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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영주는 쉬고 싶다-93화 (93/150)

#93화.

[성역의 첫 번째 시련, 정의.]

편지에는 한 문장만이 적혀있었다.

“어떤 식으로 시련이 진행되는지는 알려줘야지.”

불친절한 시련이었다.

일단 시련에 관한 것이 정의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에 대한 정의를 말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떻게 시련이 진행되는지는 짐작조차 불가능했다.

“에휴, 일단 잠이나 자야지.”

오랜만에 검을 휘둘렀기 때문에 피로가 쌓였다.

지금 눕는다면 곧바로 잠에 들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데이브 칼데르트가 자신의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가주의 집무실을 향했다.

“왜, 갑자기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시는 거지?”

데이브는 몇 가지 가능성에 대해 고민했다.

일단 확실한 것은 잘못한 게 있기 때문에 부른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주어진 일은 완벽하게 처리해냈으니까.”

가주의 집무실 앞에서 데이브는 노크했다.

“들어오거라.”

데이브가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칼데르트가의 주인인 메디온 칼데르트가 데이브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로 저를 이렇게 따로 부르신 겁니까?”

“아비가 되어서 자식을 따로 부를 수도 있는 법이지.”

데이브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따로 저를 부르실 경우엔 일적인 용무가 있을 때밖에 없으셨습니다.”

메디온이 웃기 시작했다.

“역시, 내 아들. 알아맞히는 게 귀신같구나. 그래, 어찌 보면 일적인 용무로 부른 것이지.”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는 메디온이었다.

이내 메디온의 입이 열렸다.

“수하르가 언제쯤 돌아올 것 같나?”

“수하르요···?”

데이브가 생각해보았다.

여행을 간다고 했었다.

“길어도 한 3년이나 5년이 아닐까요?”

“흠··· 길군.”

데이브는 혹시 자신을 부른 이유가 수하르 때문인가 싶었다.

하지만 수하르가 엮인 이상 일적인 용무로 보긴 힘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은 왜···.”

“이제 나도 은퇴를 할까 생각 중이다.”

“예···?”

데이브는 메디온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겉보기론 매우 건강해 보이는 메디온이었기에 은퇴의 이유가 없었다.

데이브는 메디온의 건강을 걱정했다.

“어디 몸이 편찮으시기라도 하신 겁니까?”

“아니, 몸은 튼튼하기 그지없지.”

“그럼, 어째서 은퇴를 말하시는 겁니까?”

건강에 이상이 없는 이상 은퇴의 이유가 전혀 없었다.

데이브는 자신이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메디온의 은퇴가 이르다고 생각했다.

“케론 사르키드 님을 알고 있나?”

데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토왕국에서 로토왕국의 검성을 모르는 귀족은 없을 것이다.

“그분도 이맘쯤에 자식에게 작위를 물려줬었지.”

“예?”

“나도 이제 작위를 물려줄 때가 되었다는 것이지.”

“너무 이르다고 생각됩니다.”

칼데르트가를 이끌기엔 데이브는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이른 시기에 물려줘야 네가 배울 수 있는 것도 많은 법이다.”

“예···.”

여전히 데이브는 메디온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나도 지금 당장 가주의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여행을 떠난 수하르가 돌아온 후에 승계식을 진행할 생각이다.”

데이브는 그제 서야 깨달았다.

메디온이 수하르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말이다.

“길어도 5년. 5년 이내로 수하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승계식은 수하르 없이 진행될 것이다.”

본래 승계식의 자리에서 가문의 핏줄이 전부 참석을 해야한다.

그것이 의례였다.

“만약 수하르가 내일 당장 돌아온다면 승계식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음··· 그거야 간단하지. 내일 당장 승계식이 진행될 것이다.”

데이브가 승계를 위해서는 수하르가 빨리 돌아와야만 했다.

하지만 데이브는 이르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데이브는 수하르가 늦게 오기를 바랬다.

