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나는 허공에 뜬 시간을 확인했다.
[6:12:43]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반신의 경지에 도달했다.
반신의 경지에 도달하니 벨레스의 강함도 이해가 되었다.
“이 정도 힘이면 소드마스터를 충분히 가지고 놀겠구나.”
신체가 여러 번의 손상과 복구 덕에 피부의 강도마저 달라졌다.
굳이 갑옷 같은 걸 입지 않더라도 내 피부가 더 단단할 지경이었다.
“일단, 그래도 한번···.”
반신의 경지에 도달한 자만이 가지는 합쳐진 두 기운.
그 기운을 팔찌에 불어넣었다.
그러자 팔찌가 서서히 갑옷으로 변해갔다.
“오호라···.”
갑옷이 된 팔찌는 전보다 더 단단해졌다.
“이건 계속 써도 되겠군.”
마나를 거두니 갑옷은 다시 팔찌로 되돌아갔다.
나는 목에 걸린 두 목걸이를 빼내어 손에 쥐었다.
“킬리안과 신의 선물이라···.”
하나는 승리를 기원하는 부적이고, 다른 하나는 희생을 강요하는 물건이었다.
나는 손에 힘을 주어 신이 시련의 보상으로 준 목걸이를 부숴버렸다.
“반신의 경지에 도달한 지금의 상황엔 보험 따윈 필요 없다.”
가루가 된 목걸이가 흩어지며 사라졌다.
나는 킬리안이 준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이거면 충분해.”
아직 다섯 번째 시련까지 시간이 남았다.
나는 그 시간 동안 반신의 경지란 것에 알아갈 필요성을 느꼈다.
“어디 보자···.”
기억을 더듬어 보니 반신의 경지에선 생명을 창조했었다.
물론 그 생명이 꺼림칙하기 그지없는 생명이었지만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마기가 섞였기에 그랬겠지.
“나 또한 반신의 경지니 한 번 창조를 해볼까?”
나는 기를 모아서 창조라는 것을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다.
“음··· 전혀 감을 못 잡겠어.”
카시아스 또한 반신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도 창조를 했고, 오드가 발견한 유적에서도 창조를 했다.
나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가능하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별다른 수련 없이 가능했을 거란 생각이었다.
“난 왜 안 되는 거지?”
설마 반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받아들인 두 가지의 기운이 달라서 그런 걸까.
“아마도 그렇겠지.”
그렇다는 것은 분명 내가 받아들인 기운으로는 그들은 못하고, 나만 가능한 게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그렇다면 내가 해야할 일은 하나겠네.”
이곳을 나가기 전까지 반신의 경지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괜히 힘 조절을 못한 탓에 밖에서 사고를 치지 않으려면 말이었다.
“다시 수련을 해야겠군.”
힘을 조절하는 수련이기에 방금까지 해왔던 것보다는 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허공에 뜬 숫자가 다 떨어졌다.
[00:00:00]
그리고 그 순간 내게 선택권이 주어졌다.
[다섯 번째 시련을 도전하시겠습니까?]
그에 대한 답은 당연히 정해져있었다.
“아니!”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뤘다.
물론 그 과정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지만, 어쨌건 반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성역에서의 목표였다.
그리고 나는 반신의 경지에 도달했다.
게다가 힘 조절도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더 이상 성역에 있을 필요가 없지.”
이제는 밖으로 나갈 시간이다.
“날 여기서 내보내줘.”
그러자 허공이 갈라지며 어두운 공간이 나타났다.
분명 내가 걸었던 성역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갈라진 허공 속으로 들어갔다.
“어라···?”
분명 올 때와 달랐다.
여기를 걸어왔을 때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걷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눈에 보이는 듯하군.”
내가 걸어왔던 길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니, 보인 게 아니라 느껴졌다.
그리고 왜 이렇게 됐는지는 내가 알고 있었다.
“반신의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인가.”
자연력 덕분에 확실하게 기운으로 느낄 수 있게 된 정령력.
