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장로 드워프의 이야기는 전설 속에서 들었을 법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미쳐버린 블랙드래곤이 세계를 멸망시켰지. 모든 종을 멸했어.”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은 거죠?”
“그야, 나도 모르지. 과거에 죽은 자가 미래를 어떻게 알겠나.”
나는 여전히 궁금했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계신 건가요?”
“음··· 아무래도···.”
장로 드워프는 속죄를 해야만 한다고 했었다.
그 말이 내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속죄라면 누구에게··· 신 말입니까?”
신이 속죄하라며 이런 공간에 영혼을 가둬버린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아닐세.”
“그렇다면···?”
“모두에게라네.”
모두?
뭐가 모두라는 걸까?
“드워프, 엘프, 하프드래곤, 요정, 그리고 정령.”
전부 전설 속에나 나오는 굵직한 종족들이었다.
“그들에게 뭘 사죄해야합니까?”
도대체 뭘 사죄하기 위해 이런 공간에 갇혀있는 걸까.
“아주 먼 훗날까지 그 시대의 종족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있을 만큼 모두 강력한 종족이었지.”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종족은 인간보다 강했다.
태생부터 달랐다.
“하지만 그 강함이 화합의 장을 망쳐버렸어.”
“화합의 장이라면···?”
“종족간의 전쟁이 자주 벌어지게 되며 종족우월주의가 생겨났지. 이것은 모든 종족이 그랬어.”
처음 듣는 단어였지만 대강 알 수 있었다.
드워프는 드워프만, 엘프는 엘프만을 월등하다 여겼던 것이겠지.
타종족은 미개하다고 여긴 것이고.
“그렇게 종족간의 균열이 생긴 상태에서 미쳐버린 드래곤이 나타난 것이지.”
“블랙드래곤···.”
“그래, 온몸이 검은 드래곤이지. 모든 종족이 함께 싸워야하는 상황이었지.”
“그러지 못했겠군요.”
미개하다고 여겨지는 타종족과 동맹하기 싫었겠지.
“그래. 각개격파 당했다. 한 종족씩 각개격파 당했어.”
“그런데 왜 이런 곳에 있으신 거죠?”
“신이 내린 벌이자 기회야.”
벌이자 기회?
“신은 한탄했지. 사사로운 종족간의 감정 때문에 대륙이 멸망에 이르렀으니까.”
“그래서 당신들의 영혼을 이곳에 가둔 것이고요?”
“그래, 이곳에서 반복되는 싸움을 하게 만들었지. 그 괴물 같은 블랙드래곤과 말이야. 몇 번 반복했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질 않네.”
아무래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그 시대의 종족들이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긴 시간이 흘러 종족간의 안 좋은 감정이 사라졌지.”
“그렇다면 블랙드래곤을··· 아니겠군요.”
이들이 동맹을 통해 블랙드래곤을 쓰러뜨렸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부끄럽지만 자네의 생각대로네. 끈끈한 동맹에 완벽한 합까지 이뤄졌네. 하지만 또 졌어. 그때야 깨달았네. 신은 우리에게 기회를 준 게 아니라 계속되는 벌을 내린 것이라고.”
나는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절망한 얼굴을 말한다면 지금의 장로 드워프의 얼굴이겠다.
그만큼 장로 드워프의 안색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생각하게 되더군, 지금처럼 적은 수가 아닌 많은 종족들이 남아있었을 때 이렇게 동맹을 맺고, 블랙드래곤을 상대했다면···.”
정확하진 않지만 분명 그랬다면 승리는 이종족 간의 동맹이 쟁취했을 것이다.
제아무리 강한 블랙드래곤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갑작스레 강한 어조로 말을 내뱉은 장로 드워프였다.
“자네가 나타났네.”
“네?”
“지금까지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자네 같은 사람은 단 한 번도 없었네. 옛 한 인간을 제외하면 말일세.”
하긴 이건 네 번째 시련이었다.
이 시련까지 도달하기엔 쉽지 않았을 것이지.
그게 아니라면 다른 종류의 시련을 받았거나.
“그리고 아주 먼 옛날에 한 인간이 나타났을 때 블랙드래곤을 쓰러트릴 뻔했네.”
“그런가요?”
