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에피니아가 크부를 향해 외쳤다.
“게임은 끝났어!”
그와 동시에 크부의 몸이 밝게 빛났다.
크부의 손에 있던 책이 에피니아에게로 전해졌다.
“이럴 순 없다! 이럴 순 없어!”
크부가 마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퇴마검을 뽑았다.
실을 검날에 감고 그대로 크부의 목을 내리쳤다.
하지만 짙은 마기가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소용없다.’
나는 퇴마검의 실로 마기를 와해했다.
마기가 와해되며 크부의 목이 드러났다.
그리고 나는 그 목을 베어냈다.
‘지금까지 나는 염동력을 못 쓰고 있던 것이었어.’
카시아스와 나와의 차이는 단 한 가지.
나는 후천적으로 능력을 얻었고, 카시아스는 선천적이었다.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카시아스는 제 손처럼 염동력을 다뤘다.
그리고 방금 전의 게임을 통해 내 염동력 또한 성장해냈다.
카시아스가 선천적인 감각이 내게도 깃들었다.
세심한 컨트롤이 순식간에 마기를 와해한 것이었다.
“끝···인 거 같네요.”
부활의 악마, 리바이블과 다르게 책의 악마인 크부는 목이 베이자 그대로 죽었다.
에피니아와 악마의 게임이 끝이 나며 시한부 삶도 끝났다.
그녀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고마워··· 수하르···.”
***
모든 일이 정리되고, 에피니아를 찾았다.
에피니아에게 솔직하게 말할 때가 왔다.
에피니아가 얻은 크부의 책엔 내가 없을 것이다.
정확히는 회귀 전의 내가 있을테지.
“에피니아··· 책 읽어보셨나요?”
“응··· 그런데··· 이상해.”
이상하겠지.
거기에 적힌 나는 회귀 전의 나니까.
“그야··· 그렇겠죠.”
“모든 게 적혀있지 않아···.”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가까운 미래에 관한 이야기밖에 정해져 있지 않아.”
“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책의 악마는 분명 머나먼 미래까지 보았다.
“그럴 리가 없을텐데요?”
“게다가 내게 다가와야하는 미래도 달라.”
그건 나 때문일 것이다.
“그게···.”
변명은 못하겠지.
에피니아가 보고 있는 미래엔 에피니아의 곁에 내가 없었으니까.
“네가 없어. 그리고 나는 전혀 단서를 찾지 못한다는 그런 미래가 적혀있어.”
“······.”
“이미 크부와의 게임에서는 이겼을텐데.”
그야 원래의 미래에선 에피니아는 분명히 게임에서 졌을 것이다.
내가 있었기에 달라진 미래다.
“게다가 수하르, 네가 없어.”
했던 말을 반복하는 에피니아.
“그게 말이죠···.”
회귀했다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할지 고민이 되었다.
“너에 대한 게 전혀 적혀있지 않아. 애당초 없었던 사람처럼.”
음?
그건 아닐텐데.
회귀 전의 내가 적혀있는 게 정상이다.
“혹시 그 책··· 제가 봐도 될까요?”
“여기.”
에피니아가 내게 책을 건넸다.
나는 책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했다.
책의 활자가 변해가며 원하는 정보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회귀 전, 그때의 내가 하고 있던 행동을 적혀있었다.
“적혀있는데요···?”
“그럴 리가··· 네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없어.”
내가 봤을 때는 적혀있었다.
왜 그런 것인가.
“혹시··· 이거 사람에 따라 조금 다르게 보이는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으면 에피니아에게도 회귀 전의 내가 보였을 터.
“그건 그렇다고 쳐. 그럼, 가까운 미래가 틀린 건 왜 그런 거야.”
“음···.”
굳이 회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런 거 아닐까요? 원래 정해진 운명을 비틀었다?”
“운명···?”
“네.”
“재밌는 소리네. 그럼 나는 원래 저기 적힌 대로의 운명이었다는 거야? 원래였다면 단서도 못 찾고 있을 거라고.”
그렇긴 하지.
“그렇다면 네가 내 운명을 바꿔준 거겠네.”
“네···?”
“저 책엔 네가 적혀있지 않았잖아. 네가 운명을 바꿔주었기 때문이지.”
“하하, 그런 거겠죠.”
뭐, 확실하게 그 말이 맞다.
에피니아는 다시금 나를 쳐다보았다.
