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모습을 드러낸 악마를 보고 에피니아는 겁에 질렸다.
-왜 나를 두려워하는 거지? 이제부터 너와 나는 게임을 해야하는 친구가 되었는데.
하며 섬뜩한 미소를 짓는 악마.
“···나 게임 안 할래! 네가 악마인 줄 몰랐단 말이야.”
-이미 늦었다.
악마가 에피니아에게 손을 뻗자 검은 것이 튀어나와 에피니아의 등으로 향했다.
검은 것은 에피니아의 등으로 빨려가듯 사라졌다.
-너의 등엔 나와 게임을 하고 있다는 증표를 남겼다.
“싫어! 나 게임 안 할 거야!”
-그럴 수야 없지. 정 포기하겠다면 나는 네 영혼을 가져가면 되는 일이다.
영혼을 가져간다는 소리에 에피니아는 겁에 질렸다.
그리고 단념한 듯 소리쳤다.
“그럼, 빨리 게임을 시작해!”
-성격이 급한 아이로군. 그나저나 나를 찾기엔 20년이라는 시간은 많이 부족하겠지.
에피니아는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년도 부족하다니.
“20년이면 충분히 찾을 수 있어!”
-하하, 제법 당돌하군. 그렇다면 힌트는 필요 없겠지?
순간 에피니아는 당황했다.
힌트라고 말했다.
“아니··· 힌트는 필요해.”
-솔직하니 귀엽군. 그래서 내가 애들을 좋아하는 거지.
그리고 악마는 에피니아에게 종이 하나를 건넸다.
-그 종이에 힌트를 적어두었다. 이제 문 밖으로 나가면 게임을 시작하는 거다.
에피니아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문을 나가자마자 다시 들어가야겠다!’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에피니아는 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뒤를 돌았다.
하지만 그곳엔 악마는 없었다.
“뭐야? 어디 간 거야?”
문이 사라져있었다.
에피니아는 그것으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20년이라는 세월이 부족하다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
그 이상한 공간에 숨으면 에피니아는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던 것이다.
“어떡하지···.”
우선 에피니아는 자신의 아버지인 황제에게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이렇게 되어버렸죠.”
나는 1황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등에 있는 저주가 황녀의 말이 사실이라고 증명해주었다.
“확실히 저주에서는 제가 상대했던 마족과 비슷한 기운을 풍기군요.”
“······.”
“그런데 저주라기 보단 낙인에 가깝군요.”
1황녀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여러 번 알아본 결과 고대저주의 응용이었습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1황녀의 말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었다.
“도대체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 수 있다는 겁니까?”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야기대로 라면 마족과 싸울 필요 없이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못 찾은 걸 생각하면 쉽게 찾아낼 수 없는 곳이겠지.
“그래서 게임을 이기는 것보단 저주를 해주하는 방향으로 생각했습니다.”
“해주···?”
그렇다고 하여도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
“어떻게든 해주를 해낼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1황녀의 표정에는 굳은 다짐이 엿보였다.
“그러니까, 훗날 찾아올 악마를 상대해주세요.”
“······.”
그러니까 무리다. 악마를 잡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선 무리입니다.”
“아, 말씀드리는 것을 깜빡했군요. 에피아 신성제국에도 도움을 청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신성제국이라면 악마와 상극인데 제가 굳이 필요할까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죠. 그리고 신성제국이라고 하여도 마족과의 전투 경험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는 것은 내가 가진 마족과의 전투 경험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안전하게 뒤에서 지휘만 해주셔도 됩니다.”
“그건··· 좋군요. 그나저나 악마 준 힌트는 뭡니까?”
1황녀가 말한 대로라면 악마는 1황녀에게 힌트를 종이에 적어주었다고 하였다.
1황녀가 품속에서 하나의 색 바랜 종이를 꺼냈다.
“이거예요.”
종이는 접혀있었다. 나는 1황녀에게 종이를 받아 펼쳤다.
“이것은···.”