“그렇다네! 그리고 자네는 그때 보았던 인간보다 확실히 강하네. 그렇다는 것은 이번에는 확실하게 쓰러뜨리는 것이 가능하겠지.”
장로 드워프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었다.
옛날에 인간을 만났고, 이 굴레를 벗어날 뻔했다면 다시 찾아온 인간인 나를 반겨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다른 드워프들은 나를 경계했다.
갑자기 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 인간이 마지막에 무슨 짓을 한 건가요?”
잠시 침묵하는 장로 드워프.
“자네··· 참으로 예리하구만···.”
“그 인간이 어떤 짓을 한 거죠?”
“쓰러뜨리기 직전에 배신을 했지. 블랙드래곤이 아닌 우리를 습격한 것이라네.”
“······.”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쓰러트리기 직전까지 간 상황이라 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 인간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
“저는 믿어주시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라네.”
“저 또한 블랙드래곤을 쓰러트려야 이곳에 빠져나갈 수 있으니 말이죠.”
“알겠네.”
그리고 난 하나의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다른 종족들은 언제 나타나요?”
“시간이 지나면서 나타날걸세.”
하긴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게 하나 있었다.
“블랙드래곤에 대해서 알려주십쇼. 되도록 모든 것을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블랙드래곤에 대해서 알아낸 만큼 상대하는 데에 쉬울 것이다.
***
블랙드래곤을 상대해야하는 전날이 다가왔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몬스터가 아닌 이종족이었다.
“이로써 마지막 이종족인가···.”
하프드래곤.
이종족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종족이었다.
드래곤의 아종에 분류되지만, 몬스터의 취급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래곤이지만 드래곤이 아니었다.
드래곤의 힘을 가졌지만 드래곤의 지성을 뛰어넘었다.
“오호··· 인간인 건가···.”
단번에 나를 파악한 하프드래곤이었다.
나는 하프드래곤에게 악수를 청하려고 했지만 하프드래곤는 나를 향해 공격했다.
“이 더러운 배신자 놈!”
아무래도 전에 있던 사건 때문에 나를 공격한 듯하였다.
처음 있던 일은 아니었기에 나는 하프드래곤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신음을 내며 천천히 고꾸라지는 하프드래곤.
“죄송하지만, 저는 배신 안 할 겁니다.”
처음엔 말로 풀어 보려고 했지만, 화가 난 이종족들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내 옆에 드워프가 있어도 말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무색하게도 폭력이었다.
한 대 때리고 진정시킨 뒤에 말로 풀어냈다.
다행히도 이 방법은 엘프를 제외하면 잘 먹혔다.
“크흑··· 크··· 크하하하.”
하프드래곤은 갑작스러운 고통에 미쳐버린 것인지 웃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보았던 인간보단 확실히 강하군.”
“······?”
“강하면 강할수록 거짓을 하지 않지. 자네를 믿겠네.”
단번에 나를 믿어주는 하프드래곤이었다.
나는 그 호쾌함이 마음에 들었다.
“오··· 당신 이름이 뭐지?”
“하프드래곤 킬리안이다.”
킬리안.
좋은 어감의 이름이었다.
나는 킬리안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반가워. 내 이름은 수하르다.”
이제야 내 악수를 받아주는 킬리안이었다.
“이번엔 이 더러운 굴레를 벗어나보자고.”
킬리안은 자신들의 종족이 있을 곳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추가로 나에 대한 설명은 맡겨만 두라고 하였다.
이제 블랙드래곤을 상대하기까지 약간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슬슬 정비를 해야겠어.”
드워프, 엘프, 하프드래곤, 요정, 그리고 정령이 모두 등장했다.
앞서서 먼저 나온 이종족들과 함께 몬스터와 싸우며 어느 정도 합을 맞췄다.
합을 마치지 못한 것은 하프드래곤뿐이었다.
“확실히 진작에 동맹을 맺었다면 이종족이 블랙드래곤을 쓰러뜨렸을 거야.”
내 짐작이지만 아마 확신할 수 있었다.
종족의 정예들만이 이곳에 갇히게 되었으니 그 당시의 시대엔 많은 병력이 존재했을 것이다.
‘게다가 서로의 기술을 공유했다면.’
드워프의 무기제작능력, 엘프의 마법, 하프드래곤의 신체능력, 요정의 지혜, 마지막으로 정력만이 가진 신비로운 힘.