진지해 보이는 눈.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못 말한 거 같아. 정말 고마워. 이걸로 의뢰는 끝이야.”
의뢰는 성공했다.
에피니아의 죽음으로 벌어질 전쟁도 나지 않을 것이다.
전쟁···?
생각해보니 그 전쟁의 원인이 궁금했다.
하지만 에피니아의 저런 반응이면 거기까진 적혀있지 않은 모양이다.
“음···.”
이 책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에피니아··· 다시 한번 책을 보여줄 수 있어요?”
“상관없긴 한데.”
책을 펼쳤다.
원하는 정보를 떠올렸다.
‘노블리스의 조직.’
너무 막연하기 때문일까, 책은 백지 상태였다.
‘음··· 그렇다면···.’
밀리아의 전속시녀인 레아를 떠올렸다.
그러자 레아의 중심으로 벌어지는 미래의 일들이 책에 적히기 시작했다.
하나씩 읽어나갔다.
그리고 찾아낼 수 있었다.
‘조금 다른 일이지만, 이걸로 확실해졌어.’
메드락을 레아가 회수하는 미래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레아는 마레이즈란 사람에게 메드락을 넘겼다.
점점 한 사람 한 사람씩.
그리고 조직의 수장으로 보이는 사람을 찾아냈다.
‘탈레스.’
책에는 그렇게 적혀있었다.
탈레스의 미래에 대해 더 살펴보려고 했지만 더 이상의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 보이지 않는 거지?’
그래도 몇 가지 중요한 거점을 알아낼 수 있었다.
대륙 곳곳에 조직의 거점이 존재했다.
바뀐 미래라도 거점은 아직 존재하고 있겠지.
“잘 봤어요.”
내가 할 일이 생겼다.
우선은 로토 왕국에 존재하는 거점들을 처리할 필요가 생겼다.
“그런데 이상하긴 하네요.”
“그렇지?”
“네. 원하는 정보를 모두 얻을 수가 없었어요.”
어째서 탈레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던 것일까.
게다가 다른 조직의 인물들도 같았다.
그들의 미래를 확실하게 볼 수가 없었다.
띄엄띄엄 적혀있었다.
레아의 정보는 제대로 적힌 것으로 보아 내가 직접 알아야 하는 것만 같았다.
“이제 의뢰를 끝냈으니 보상을 건네줘야겠지.”
“사양하진 않을게요.”
에피니아가 살기를 나 역시 바랬지만, 그렇다고 의뢰의 보상을 안 받기엔 그렇다.
“여기.”
에피니아가 내게 보상이라며 주머니를 건넸다.
근데 그 주머니의 크기가 좀 작았다.
“아공간 주머니인가요?”
“응.”
아공간 주머니를 펼쳐보았다.
그 안에는 엄청난 금화가 있었다.
척보아도 원래 받기로 했던 의뢰금보다 많았다.
“이거···.”
에피니아가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추가금이야. 네가 해준 일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거기 잘 찾아봐봐.”
에피니아의 말에 주머니를 안을 휘적거렸다.
금화끼리 부딪히는 소리.
기분 좋은 소리였다.
계속해서 휘젓던 중 금화랑은 다른 감촉이 느껴졌다.
직감적으로 에피니아가 말하려는 것이 이거라는 걸 눈치챘다.
“금화 말고 다른 게 있네요.”
그것을 꺼내보았다.
그리고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에피니아가 전에 가지고 있던 패와 똑같이 생긴 것이었다.
“넌 내게 지울 수 없는 도움을 줬어. 그러기 그 패를 주는 거야.”
은혜패.
제국의 황실이 직접 은혜를 갚아야하는 패.
제국에서 쓸 수 있는 최고의 증명패였다.
“그러고 보니···.”
전에 이 패에 대해 이야기했었던 게 기억났다.
의뢰의 성공보상으로 주겠다는 그 말.
“진짜였네요.”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줄 알았던 거야?”
그런 생각은 전혀 갖질 않았지만, 그렇게 신경 쓰지도 않았었다.
“너는 내 은인이야. 이 패로 끝낼 생각은 없어. 앞으로도 너를 전적으로 도울 생각이야.”
“말뿐이라도 감사한 말이야.”
“말뿐이 되질 않을 거야. 평생을 다해 갚을게.”
