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을까.
“드라이크 남작이 방금 뭐라고 말하셨습니까?”
“응? 내가 뭐라고 했더라.”
꽤나 거하게 취한 것인지 혀까지 꼬여있는 드라이크 남작.
“방금 키르턴 영지를 받으셨다고.”
“아, 맞다. 그랬었지.”
에아 키르턴. 멸문한 가문의 이름을 빌린 아카데미의 선배.
그 키르턴 영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혹시 키르턴 가문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십니까?”
“그야··· 나도 모르네.”
“네···?”
한껏 부풀었던 기대감이 팍 식어버렸다. 모른다니.
“자네에게 말했다시피 나는 귀족이 된 지 얼마 안 되었다네. 그런데 키르턴 가문에 대해 뭘 말할 수가 있겠는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 드라이크 남작과 시선이 마주쳐졌다.
취한 줄만 알았던 드라이크 남작의 눈이 또렷하게 변해있었다.
“그런데 자네는 왜 키르턴 가문에 대해서 묻지?”
“사실은···.”
왠지 솔직하게 말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로토왕국의 아카데미에서 키르턴 가문의 이름을 쓰는 사람을 보았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 사람과 많이 친해졌다는 것도 말이다.
“그런가··· 역시 그분이겠지···.”
드라이크 남작이 낮게 중얼거렸다.
분명 드라이크 남작은 에아에 대해 알고 있었다.
“제발 제게 키르턴 가문, 아니 그 사람에 대해 알려주세요.”
“나는 말 못하네.”
단호한 드라이크 남작의 말.
더 이상 에아에 대한 정보를 캘 수는 없을 듯 했다.
“그렇군요. 아쉬울 따름입니다.”
아직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지금은 단념하기로 했다.
***
곧 목적지에 도착하는데도 나는 에아에 대한 정보를 전혀 캘 수가 없었다.
생각과 달리 드라이크 남작의 입은 무거웠다.
게다가 토스터 마을에 술을 마신 뒤로는 단 한 번도 마시질 않았다.
“역시··· 키르턴 가문을 쓰는 사람의 정체를 저에게 알려주실 생각이 없으시군요.”
“이제 단념하게. 그분에 대한 정체는 알려줄 수 없다네.”
그래도 드라이크 남작과의 대화를 통해 대략적인 짐작은 가능했다.
에아를 그분이라 지칭하며 한없이 높여 부르고 있었다.
에아가 키르턴 가문의 이름을 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은 틀림없다.
“그나저나 곧 도착인데, 자네는 조르던 자유도시로 어떻게 돌아갈 생각인가?”
딱히 정하지는 않았다. 그냥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이동할 생각이었다.
“천천히 둘러보면서 가볼 생각입니다.”
“음, 그런 겐가. 솔직히 나는 볼일을 마치고 다시 조르던 자유도시로 갈 생각이라네.”
혹시 같이 갔으면 하는 건가. 그렇다면 나야 좋다. 그만큼 마차의 안이 쾌적하니 말이다.
“하지만 자네랑은 같이 갈 생각이 안 드는군.”
생각보다 친해진 줄 알았는데 드라이크 남작은 아니었나보다.
“어째서입니까?”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바로 깨달았다.
“자네가 좀 불편해졌다.”
내가 계속해서 에아에 대해 캐물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해도 무례했다. 말하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캐내려고 몇 번이고 시도했다.
드라이크 남작이 불편해할 만했다.
“그건 죄송합니다. 그래도 그 사람은 저에게 중요한 사람이라.”
에아에 대한 내 감정은 호감 혹은 그 이상일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가명까지 써가며 아카데미에 온 걸까. 좋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재능이 넘친 사람인데도 이름을 알리지 못했다.
‘혹시 뒷세계와 관련되어 있는 인물은 아니겠지.’
그런 걱정 때문에 조금은 과하게 행동했던 것 같다.
“음··· 자네의 표정이나 말투를 보면 그분을 중요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네.”
“그렇다면 어째서!”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두게. 그분에 대해서 더 이상 캐낼 생각을 하지 말게. 키르턴 가문에 대해서도 말이야.”
나는 침묵했다.
“모두 자네를 위한 것일세.”
“···알겠습니다.”
