크흐, 확실히 용병의 성지가 자유도시라고 할 만하네.”

가벼운 무장상태의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대부분이 용병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왕국을 떠나기 전에 맡겨둔 돈을 전부 찾아왔다. 거금이 손에 있어 많이 불안했지만, 다행히도 아무런 문제없이 도착했다.

“우선 신분증부터 만들어야겠지.”

보통 신분증은 용병증으로 대처할 수 있다. 다만 용병증을 만들려면 신분증이 필요했다.

그리고 현재 내 신분증을 쓸 수는 없다. 가문에다 나 잡으러 와주세요, 라고 외치는 꼴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가출한 의미가 없다. 내가 경비에게 뒷돈까지 찔러준 의미가 사라져버린다.

“분명···.”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주는 곳이 있다고 했다. 이렇게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자유도시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많았다.

“뒷골목에 가면 알 수 있겠지.”

뒷골목에선 뒷장사를 한다는 단순한 이유는 아니었다.

뒷골목에는 건달이 있을 것이고, 웬만한 건달은 뒷사정을 잘 아는 법이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건달이 있을 법한 뒷골목을 찾았다.

“어이, 거기!”

누군가가 외쳤다. 설마 나를 부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봐, 금발 머리 너 말이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금발 머리 따윈 없다.

나를 부르는 건가.

“설마 저를 부르신 건가요?”

뒤를 돌아보니 네 명의 사내가 선 채로 나를 가리키며 웃고 있다.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건달이구나.’

나보고 따라오라며 뒷골목을 향하는 건달들.

일이 쉽게 풀려가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건달들의 뒤를 따라가 도착한 뒷골목은 음습, 그 자체였다.

쓰레기가 눈에 띄게 많고, 빛이 들지 않았다.

“순순히 따라오다니 멍청하군.”

“그러게 말이야.”

건달들끼리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나는 약간 뻘쭘했다. 이내 한 건달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이거 보이지? 이거에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우와··· 진짜 소설 속에서나 볼법한 건달이었다.

소설의 제목은 [기사와 공주].

남몰래 왕실을 나온 공주가 건달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몰래 공주를 따라나왔던 기사가 등장.

공주를 구하려는 기사에게 건달이 검을 겨누며 할 법한 말이었다.

“가진 거 다 내놓고 꺼져.”

식상하단 느낌이 들었지만, 내게는 좋은 상황이다.

“싫다면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이 놈에게 한 명의 희생자가 더 생기는 거고.”

웃기는 소리다. 그리고 아까부터 불편한 게 있었다.

“그런데 왜 자꾸 반말하냐.”

“그야 당연히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어. 내 나이가 몇인 줄 알고 저러는가.

아, 생각해보니 회귀해서 나이가 열다섯이다.

왜 아직 열다섯이지.

회귀하고 몇 년은 지난 기분인데 말이다.

‘잠깐 사이에 경지가 많이 올라서 착각해버렸네.’

“크흡, 아무리 상대가 어려보여도 반말은 아니지!”

“너··· 상황판단 안 돼?”

건달이 단검을 흔들며 나를 위협해왔다.

내겐 그저 우습게 보이는 행동이었다.

“내가 칼을 차고 있다는 건 안 보이나봐?”

굳이 칼을 두 개씩이나 들고 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은 퇴마검만 들고 있는 상태였다.

“네가 기사라도 되는 줄 아나?”

보통 익스퍼트 초급 정도만 되도 기사가 될 수 있다. 말단에 불과하겠지만.

건달들에겐 내가 소드익스퍼트 초급도 안 되어 보이는 모양이다.

“그딴 호신용 검 가지고 무엇을 하겠다고. 금발아, 인생은 실전이야!”

실전. 좋다 인생이 실전이라는 것을 보여줘야겠다.

주먹으로 간단히 끝낼 생각이었지만, 검을 써야겠다.

‘검으로 머리를 싹 다 밀어버려야지.’

아니, 좀 더 좋은 게 떠올랐다.

나는 조용히 검을 뽑았다.

스릉-

살벌한 소리를 내며 뽑히는 검. 건달들도 살짝 긴장한 듯 보였다.

“금발아, 너 검 뽑았구나. 이젠 못 되돌려, 다시 한번 기회를 줄게. 돈 놓고 꺼져.”

겁이라도 먹었나.

나는 미소를 지으며 살갑게 말했다.

“나도 너희한테 기회 줄게. 뒷거래하는 놈을 나한테 알려주면 칼질은 안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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