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끝이 찾아왔다.
몸에 한계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되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공격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단 한 번도 사람에게 최대의 힘을 보인 적 없었지.’
신체강화의 묘리를 이용한 타점의 극대화.
퇴마검이 부러질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 모든 힘을 끌어 담아, 벨레스의 지척에 도달한 그 순간 마나를 폭발시켰다.
그 반발로 나는 뒤로 튕겨졌다.
“이럴 수가···.”
내 최대의 공격도 벨레스에겐 소용이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가온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벌써 두 번째의 죽음인가···’
전에도 생각했지만 죽음이란 게 참으로 기분 나쁜 일이었다.
또다시 회귀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후회 없이 살고 있었지만, 후회되는 삶이었다.
벨레스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네 녀석의 모든 발악이 무로 돌아갔군.”
“닥치고 죽여라.”
나는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변이 일어났다.
내 뒤편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며 벨레스를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이 더러운 악마 녀석!”
벨레스는 누군가가 던진 무언가를 부셨다.
그리고 쏟아지는 액체.
표정을 찡그리는 벨레스를 보아 저 무언가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성수··· 그런데 누가?’
뒤를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고개를 돌릴 힘마저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 내 바로 뒤까지 도달한 누군가였다.
“도우러 왔습니다!”
도우러 왔다고?
나를?
도대체 누가?
“당신은 누구죠?”
“일단은 몸을 피하고 이야기하시죠.”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 싶었다.
저 벨레스에게서 도망칠 방법은 없다.
결국엔 나도 이 사람도 죽을 것이다.
“무리입니다.”
“아니요, 무리가 아닙니다.”
무리가 아니라는 남자의 말.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환한 빛이 일렁이더니 굉장한 마나의 소용돌이가 쳤다.
“이건···?”
“악마 녀석아, 잘 있어라!”
그저 흥미롭다는 듯 바라만 보는 벨레스.
“음··· 네놈을 여흥거리로 남겨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더 강해져서 나를 찾아오거라!”
그리고 한 순간 눈앞에 풍경이 달라졌다.
곧바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차렸다.
“텔레포트 스크롤.”
마법이 담긴 종이.
그것도 이동마법이 담긴 종이였다.
엄청난 고가의 물건.
벨레스에게서 도망쳤다고 확신한 순간 온몸에 힘이 빠졌다.
“이제 다시 이야기를···.”
흐릿하게 남자의 모습이 보였지만,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에피니아는 수하르가 있던 곳으로 갔으나 아무도 없었다.
“어라? 어디 간 거지?”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수하르의 그림자조차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다 한 사람이 에피니아에게 다가왔다.
“아, 일행 있어요.”
남자가 말을 거는 일이 한 두 번 있던 게 아니었기에 에피니아는 당연히 저 남자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서 저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일행이 있다는 에피니아의 말에도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혹시 그 일행 분의 이름이···?”
“그건 왜요?”
“혹시 수하르가 맞습니까?”
“어···? 맞는데요.”
낯선 남자를 통해 수하르의 이름을 들은 에피니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이 지금 급한 일이 생겼다고 갑자기 어디론가 가셨는데 저한테 말 좀 전해달라고 하시더라고요.”
“네? 그게 정말인가요?”
에피니아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때를 남자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시간이 있으시면···.”
에피니아는 남자의 뒷말을 듣지도 않고, 자리를 떠났다.
갑자기 혼자 남은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에피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거야.”
얼마나 급한 일이기에 얼굴조차 보지 않고 떠난다는 말인가.
수하르에게 서운하다는 생각을 가진 에피니아였다.
“에이, 뭐 어쩔 수 없지.”
이렇게 급하게 떠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에피니아는 짐작했다.
“그럼···.”
에피니아는 고민했다.
계속해서 유적을 돌아다녀야할지 아니면 황실로 돌아가야할지를 말이다.
이내 고민을 마친 에피니아가 말했다.
“그냥 돌아가자.”
분명 유적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기뻤지만, 수하르가 가버린 이상 더 이상 유적을 돌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진 에피니아였다.
“또 언제 만날 수 있으려나···.”
언젠가 만날 날을 기대하며 에피니아는 황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갑자기 혼자가 된 벨레스.
“그나저나 이상하군.”
벨레스는 반신의 경지에 올랐다.
경지가 높은 만큼 기척에 관해서도 예민했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남자의 기척을 느끼진 못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지부가 멸하기 전에 가끔 조직원이 실종되는 일이 벌어졌었다.
그 일도 벨레스는 카시아스가 벌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카시아스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녀석들도 있었던 것인가.”
그나저나 벨레스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어떻게 지부를 찾은 건가 의아했지만 저 정도 실력이라면···.”
한 악마가 떠올랐다.
자신과 비교했을 때 많이 급이 떨어지는 악마였다.
그 악마는 책의 악마, 크부였다.
“크부를 쓰러트리고 차지한 것이겠군.”
하지만 한 가지 의아한 점을 생각해냈다.
“그런데 크부를 쓰러트린다고 책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을텐데.”
그랬다면 벨레스가 진작에 크부를 죽이고 책을 뺏었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크부가 게임을 했다는 것일텐데.
“그 편파적인 게임에서 이겨내다니. 카시아스··· 정말로 대단하군.”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어졌기에 벨레스는 조직으로 복귀하기로 했다.
“이제 싹 다 바꿔야겠어.”
그 책으로 인해 지부의 많은 곳을 들켰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둘러 지부를 옮길 필요가 있었다.
“다시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꼭꼭 숨어야겠지.”
숙적이 될 카시아스가 살아있다.