이 모든 게 한데 어울러져 블랙드래곤을 상대했다면 간단하게 위기를 벗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랬기에 멸망했다.
“어찌 보면 불쌍하군.”
가벼운 위협에 멸망해버렸다.
신이 화가 날만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사이가 좋아진 이종족들이지만 아직까지 블랙드래곤에게 죽임당하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불쌍할 따름이다.
“내가 벗어나게 해주지.”
나는 드워프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블랙드래곤과 싸우기에 앞서 드워프들에게 퇴마검의 정비를 맡겼다.
지금쯤이면 내 퇴마검이 한층 더 발전한 상태로 변해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검은 내게 큰 도움을 주겠지.
***
모든 이종족들이 줄지어 서 있다.
정예만 모였다지만 전부 모이고 나니 수가 꽤 되었다.
이들 모두가 블랙드래곤과 싸우기 위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봐, 수하르, 블랙드래곤과 싸우기 전에 단상에 올라가서 한마디 하지?”
옆에 있던 킬리안이 한 말이었다.
과연 내가 말해도 될까 싶었다.
이런 내 고민을 알아차린 킬리안이 말을 꺼냈다.
“원래 전쟁에선 무리의 최강이 전쟁의 시작을 알려야하는 법이지.”
이들 중에서 제일 강한 건 내가 맞았다.
하지만 나와 비교할 수 있는 강자 또한 한 종족에 한 명씩 존재했다.
예를 들자면 하프드래곤 킬리안, 드워프 쿤타, 엘프 미드리아, 요정 피아, 정령 킹덤이 있었다.
“······.”
나는 아무 말 없이 각 종족의 강자들을 쳐다보았다.
엘프의 미드리아를 제외하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의 뜻이었다.
‘아직도 미드리아는 삐져있는 상태인 건가?’
엘프는 폭력을 야만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엘프에게도 선 폭력 후 대화를 한 탓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나마 다른 종족들이 옆에서 중재해준 덕에 동맹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때 선 폭력의 최초 희생자가 미드리아였다.
애당초 자존심이 강한 미드리아가 단번에 인간에게 쓰러졌다는 것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이들의 허락을 받은 내가 외쳤다.
“여러분이 인간에게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계신단 걸 알고 있습니다!”
블랙드래곤을 쓰러뜨리기 직전에 일어난 인간의 배신 사건을 내 입으로 언급했다.
모든 이들의 표정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전투를 앞선 상황에서 이 이야기는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동이었을테지.
하지만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안 좋은 기억을 일부러 끄집어낸 것이다.
“여러분들이 저에 대해도 약간 반신반의하고 있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몇몇의 눈초리가 따가웠다.
순전히 엘프는 폭력을 사용한 나를 미워하는 것이겠지만, 다른 종족은 달랐다.
강하게 기억에 남은 인간의 배신.
그것이 매우 크겠지.
“아무런 근거를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저를 믿어달라는 말은 쉽게 꺼내질 못하겠습니다. 그저 제 힘을 믿어주십쇼!”
내 진심이었다.
내 힘을 믿고, 차라리 나를 이용한다고 생각하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진심 어린 내 감정이 전해졌을까, 모든 이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내 연설에 좋게 반응해주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이제는 블랙드래곤을 상대할 시간이다.
나는 옆구리에 있는 퇴마검을 어루만졌다.
‘전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성능이 좋아졌어.’
드워프의 기술력이라고 해도 퇴마검을 전보다 훨씬 뛰어나게 만들 순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퇴마검은 그 시대에서 가장 뛰어난 기술로 만들어진 검이었다.
그나마 약간 더 좋아질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은 퇴마검을 받고는 완전히 달라졌다.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검이 되었지.’
퇴마검을 드는 순간 바로 느껴졌다.
퇴마검의 예기부터 달라졌다.
날카로움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마나를 받아들이는 것도 저항이 없었다.
‘드워프의 기술이 뛰어난 것도 있겠지만.’
드워프가 살았던 시대에서도 전설이라고 치부되던 광석을 퇴마검에 섞어준 것이었다.
그 덕분에 퇴마검의 성능은 완벽 그 자체가 되었다.
아마 현존하는 검들 중에서는 제일의 성능을 지녔을 테지.
퇴마검을 매만지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퇴마검만 있다면 블랙드래곤도 무섭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