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에피니아를 통해 소환마법진에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그러니까, 라이프베슬 안에 있는 마기가 마법진이 발동되는데 쓰이는 원동력이라는 거죠?”
“맞아, 그 말대로야.”
모든 것이 준비가 되었다고 했다.
남은 것은 전투를 준비하는 것뿐이라고 에피니아가 덧붙였다.
전투에 참여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신성제국 기사단과 사제단···.”
파스타르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에피니아에게 파스타르의 행방을 물었다.
“그는 비장의 수니까.”
“비장의 수요?”
모인 이들에서 파스타르가 가장 강하다.
그런데 비장의 수라는 게 무슨 의미인가.
“은신마법으로 숨어있어.”
“은신마법이요?”
“내가 악마를 발견하고 게임이 끝나는 순간 파스타르가 뒤를 노릴 거야.”
은신마법으로 숨어있는 소드마스터라.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지금 신성제국 사람들은 뭘 하고 있는 거죠?”
신성제국의 기사단과 사제단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옆에 있던 아미스가 설명해주었다.
“이곳을 성역으로 선포하고 있는 중입니다.”
“성역이요?”
“신성력이 가득 찬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죠.”
이게 신성력을 가진 자들의 준비라는 건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마법진에 쓰이는 마기에 영향은 없을까요?”
마기와 신성력은 상반된 힘이다.
이곳에 신성력이 가득 차게 된다면 마법진에 이상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마법진을 중심으로 결계가 쳐져 있다고 아미스가 말해주었다.
악마가 나타난 순간 결계가 사라지고, 마법진까지 성역에 포함될 예정이라고 하였다.
“생각보다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네요.”
이 정도라면 아무리 강한 악마라도 힘을 못 쓸 것이 분명하다.
에피니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곧···.”
“······.”
에피니아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본인의 의도와 다르게 시한부 삶을 살고 있었던 에피니아.
그 삶의 종지부를 지금 찍게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마워··· 수하르···.”
“의뢰를 받았을 뿐인걸요.”
에피니아가 눈물을 닦아내고,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해지는 그런 미소였다.
“이제 슬슬···!”
때마침 신성제국의 성역선포도 끝이 났다.
어딘가에 소드마스터도 숨어있다.
에피니아가 마법진 근처에 있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돌아왔다.
“이제 시작할 거야.”
에피니아가 모두에게 외쳤다.
“이제 곧 마법진이 가동됩니다. 전투준비를 해주세요!”
신성제국의 기사단은 검과 방패를 들었고, 사제단은 지팡이를 들었다.
나 역시 퇴마검을 뽑고, 전투를 준비를 마쳤다.
마법진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법진의 중앙에 검고, 어두운 구체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구체는 점점 크기가 커졌다.
“뭔가 나오고 있습니다!”
구체의 중앙으로부터 무언가가 나오고 있었다.
검은 짐승 같은 무언가가 튀어나오고 있다.
“다들 전투준비를 하십시오!”
저건 악마가 아니다.
확실했다.
“마수···?”
마계에 사는 몬스터의 일종.
마수의 종류에 따라 강함도 천차만별이라 들었다.
마법진에서 나온 것은 마수였다.
내가 마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기사단과 사제단은 성역 안에서 움직일 수 없다.
파스타르는 악마의 뒤를 노려야한다.
결계를 해체하면 성역으로 인해 마법진이 사라진다.
내가 할 수밖에 없었다.
에피니아의 외침.
“조금만 버텨줘! 지금 악마가 자신의 종마를 대신 보내는 걸 거야!”
나는 구체에서 튀어나오는 마수를 상대했다.
처음엔 한 마리.
점점 구체에서 마수가 쏟아졌다.
하지만 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녀석들 너무 약한데요?”
악마가 무의미한 시간끌기를 할 리가 없다.
무조건 목적이 있을 것이다.
“설마···?”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 마법진 언제까지 유지가 되나요?”