“그럼, 저는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데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는 메디온을 확인하고,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이럴 때가 아니군.”

데이브는 서둘러 편지를 쓰기로 했다.

수하르에게 최대한 늦게 돌아오라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어디로 보내야하는 것이지?”

대륙 곳곳을 여행한다고 한 수하르였다.

일정한 거처가 없다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큰일이군. 그렇다는 것은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데이브가 두 손을 모은 채 기도를 시작했다.

‘동생아··· 제발 5년을 꽉 채우고 돌아오거라.’

아직까지 가주라는 직위가 가지는 책임감을 감당하기 싫은 데이브였다.

***

“꺄아아악, 살려주세요.”

잠을 깨우는 여자의 비명소리.

나는 그 비명소리를 듣고, 서둘러 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성역에서 이런 비명소리가 들릴 이유가 있는 건가?’

곧바로 이게 시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집 밖에 나오자 상처투성이의 여자가 내게 안겨들었다.

“기사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잠시 진정 좀 해보세요.”

시련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너무나도 현실감이 넘쳤다.

내게 안겨드는 여자의 감촉이 생생했다.

마치 현실과도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풍경이 우거진 숲속으로 바뀐 상태였다.

이 여자에게 비명소리가 나오게 한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잠깐···!’

이런 상황 전에도 겪은 적이 있었다.

나는 서둘러 여자를 떼어내고, 거리를 벌렸다.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주시죠.”

우선 여자를 경계했다.

예전에 이와 비슷한 함정에 빠진 기억을 떠올렸다.

차디찬 목소리가 여자의 입에서 나왔다.

“왜 갑자기 거리를 벌리시는 건가요?”

“우선 어떤 상황인지 말씀부터 해주시죠.”

“왜 갑자기 거리를 벌리시는 건가요?”

“아니, 제 말을···.”

“왜 갑자기 거리를 벌리시는 건가요?”

점점 빨라지는 여자의 말.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 정체가 뭐야?”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 여자는 위험해 처한 상태는 아니었다.

점점 빠르게, 점점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같은 말은 반복하는 여자.

그 여자의 모습이 점점 바뀌어갔다.

“마족!”

마족을 대표하는 종족은 악마이지만, 여러 종족이 존재한다.

그리고 눈앞에 모습이 바뀌어가는 여자의 종족은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종족이었다.

‘본 모습은 깃털로 감싸져있는, 그 깃털은 의태가 가능한···.’

그런 종족이 마족에 있었다.

“도플갱어!”

마치 이족보행하는 새의 모습으로 바뀐 여자.

마족인 이상 적은 확실했다.

“꺄아아악!”

여자의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내게 달려드는 도플갱어.

나는 곧바로 퇴마검으로 도플갱어를 베어냈다.

두 동강이 된 도플갱어가 서서히 사라졌다.

“이게 시련이라는 것인가?”

주위의 풍경이 다시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공에 글자가 떠올랐다.

[정의는 현혹되지 않는다.]

첫 번째 시련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또··· 무슨?”

풍경이 바뀌며 한 집단이 개인을 괴롭히는 모습이 보였다.

붉은 옷을 입은 집단이 푸른 옷을 입은 개인을 괴롭히고 있었다.

푸른 옷을 입은 개인이 내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영주님,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십쇼!”

영주님?

설마 이 상황에서의 나는 영주라는 것인가.

“무슨 일인지 설명해보거라.”

푸른 옷의 사람을 제지하고, 붉은 옷의 사람이 말을 꺼냈다.

“영주님, 이자는 죄인입니다.”

죄인?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이자가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죄인이라는 것이더냐.”

그러자 푸른 옷을 입은 사내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영주님, 맞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어떤 죄를 저질렀지?”

“가족들이 굶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힘들어 남의 물건에 손을 댔습니다.”

음.

안타까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죄를 지은 죄인이긴 했다.