결국 에아에 대한 것은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미케네르 제국의 수도에 도착했다.
수도에 도착한 후에 나는 드라이크 남작과 헤어졌다.
헤어지는 순간 드라이크 남작은 내게 넌지시 물어왔다.
“혹시 하르를 내게 넘겨줄 생각이 없나. 진짜로 잘 키우겠네.”
“그분에 대해 알려주신다면 생각해보죠.”
“그럼 할 수 없지. 잘 가게, 한스!”
드라이크 남작이 떠나고 정신없이 수도를 걸었다. 제국의 위용을 느낄 수 있는 거리였다.
로토 왕국의 수도 또한 어디에 뒤쳐진다는 생각을 하진 못했다.
하지만 미케네르 제국의 수도는 남달랐다.
“기나긴 역사를 가진 만큼인가.”
가장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수십 개의 동상이 나란히 있는 모습이었다.
역대 황제들의 조각상이었다.
제각각 자신의 위용을 뽐내는 자세를 취한 채 거리를 장악했다.
“이제 할 게 없네.”
사실 에이션트 스네이크를 제외하면 제국에 온 이유가 이 조각상을 다시 보고 싶어서 온 것이었다.
잠시 멍하니 거리를 걸었다.
“이제 돌아갈까.”
돌아가서 뱀술이나 담궈야지.
다시 돌아가려고 생각했을 때 눈앞에서 모자가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콜록!”
“얘야, 그러게 몸을 따스하게 자라고 했잖니. 이제 날도 슬슬 쌀쌀해지는데.”
“아, 괜찮아요. 뭐 감기 걸린다고 죽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 감기가 얼마나 무서운 병인데. 요즘에야 약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모자의 대화.
나는 이 대화에서 잊으려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
회귀 전의 기억이었다.
칼데르트가의 영주가 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아, 왜 이렇게 업무가 많은 거야···.”
그때의 나는 지쳐있었다. 처리해야할 일은 많았지만 몸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집무실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집사장이 찾아왔다.
내 가명과 같은 이름인 한스 집사장.
한스 집사장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한스, 왜 나를 찾아온 거지?”
“백작님··· 미케네르 제국에서 심상치 않은 소문이 들려옵니다.”
“심상치 않은 소문?”
한스의 말로는 제국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제국에 전염병이 돌았다는 말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로토 왕국은 미케네르 제국의 옆에 위치해있다. 그런 만큼 전염병이 생기면 영향을 받을 일이 컸다.
“사실은 서서히 로토 왕국 내부에서도 전염병에 걸린 자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비상이다.
“혹시 칼데르트가의 영지의 상황은 어떤가. 아니지 칼데르트가에 전염병이 나왔다면 나한테 들어왔겠지.”
“그게···.”
한스가 뒷말을 삼켰다. 불안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스에게 물었다.
“설마··· 전염병이 의심되는 환자가 칼데르트가에도 나타난 것이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한스.
나는 좌절했다. 가뜩이나 할 일이 넘쳐나는데 전염병이라니.
무슨 내게 저주라도 내려진 거 같았다.
“한스, 지금 당장 최대한 통행을 막아.”
엎친데 덮친격. 나는 한계에 다다른 몸으로 전염병을 대처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나는 집무실에서 반 죽어 있었다. 더 이상은 한계였다.
“백작님!”
한스가 나를 부르며 뛰쳐왔다.
“무슨 일인가. 또 어느 마을에 환자가 발생했나보구나. 아니, 이젠 굳이 보고를 올리지 않을 정도로 많이 전염되었지 않았나.”
“드디어 전염병의 약이 나왔습니다!”
“뭐라고!”
반 죽어있던 나를 깨우기엔 부족함이 없는 소식이었다.
나는 기뻐지는 한편 걱정되는 점이 하나 있었다.
“대륙 곳곳에 전염병 환자가 넘쳐나는데 약은 충분한 것인가?”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흔하게 널린 약초가 전염병의 치료제였습니다.”
좋은 소식이었다.
“다만 이 사실을 먼저 알아낸 자들이 약초를 독점해서 가격이 많이 올랐습니다.”
“어떤 약초가 치료제에 쓰이는 겐가?”