“글쎄, 아마 삼십분?”
악마의 의도를 파악했다.
삼십분 동안 계속 종마만 보낼 생각이 틀림없었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허무하게 마법진이 닫힐 게 분명했다.
방법을 생각해내야한다.
“에피니아···.”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지만, 너무나도 위험한 방법이었다.
“혹시 저 구체를 넘으면 기다리고 있는 악마가 있을까요?”
“너··· 설마?”
안 넘어올 생각이라면, 데리고 오면 그만이다.
에피니아가 다급히 외쳤다.
“그건 너무 위험해!”
난 떠올렸다.
에피니아의 그 미소를.
곧 끝이라는 사실에 감격해하던 에피니아의 그 미소.
더 이상 지체하면 악마 또한 다른 수를 더 생각해낼 것이다.
가면 갈수록 방법이 사라질 게 분명했다.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그리고 이것은 사실이 터였다.
나는 몸을 구체로 던졌다.
마지막으로 눈물을 보이던 에피니아가 보였다.
“악마 녀석을 데리고 돌아올게요!”
***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분명 이곳이 마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앞에 있는 녀석이 에피니아와 게임을 하고 있는 중인 악마 녀석이 분명했다.
악마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우린 구면이겠지.”
“두 번째 만남이구나. 당돌한 녀석. 그곳을 넘어올 줄이야.”
저 악마 녀석이 분명.
“네놈이 안 오려고 하니까, 내가 데리러 왔지. 네놈이 책의 악마냐?”
부활의 악마, 리바이블이 말했던 책의 악마.
“오호, 부활의 악마 녀석이 말했나보구나. 그래, 내가 책의 악마다.”
소름끼치게 웃는 책의 악마.
“내가 바로! 책의 악마, 크부다.”
나는 문득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주위에 마수가 없었다.
구체를 넘어오던 마수들은 이곳에 없는 걸까.
“이상하군. 마수는 어디에 있는 거지?”
마수를 전부 베어버리면 다음은 크부가 알아서 끌려갈 거라 생각했다.
“제법 눈썰미는 있구나.”
“······?”
설마.
“함정···인 건가?”
“정답이다, 인간. 나는 부활의 악마 녀석과 같이 육체파가 아니라서 말이야.”
두뇌파라 이건가.
그런데 함정인 것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중에 바닥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크하하하, 너는 이제 나와 새로운 게임을 해야할 것이다!”
“게임···?”
무슨 소리인가.
저 악마는 지금 에피니아와 게임을 하고 있던 게 아니었나.
설마 중복으로 게임을 하자는 것인가.
“나는 너에게 찰나의 순간을 줄 것이다.”
“그만.”
“가장 괴로웠던 찰나의 순간을 버텨내기만 한다면 네 승리다.”
“그만! 나는 게임을 할 생각 따윈 없다.”
에피니아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게임을 해서는 안 된다.
“아니, 너는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
“이 게임은 강제거든!”
추악한 미소를 보이는 크부.
바닥의 빛이 나를 감싸며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그리고 의식이 끊기기 전에 크부의 말이 들려왔다.
“만에 하나라도 네가 버틴다면 내 발로 에피니아를 만나러 가지. 하지만 못 버틸 시에 네놈의 목숨은 이제 내 것이다.”
***
나는 분명 마계에 있었다.
하지만 정신이 든 곳은 마계가 아니었다.
익숙하게 느껴지는 방이었다.
방 밖이 소란스럽다.
나는 문을 열고 방을 나가려고 했다.
“응···?”
몸이 작다.
고개를 돌려 거울을 보았다.
어릴 적의 내가 있었다.
그런데···.
“이때라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불쾌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 감정은 내가 잘 알고 있는, 내가 심하게 겪었던 감정이다.
자괴감.
내가 서자라는 사실 깨닫고, 테시아르 어머니를 멀리 했을 적으로 돌아왔다.