“그런데 무슨 말을 들어달라는 것이지?”

“도둑질 한 번으로 이곳에서 쫓겨나게 생겼습니다.”

조금은 과한 처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죽인 것도 아닌데 마을에서 쫓겨낸다니.

마음이 푸른 옷의 사내 쪽으로 가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붉은 옷의 사람이 다급하게 말했다.

“영주님, 이 마을에서 도둑질을 하면 쫓겨난다는 게 이 마을의 규칙입니다.”

“이 마을의 규칙이라고? 이봐, 자네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나?”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푸른 옷의 사내.

알고 있었다는 소리겠지.

더 이상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결국 이 푸른 옷의 사내는 죄를 지었지만 정해진 형벌에 반기를 들고 있는 중일 뿐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군.”

“하지만, 영주님! 제 가족들은 어떻게 합니까. 지금과 같은 전란의 시기에 떠돌이 생활이라니. 제게는 어린 자식도 있습니다. 어린 자식이 떠돌이 생활을 버틸 수나 있겠습니까!”

푸른 옷의 사내는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예?”

“죄를 지은 건 자네라네, 왜 가족을 끌어들이는가.”

“그게 무슨···?”

“떠나는 것은 자네, 혼자라네.”

내 말에 푸른 옷의 사내는 물론이고, 붉은 옷에 사람들 또한 놀라고 있었다.

“내가 이상한 말이라도 한 것인가? 혹시 남의 물건에 손을 댄 죄인은 가족 모두가 마을을 떠나야하는 것이라도 되는 겐가?”

붉은 옷의 사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는 것은 자네만 나가면 되는데 왜 어린 자식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인가?”

잠시 멍하니 있던 푸른 옷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약간의 분노가 섞인 듯한 말이었다.

“그 자식이 아비 없이 자라는 것이 괜찮다는 말입니까?”

“죄를 지은 아비 밑에서 자라는 것보단 나은 것 같군. 자네 말대로 전란의 시기에 떠돌이 생활을 온가족이 하는 것보다 자네만 하는 것이 나은 게 아닌가?”

내 말은 정론에 가까웠다.

반박할 말 따윈 저 푸른 옷의 사내에게 없을 터였다.

“물론 가족이 자네와 같이 떠난다면 내가 말릴 수는 없을테지.”

“예···?”

“이봐라, 저자의 가족이 있다면 나와보거라.”

그러자 붉은 옷의 집단에서 두 명의 사람이 나왔다.

젊은 여자와 아이였다.

다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젊은 여자는 얼굴에 드믄 멍이 보였다.

“아비를 따라 이 마을을 떠나겠는가?”

잠시 주저하던 젊은 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떠나지 않겠다는군.”

“······.”

“뭐하는가? 어서 안 떠나고?”

“이럴 수는 없습니다!”

푸른 옷의 사내는 끈질겼다.

“도대체 뭐가 이럴 수 없다는 것인가? 자네의 아내는 자네를 따라 떠나기 싫다고 하는데.”

“···어떻게 가족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까.”

“흐음···.”

잠시 젊은 여자를 보았다.

겁에 질린 듯한 모습.

하지만 그 대상은 내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드물게 보이는 멍 자국.

“자네는 그렇게 좋은 남편, 아버지는 아니었나보군.”

아내의 행색을 보아 단언할 수 있었다.

이자는 폭력적인 사람이다.

그 폭력은 가족에게도 향했던 것이고.

가족 때문에 도둑질을 한 것도 거짓이겠지.

“더는 듣기 싫다, 어서 떠나거라.”

단언하는 내 말에 푸른 옷의 사내는 좌절했다.

그리고 젊은 여자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와 동시에 눈앞의 풍경은 내가 처음 보았던 지상낙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허공에 글자가 떠올랐다.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지지 않는 원칙주의의 정의]

그리고 글자가 뭉개지며 새로운 글자가 떠올랐다.

[첫 번째 시련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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