종이에 적혀있는 것은 아마도 힌트겠지.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고대문자네요. 전 해석 불가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예요. 아무래도 고유명사 같은 게 섞여서 해석이 힘든 거 같아요.”
“그렇군요.”
1황녀는 다시 힌트가 적힌 종이를 가져갔다.
“일단 해석할 수 있는 부분만 해석한다면···.”
무언가가 지키고 있는 곳에 마족이 있다고 하였다.
“음··· 너무 두루뭉술하네요.”
“그래서 힌트는 없는 셈치려고요.”
그런데 고대문자를 보니 잠시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해석할 방법이 있을지도.’
유적에서 나온 목걸이가 있었다. 칼데르트가에 두고 왔지만.
그게 있다면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혹시 그 종이의 사본이 있습니까?”
“그건 왜죠?”
“제게 해석할 수 있는 마도구가 있는데 본가에 있거든요.”
그러자 1황녀의 표정이 굳어간다.
점차 내게서 거리를 두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본가라고요···? 라이크 가문은 멸문한 가문일터. 본가가 어디 있다는 소리죠?”
실수했다.
라이크 가문은 빌린 이름일 뿐 진짜 내 가문이 아니다.
“진정하시죠. 설명이 가능합니다.”
“신분을 속이셨군요.”
1황녀가 점점 내게서 떨어졌다.
괜히 다가가면 오해를 살 수 있으니 나는 그 자리에 정지했다.
“음··· 진짜 신분을 말해줄 수 있나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내 모습에 1황녀의 경계가 조금 누그러뜨려졌다.
“그···.”
잠시 생각해보았다.
만약 1황녀에게 내 진짜 신분을 말해준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무렇지 않겠구나?’
내 진짜 신분을 말해줘도 상관없겠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1황녀님.”
“······.”
귀족의 예법을 지키며 말을 이었다.
“로토 왕국에 속한 칼데르트가의 삼남 수하르 칼데르트라고 합니다.”
1황녀의 표정이 천 너머로도 당황했다는 게 느껴졌다.
블랙 용병의 정체가 귀족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수하르···? 거짓말.”
1황녀가 얼굴을 가린 천을 올리고 내 얼굴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 또한 1황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에아 선배?”
“진짜 수하르네?”
나는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1황녀 또한 같았다.
***
에아, 아니 에피니아는 얼굴을 가린 천을 벗고 내 앞에 앉았다.
“수하르, 네가 블랙 용병이라니.”
“저도 놀랐어요.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거 같았는데 1황녀라니. 혹시 제가 무례하게 대한 적이 있을까요? 에피니아 황녀님.”
“수하르, 놀리지 마.”
나는 진심이었는데 에피니아는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하여튼 칼데르트가에 해석할 수 있는 마도구가 있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때는 말을 못했는데 유적을 좀 자주 다녔습니다.”
에피니아와 함께 유적을 갔을 때를 기억했다. 유적에 대한 경험이 있음에도 없는 척 속였다.
“어쩐지···.”
“그래서 또 제가 유적을 도전하다가 갇혀버렸죠.”
밀리아 누님이 암살자를 보냈다는 것은 굳이 알릴 필요가 없는 사실이기에 숨기기로 정했다.
“그래서?”
“거기서 힘들게 나왔죠. 그런데 보상 중에 문자를 해석할 수 있는 마도구가 있더라고요.”
“정말···?”
에피니아의 표정이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확실해요. 그걸 착용하니까 해석이 가능해지더라고요.”
“그래? 그렇다면···.”
에피니아가 할려는 말이 예상이 된다.
“하지만 지금 본가엔 못 가요.”
“어째서?”
“가출 중이거든요.”
어이없어하는 에피니아를 보고는 재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사실 전 후계자 자리엔 관심이 없는데 자꾸 가신들이 저를 후계자로 만들려고 해서 가출했죠.”
“그렇구나. 하지만 그 목걸이가 있다면···.”
추가적으로 갈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사실은···.”
밀리아 누님의 전속시녀인 레아에 대해 말해주었다.
확실한건 아니지만 레아는 의심스러운 인물이라고.