그 정령력이 마나와 합쳐지면서 어떻게 보면 세 가지의 기운으로 나는 반신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리고 반신의 경지에 도달한 후부터 내가 가진 염동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예를 들자면 공간 장악이라는 거겠지.”
염동력이 마나처럼 상시 내 주위를 살피고 있다.
전에는 못했던 것도 가능해졌다.
염동력으로 허공의 마나를 뭉칠 수도 있게 되었고, 나와 떨어진 곳에 내 마나를 보낼 수도 있게 되었다.
“확실히 강해졌어.”
아직 벨레스와 합을 겨루기 전이니 확실하진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전처럼 간단히 제압당하지는 않겠군.”
나는 벨레스에게 복수를 꿈꾸며 성역을 나가기 위해 걸었다.
성역으로 들어왔던 문이 보이며 내가 다가갈수록 점점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는 그 문을 통해 성역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꽤나 긴 시간 동안 계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성역의 밖에서 나를 처음으로 반겨준 사람은 들어왔을 때 보았던 안내자였다.
나는 안내자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혹시 지금이 언제인가요?”
“신성제국력으로 따지면 632년입니다.”
아··· 정말로 긴 시간이 지났다.
내 나이도 벌써 스물셋이다.
“흐음··· 집으로 빨리 가봐야겠군요.”
“로토왕국으로 가는데 필요한 것은 저희가 다 준비하겠습니다.”
나야, 뭐 준비해준다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바뀐 안내자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뭐,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거라면요.”
잠시 머뭇거리던 안내자가 입을 열었다.
“시련은 몇 단계까지 성공하셨습니까?”
“다섯 번째 단계에서 그만두었습니다.”
내 답에 순간 안내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마치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혹시 네 번째 시련이···.”
나는 네 번째 시련을 떠올렸다.
추위와 더위··· 그리고 이종족들과 함께 싸웠었다.
거기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꼽자면 하나였다.
“블랙드래곤과 싸웠습니다.”
“다섯 번째 단계에서 그만두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뭐··· 마지막이 허무하긴 했지만 어찌해서 시련을 극복해낼 수 있었죠.”
그러자 눈물을 흘리는 안내자였다.
“딱 한 가지만 더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나는 그런 안내자의 반응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다니.
“예···? 아··· 네, 뭐.”
“모두의 굴레가 끝난 겁니까?”
“그렇긴 하죠.”
내 답에 안내자가 무릎을 꿇더니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안내자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내 안내자의 혼잣말에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선조님··· 드디어 선조님의 바램이 드디어 이루어졌습니다.”
아무래도 이 안내자가 말하는 선조는 네 번째 시련을 경험한 성기사 바란이었을테지.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마음을 추스린 안내자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못난 꼴을 보여드렸습니다.”
“아, 아닙니다.”
“저희 가문이 성역의 안내자를 자처하게 된 것은 선조님의 바램 때문이었습니다.”
“······.”
무슨 바램인지 나는 이미 알아차렸다.
아마도 바란은 자신이 이뤄내지 못한 일을 다른 누군가가 이뤄주는 것을 지켜보고 싶었겠지.
“자, 어서 가시죠. 이럴 시간이 없으실 겁니다.”
“네? 그건 무슨 소리신가요?”
“당신이 성역 안에 있는 동안 당신과 관련된 소식은 제가 최대한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럴 시간이 없는 소식이라니 도대체 뭘까.
“이제 곧 칼데르트가의 가주승계식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어?
가주승계식?
나는 회귀 전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엇비슷했다.
설마?
“저희 아버지께서 어디 편찮으신 건가요?”
분명 칼데르트가의 배신자인 레아는 처단했다.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될 이유가 없었다.
“아,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 은퇴하시는 게 아닙니다. 단순히 이제 물러날 때라는 이유입니다.”
다행이었다.
그런데 왜 이게 내가 급하게 움직여야한단 소리인가.
“공표하기를 당신이 복귀하는 순간 바로 가주승계식을 시작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아, 그런가요?”