아마 회복한 후에 곧바로 다른 지부를 습격할 가능성이 있다.
“수하는 많은 게 유리하니까.”
벨레스는 자신의 계획을 위해 수하들을 살려두기로 결정했다.
***
나는 눈앞에 있는 상황이 낯설게만 다가왔다.
처음 보는 남자가 나를 위해 약초를 갈고, 나를 치료해주고 있었다.
이 남자는 값비싼 텔레포트 스크롤을 이용해 나를 살려주기까지 했다.
“저기···.”
“어, 정신이 드셨습니까?”
“누구신데 저를 이렇게 도와주시는 겁니까?”
이 남자에게선 전혀 악의를 느낄 수 없었다.
살의 또한 느껴지지 않았기에 조직과 관련된 사람도 아닐 터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일단은 자기소개가 우선이겠죠. 오드라고 합니다.”
오드?
설마··· 아니,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있었다.
확인차로 내가 물었다.
“혹시 페트릭이라고 아십니까?”
페트릭이라는 이름에 놀라는 표정을 짓는 오드였다.
분명했다.
이 사람이 페트릭의 전 스승인 오드다.
“어떻게 그 이름을 아시는 건지···.”
“제 제자입니다.”
“네?”
“그리고 제자를 통해 전 스승의 존재도 알게 되었구요.”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오드.
“하하, 그 아이가 아직도 저를 기억해주고 있군요.”
“그렇습니다. 갑자기 떠난 스승을 많이 그리워하고 있었습··· 큭!”
말을 하던 중에 고통이 느껴져 표정을 절로 찡그려졌다.
오드가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았습니다. 말은 삼가시죠.”
“으윽··· 알겠습니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지금은 상처를 회복해야할 때였다.
단 한 번도 벨레스의 공격을 맞진 않았다.
정확히는 벨레스는 가볍게 한번 공격한 것이 끝이었다.
모두 내가 쓴 힘에 대한 부작용으로 얻은 상처였다.
‘일단은··· 다시 자야겠어···.’
약초의 효능 때문인지 잠이 쏟아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저는 잠시 눈 좀 붙이겠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상처가 조금이라도 치유된 후에 모든 걸 말해드리겠습니다.”
“네···.”
그 직후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일주일이 지났다.
상처는 많이 나아졌고, 오드와의 대화를 통해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오드가 페트릭을 떠난 이유는 이미 나왔었다.
전에 들었던 대로였다.
“사실 용병 생활을 하다가 한 유적을 발견했습니다.”
“유적이요?”
“네, 고대에 만들어진 유적이었죠. 그곳에서 과거를 알게 되었죠.”
오드가 알게 된 과거는 나도 알고 있는 과거였다.
신기한 능력을 가진 자만이 귀족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떠나신 건가요?”
내 기억으론 분명 오드는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오겠다고 하였다.
어째서 그런 말을 남기고 떠난 것일까.
“그게··· 유적에서 발견한 일기 때문이라고 해야할지···.”
“일기요?”
일기를 발견한 것까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해가지 않는 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해석이었다.
“고대에 만들어진 유적이었다면 고대언어일텐데··· 어떻게 해석을 하신 건가요?”
두 번째로는 그저 일기 때문에 떠났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게다가 고작 일기 하나 때문에 여행을 떠나신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오드는 내 의문을 하나씩 풀어주었다.
“사실 저도 특별한 핏줄을 타고 난 것 같습니다.”
“네?”
“고대에 태어났다면 전 귀족이었겠죠.”
그렇다는 것은.
“오드도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네. 제가 가진 능력은 어떤 문자라도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그건 정말···.”
유용한 능력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오드의 부모는···?”
보통 부모 중 한 명이라도 능력을 가져야 능력이 나타난다.
그렇게 나는 알고 있었다.
아마 확실할 터였다.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 부모님이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 저만 이렇게 특별하게 태어난 것인지.”
“그런가요···.”
하긴 그보다 더 중요한 물음이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일기에 뭐라고 적혀있었나요?”
오드가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가 그 일기에 있을 것이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오드가 말했다.
“그 일기는 단 한 사람의 일생이 적혀있었습니다.”
“누구의 일생이었습니까?”
“누구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륙에 벌어진 일을 자세히 알고 있는 누군가였죠.”
대륙에 벌어진 일?
“대륙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제국의 마계정벌 이후에 벌어진 대규모 반란입니다.”
그거라면 알고 있다.
카시아스가 돌아왔을 때는 그 반란은 성공적으로 끝난 상태였었지.
“그런데 그게 왜?”
“일기의 주인은 그 반란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고 추측했습니다.”
“누군가라면···?”
“가령 마족이라든가···.”
마족!
설마 그렇다는 것은.
“하여튼 왜 그 반란의 배후가 있었다고 생각했을까요?”
“음··· 잘 모르겠네요.”
“전투능력이 없는 귀족만 남아있더라도 아무런 능력도 없는 평민이 귀족을 몰아낼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 일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동시다발적···?
그럴 수 있는 게 아닌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고, 이들은 거리가 떨어졌음에도 자유롭게 소통했습니다.”
“그야, 능력이 없더라도 마법을 쓴다면···.”
“이 당시에 마법은 그렇게 발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평민입니다. 마법을 제대로 익히기엔 무리가 있죠.”
“그렇다는 것은···.”
평민 측에 뛰어난 마법사가 존재했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그 당시 마법으론 생각할 수 없는 마법.
특정할 수 있는 배후는 단 하나였다.
“인간이 아닌 마족이라면 가능하겠네요.”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마법을 사용하던 마족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