에피니아의 부담스러운 눈빛에 나는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어떤 보상보다 제일 좋은 보상이네요. 에피니아의 은인이 된 것만으로 충분할 거 같네요.”
“그럼, 그 주머니에 든 보상은 돌려주는 거야?”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에피니아와의 사소한 농담이 오가고 나는 여관으로 돌아갔다.
여관에서 나는 페트릭을 불렀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페트릭은 의아해하고 있었다.
“저기 왜 갑자기 저를 찾으신 거예요?”
“부탁이 있어서.”
“부탁이요?”
“집에 있는 그거 있잖아.”
“그거라면···.”
에이션트 스네이크로 담근 뱀술 말이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앞으로 콜로세움의 경기 남았으니까.
그렇기에 페트릭에게 부탁하려는 것이다.
“집에 있는 뱀술. 그거 이제 남은 재료만 넣어줄래?”
“아··· 네, 알겠어요.”
순순히 받아들이는 페트릭.
덕분에 한시름 놓았다.
잘못 만들면, 검성이 경을 칠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검성님은···.’
아버지의 장례식 때 찾아온 적이 없었다.
나는 그게 의문이었다.
친우라는 사람이 장례식도 찾아오질 않다니.
그걸 알아볼 걸 그랬다.
‘뭐,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나중에 에피니아에게 책을 빌리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집에 가는 김에 하르 이 녀석도 부탁할게.”
곁에 두고 싶지만, 이제는 너무 크다.
제국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하르에게도 그곳에 있는 편이 더 자유로울 것이다.
“하긴 보니까, 요즘 신경을 못 써서 그런지, 아니면 이곳이 좁아서 그런지 스트레스가 쌓인 거 같더군요.”
“이번에 내려가고 언제쯤 올라올 생각이야?”
하르는 넘버완 일행에게 맡기면 된다.
페트릭의 의사가 중요했다.
왜냐하면.
‘이곳엔 토너가 있으니까.’
토너와 페트릭은 하루도 빠짐없이 대련을 하고 있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결과지만, 천재를 상대로 페트릭도 성장하고 있었다.
이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였다.
“음···.”
고민하는 페트릭.
이내 고민을 마친 페트릭이 말했다.
“곧바로 올라올 생각입니다.”
역시.
페트릭 또한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다.
토너와의 대련은 페트릭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하긴 경쟁으로 강해지고 있으니까.”
“네···?”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의 페트릭.
이게 무슨 반응인가.
설마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일까.
“토너와의 대련 때문에 빨리 올라오는 게 아니야?”
“아··· 이야기 드리는 걸 깜빡했군요.”
깜빡하다니 무엇을?
“사실 메시아와 저···.”
어?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전혀 몰랐다.
아니,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야, 페트릭이 메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메시아의 마음은 도통 눈치채지 못했다.
“진짜로?”
“네. 어찌 제자 된 도리로 스승님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래? 일단 축하해.”
뭐가 됐건 축하해줄 만한 이야기였다.
“그럼, 메시아 때문에 빨리 돌아오려는 거야?”
“네. 아직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멀리 떨어질 수야 없죠.”
“그럼, 메시아보고 내려···.”
생각해보니 그건 할 수 없겠다.
메시아는 내 시녀를 맡고 있기 전에 황실의 시녀였다.
시녀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명예가 황실에서 근무하는 것이다.
그런 직장을 버리고 페트릭에게 가라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페트릭과 결혼을 한 것도 아니니까.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된 거야?”
페트릭과 메시아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페트릭이 잠시 말에 뜸을 들이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그게 말입니다···.”
페트릭의 이야기는 제법 달달했다.
메시아는 진작에 자신에 대한 페트릭의 마음을 눈치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점점 끌리게 되었다가, 페트릭의 고백을 승낙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럼, 어떻게 고백한 거야?”
“그···.”
부끄러운지 얼굴이 붉어지는 페트릭.
“정말 좋아합니다. 이 말을 했었지요.”
단순하지만, 자신의 말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말이었다.
어떻게 보면 좋은 고백이다.
“오··· 제법 용기가 있구나.”
그리고 그 순간 방의 문이 열렸다.
얼굴이 붉어진 메시아가 들어온 것이었다.
“잠시만요!”
무표정의 메시아가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메시아가 페트릭을 데리고 방을 나가버렸다.
방에 홀로 남게 된 나는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꼈다.
“부럽네···.”
내 낮은 중얼거림이 방 안 가득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