그리고 마족과 연관되어 있으며 이상한 힘을 가진 노블리스란 조직도 말해주었다.
다행히도 에피니아는 노블리스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레아가 노블리스의 일원으로 생각되는데 그 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 강해질 생각이라는 거지?”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그런데 너무 안일한 거 아니야?”
뭐가 안일하다는 걸까.
“아무리 강하더라도 마족과 연관되어있는 조직을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을 거 같아?”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대규모로 움직이면 상대가 눈치챌 우려도 있었다.
“우리 제국의 소드마스터를 보내줄게. 대신 목걸이를 가져와줘.”
“네···?”
제국의 소드마스터라면.
왕국에서는 한 명의 소드마스터를 검성으로 지목하는 반면에 제국에서는 최대 세 명까지 검성이라는 칭호를 지어준다.
“미케네르 제국의 소드마스터면 세 명의 검성 분 중 한 명이요?”
고개를 젓는 에피니아.
단번에 실망감이 찾아왔다.
“아니, 검성 칭호를 얻지 못한 소드마스터라도 실력은 출중해!”
“맞죠···.”
그래도 미케네르 제국에 있는 검성들에 비교한 한 수 떨어진다는 게 문제다.
“······.”
그래도 잠시 고민해보았다.
목걸이와 훗날 소드마스터의 도움.
“좋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소드마스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쪽이 훨씬 이득이었다.
“그런데 있잖아, 수하르.”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는 에피니아.
“그냥, 몰래 잠입해서 가져오면 안 되는 거야?”
헛웃음이 나올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웃음기를 뺀 웃음으로 답했다.
“하하하, 재밌는 소리네요.”
“뭐···? 그렇게 까지 이상한 소리는 아니잖아.”
한 왕국의 백작령을 몰래 침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백작이 있는 저택까지 몰래 침입이 어디 쉬운 일일까.
게다가 최근에 안 좋은 일이 생겨서 경비에 더욱 힘을 쓰고 있을텐데.
“그럴 수 있었다면 제가 한 번은 집에 들렀겠죠.”
에이션트 스네이크를 잡으며 얻었던 책의 내용도 궁금하니 말이다.
“하여튼 집에 갔다 오는 거지?”
“네, 그럴게요. 사실 확실하진 않지만 후계자 자리도 슬슬 정리되었을 거라 생각하거든요.”
“뭐···? 그렇다면 소드마스터의 도움을 약속한 게 괜히 했다는 소리잖아.”
본가에 가기 싫어하는 나를 설득하기 위해 꺼낸 에피니아의 수였다.
당연 본가에 가기 싫어할 이유가 사라지면 무용지물이 아니겠는가.
“아니에요.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잖아요. 사실은 저희 형이 백작위를 물려받을 때쯤에 돌아갈 생각이었거든요.”
내 말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에피니아였다.
“뭐? 그건 너무 길지 않아? 내가 알고 있는 칼데르트가의 백작님이시면 적어도 수십 년은 백작의 자리를 지키실텐데.”
“농담이에요. 후계자 공표가 끝나면 한 번 돌아가볼 생각이었어요.”
갑자기 표정을 굳힌 에피니아가 내게 서서히 다가왔다.
그리고 내 입가에 검지를 대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 의뢰의 비밀··· 지켜주길 바래.”
“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에피니아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곧 아카데미의 안식기간이 끝나갈텐데 왜 이곳에 계신거예요?”
“아, 그거 때려 쳤어.”
“네···?”
너무 호쾌하게 말하는 탓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가 여러 아카데미를 다녔거든. 그 이유가 저주에 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책을 읽으려고 입학한 거야.”
“그런가요···?”
“로토 아카데미에서 읽을 만한 책은 다 읽었으니까, 그냥 그만뒀지.”
내 관점으로 로토 아카데미에서 가장 뛰어난 두 명이 그만두었다.
나와 에피니아.
과연 천재가 아카데미를 그만두는 것인가, 아카데미를 그만두는 게 천재인 것인가.
하는 엉뚱한 의문이 떠올랐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