“들푸라기초입니다.”
들푸라기초. 나도 알고 있는 풀이었다.
진짜 주변에 넘쳐나는 게 들푸라기초였다.
“우리 영지에 나오는 들푸라기초를 쓰면 되지 않나? 잠깐만···.”
즉위식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얼마 전에 제초제를 영지 곳곳에 뿌렸다. 이유는 내가 백작위를 이어받으며 한 행사 때문이었다.
백작위를 받아넘기며 새롭게 한다는 마음으로 제초제를 뿌리는 칼데르트가의 행사.
“설마 우리 영지에 들푸라기초가 없다는 이야기인가.”
“아닙니다. 있긴 합니다만. 양이 매우 적어 구매해야합니다.”
“그래서 들푸라기초의 가격이 얼마나 올랐는가.”
“그게···.”
본래 가격보다 100배가 인상되었다고 했다.
하등 쓸모없는 약초에 속했던 들푸라기초였기에 가격 자체는 저렴했다.
그런데 그 저렴한 가격이라도 100배가 되어버리면 큰돈이다.
“혹시 우리 영지에 필요한 들푸라기초는 어느 정도인가···?”
목소리가 절로 떨려온다.
“훗날을 생각한다면···.”
한스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역시 나는 저주를 받았다. 백작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돼서 전염병이 터져버렸다.
게다가 치료제에 쓰이는 약초를 비싼 값에 사야한다.
이것을 지불한다면 백작가의 금고는 비어버리게 될 것이다.
“한스···.”
이를 악 물고, 답했다.
“들푸라기초··· 필요한 만큼 사들이게.”
한스가 집무실을 떠나고 나서 나는 곧바로 거품을 물었다.
이제 비어버린 영지의 금고를 다시 채우려면 더 많은 일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
잊어버렸던 기억. 아니 잊고 싶었던 기억이었다.
내 인생 최대의 위기였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곧 전염병이 퍼진다는 거잖아.”
내가 백작가의 작위를 물려받았을 당시를 생각했다.
“아니야, 그때는 아버지가 밀리아 누님의 사건 때문에 몸이 편찮으셔서 일찍 작위를 내려놔서 그래.”
그렇다면 데이브 형이 즉위할 때엔 이미 전염병은 발병하고 지나가겠지.
“즉위식으로 제초도 안 할테니, 약초도 넘쳐날 것이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돌아가서 들푸라기초를 재배해봐야겠다.”
들푸라기초를 사서 모아두면 될 일이겠지만, 농사에도 약간 흥미가 동했다.
미래의 기억을 가진 내게는 훗날 어떤 작물의 가격이 오르는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만약 농사에 성공만 한다면···.”
좋은 일도 하면서 돈을 왕창 벌 수 있을 거다.
돈이 넘쳐난다면 내 희망을 좀 더 빠르게 이룰 수도 있다.
“쉴 날이 점점 찾아오구나.”
내 나이 곧 열여섯.
적어도 서른 전까지는 빠짝 벌 것이다. 그리고 모아둔 돈으로 여행을 다니며, 가장 좋았던 곳에 정착을 생각이다.
“되도록이면 칼데르트가와 떨어진 곳이 좋겠지.”
가족들이 나를 싫어하진 않는다. 그래도 주변의 시선이라는 게 있지 않는가.
주위 가신들이 나쁜 마음을 품고 내게 찾아올 수도 있는 일이다.
“이제 슬슬 가볼까.”
해야할 일도 생겼고, 볼일도 마쳤다.
이제 조르던 자유도시로 돌아가면 된다.
“다시 가기 귀찮네.”
그래도 집만 가면 한동안 쉴 수 있다.
그만큼 드라이크 남작의 의뢰비는 두둑했으니 말이다.
“잠깐만···!”
왜 내가 뱀술을 먹을 생각만 했지.
에이션트 스네이크로 만든 뱀술은 원하는 자가 많지만, 양이 적다.
그렇기 때문에 비싸다.
“어느 정도만 남기고 다 팔아볼까?”
만약 뱀술을 비싸게 판다고 생각해보자.
서른이 아니라, 이십 대에 쉴 수도 있을 테지.
행복한 감각에 휩싸이며 나는 조르던 자유도시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