하긴 가주승계식에는 주변 귀족을 포함해 같은 핏줄을 이은 자라면 무조건 참석하는 게 맞긴 했다.
아마도 진작에 할 것을 나 때문에 늦춘 모양이었다.
“뭐··· 일단 서둘러야겠네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주승계식 이후에 내가 할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너무 자리를 오래 비웠다고 혼이 좀 나겠네.”
나를 야단칠 가족을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럼, 바로 준비해주시죠.”
“네, 곧바로 칼데르트가로 향할 마차를 구해놓겠습니다. 모두 최고급으로요.”
“네? 그렇게까지요?”
안내자가 미소를 지었다.
“당신는 저희 가문에서의 은인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니까요.”
“아···.”
은인.
그러고 보니 나는 바란의 후손에게 가장 중요한 걸 말해줄 필요가 있었다.
“이 말을 잊었네요. 바란이 배신자라는 오명은 벗어났습니다. 그들, 특히 미드리아의 오해는 전부 풀렸어요.”
아무 말 없이 안내자가 뒤돌고 걷기 시작했다.
“마차를 준비해오겠습니다.”
안내자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으로 보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조용히 안내자를 뒤따랐다.
***
나는 마차의 창 너머로 칼데르트가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대로구나.”
마차가 칼데르트가의 저택 입구에 도달하자, 경비가 막아 세웠다.
“신원 확인 좀 하겠습니다.”
“이분은···.”
나는 마차에서 내리며 마부의 말을 끊었다.
“칼데르트가의 막내가 돌아왔다고 전해주십쇼.”
벙찐 표정을 짓는 경비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니 신입이 분명했다.
아마도 내 얼굴을 모를테지.
“수하르 칼데르트가 형님의 가주승계식을 보기위해 복귀했다고 전해주십쇼.”
그 날 칼데르트가엔 크나큰 소동이 벌어졌다.
***
칼데르트가의 식탁엔 모든 가족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가족들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죄송합니다. 저도 이렇게 여행이 길어질지는 몰랐습니다.”
“······.”
모든 가족이 침묵으로 답했다.
아무래도 많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아버지의 입이 열렸다.
“내가 화를 내는 것은 단 한 가지다. 왜 소식을 전하지 않았느냐.”
“그게··· 편지를 보낼 시간도 없었습니다.”
성역의 안에서 편지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솔직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걸 말이라고!”
이때 데이브 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수하르도 반성하고 있는 거 같으니 그만 용서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묘하게 데이브 형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데이브 형?”
데이브 형은 아버지 몰래 내게 엄지를 치켜세워주었다.
나는 그런 데이브 형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불편한 식사자리가 끝나고, 아버지의 집무실을 찾아가기 전에 데이브 형에게 먼저 향했다.
데이브 형이 나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나는 데이브 형의 방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데이브 형, 나야.”
문이 열리자 데이브 형이 내게 격한 포옹을 해왔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형? 왜 이러는 거야?”
“진짜 시간을 딱 맞춰서 와줬구나! 정말 고맙다!”
도무지 데이브 형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데이브 형은 내게 그간의 사연을 이야기해주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이랬다.
“아직 가주승계식은 이르다고 생각해서 내가 최대한 늦게 와줬으면 했다는 거라고?”
“그래, 맞아! 그리고 수하르, 넌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이 최대한 늦게 와줬어!”
“어··· 그랬구나···.”
그렇다면 식사자리에서 내게 엄지를 치켜세워준 게 그런 의미였구나.
‘네가 늦게 와줘서 고마우니까, 내가 좀 도와줄게. 나만 믿어 같은···.’
나는 그런 데이브 형의 모습이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하하, 재밌네. 하여튼 그럼, 나는 아버지를 뵈러 가볼게.”
“응, 그래. 그리고 아마 너한테 그 이야기를 하실 거야.”
“무슨 이야기?”
“너한테 약혼자리가 들어왔다는 거?”
데이브 형의 말에 나는 잠시 사고가 정지되었다.
‘약혼···?’
나는 서둘러 아버지가 계실 집무실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