“어···?”
방 밖의 소란이 점점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천한 년이 우리 백작님을 홀려서 저런 짐덩이를 낳게 한 거야.”
“고귀한 피에 천한 피가 섞여버렸으니 큰일이로군.”
“그냥 죽여버리는 건 어때?”
분명 이런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들었다.
환청처럼 그때의 나에게 들리던 말이었다.
모두가 나를 비난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는 눈빛 뒤에는 경멸의 감정이 숨어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
이겨냈다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이때로 돌아오니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환청이 점점 커진다.
‘그만···.’
나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진다.
나를 욕하는 강도가 점점 심해진다.
‘제발 그만해줘···.’
이제는 환영까지 만들어진다.
얼굴 없는 이들이 내게 손가락질한다.
‘제발··· 그만해주세요···.’
그때의 나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그냥··· 사라지고 싶어···.’
포기하려는 그 순간, 방 한켠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그 빛으로 시선을 옮겼다.
“퇴마검···?”
있을 리 없는 퇴마검이 방 한켠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퇴마검은 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라···?”
점점 퇴마검에게 빨려들어갔다.
퇴마검에게 완전히 빨려 들어가기 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나 널 지켜볼게, 수하르.”
처음 들어보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
이윽고 두 번째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한다, 수하르.”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
테시아르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그것으로 끝으로 나는 퇴마검에 빨려 들어갔다.
***
한 외침에 의식을 되찾았다.
“어이, 언제까지 잠만 잘 거야!”
“어···?”
“아무리 한가 해도 그렇지, 이렇게 정신없이 잘 거야?”
우락부락한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누구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에이, 할 일도 없는데 잠이라도 좀 잡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이 녀석이!”
우락부락한 남성이 나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멈췄다.
“카시아스! 네놈이 염동력만 없었다면···.”
“에헤, 그러게 가문을 잘 타고 나질 그랬어요.”
카시아스?
그건 내 가명일텐데.
어떻게 저 남자가 알고 있는 거지.
게다가 내 의지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감각만은 제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저 염동력··· 내가 발휘하고 있는 게 맞아···.’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리고 한순간 시야에 전신거울이 비춰졌다.
검은 머리와 허리춤의 검.
내 얼굴이 아니다.
‘하지만 내 허리춤의 검은···.’
분명 퇴마검이다.
설마···.
‘이 사람이 퇴마검의 주인?’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책의 악마와 강제로 게임을 하게 되었다.
마음이 무너질 뻔했다.
그런데 퇴마검이 빛났다.
‘그렇다는 건 퇴마검의 기억이라는 건가?’
아마 확실했다.
내 기억에서 퇴마검이 가진 기억으로 넘어온 모양이다.
‘다행인 건가?’
내 자신의 기억이라면 모를까, 타인의 기억이라면 마음이 무너져 내릴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얌마, 그 검 장인한테 받은 거라며?”
“에헤, 이거 되게 비싼 거예요. 진짜 아버지한테 몇 번이고 졸랐다니까요.”
“가주님이···?”
우락부락한 남자가 씨익 하고 미소를 지었다.
“평상시 같으면 벌써 도망칠 녀석이 그래서 여기에 남아있는 거구나.”
“에헤, 어떻게 알았어요? 이 검을 받는 조건으로 기사단에서 잡일이나 하래요.”
“그럼, 그렇지. 이 몸이 누구더냐!”
어깨를 핀 우락부락한 남자.
안 그래도 커다란 덩치가 더욱 커 보인다.
“라이크 가문에 자랑스러운 기사단인 금빛기사단, 그곳의 단장이신 올터니 단장님 아니십니까!”
올터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다는 듯 행동했다.
“그래, 그래, 잘 맞췄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럼, 퇴마검의 주인이 카시아스 라이크란 말이야?’
나와 인연이 깊어도 너무 깊었다.
갑자기 장면이 전환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