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나는 집무실을 열며 아버지께 소리쳤다.
“약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전혀 약혼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는 인상을 찌푸렸다.
“데이브가 말했나보구나.”
“예. 그런데 약혼이라니요.”
“사르키드 공작가에서 온 것이다. 너한테도 나쁜 조건은 아닐 터.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사르키드 공작가면 아주 감사해야지.”
사르키드 공작가?
그렇다는 것은···.
‘엘리스 사르키드.’
검성의 손녀겠지.
옛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히 사르키드 공작이 나와 엘리스를 결혼시키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었다.
“저는 분명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약혼하기 싫다는 거냐?”
“예!”
“그럼, 됐다.”
어라?
생각보다 단념이 빨랐다.
“애당초 너에게 강제로 혼인을 강요할 생각 따윈 추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네?”
“네가 거절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었다면 나 역시 승낙할 생각이었지.”
“아··· 네.”
뭐,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닌지 아버지는 은근한 눈초리로 내게 물어왔다.
“그런데··· 검성님의 외손녀라··· 네가 사르키드 공작가의 데릴사위가 되는 건데···.”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
가주승계식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만이 도착하면 가주승계식이 바로 진행될 수 있게 준비가 마쳐진 상태였다.
가주승계식에서 나는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프리드!”
“오, 이게 누구야. 아카데미 자퇴생이잖아.”
자퇴생이라니. 오랜만에 보는 친우한테.
프리드는 오랜만에 보는 내게 여전히 친근하게 다가와주었다.
“그나저나 뭐하고 살았던 거야?”
블랙 용병도 되어보고, 콜로세움에서 챔피언이랑 싸워서 이기고, 벨레스라는 악당과 마주하고, 힘의 부족을 깨닫고, 반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성역에 있었어.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저냥.”
“너랑 에아 키르턴이 자퇴한 덕분에 나는 차석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오.
프리드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차석으로 졸업이라니.
변경 귀족의 자제인 프리드에겐 엄청난 업적이었다.
“게다가 모레드트는 수석이야.”
“뭐?”
잠깐의 시간 동안 나는 당황했다.
내가 잘못들은 것인가 했다.
모레드트 파우스트.
분명 나와 같은 1학년이 아니었던가.
“아, 맞다. 이걸 깜빡했네. 아카데미엔 월반이 존재해서 모레드트 두 학년이나 월반했지.”
“오··· 잠깐 그렇다는 것은!”
“히히, 나도 한 학년 월반했지.”
내 아카데미의 친구는 참으로 대단한 녀석들이었다.
“프리드, 너나 모레드트나 대단하네.”
“아무리 그래도 모레드트랑 나랑은 비교가 안 돼.”
“응···? 왜?”
“아, 아직 소식을 못 들었나보네. 그 자식 후계자 경합에서 형들을 제치고 후계자 자리를 차지했어.”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나야, 회귀 전엔 운이 좋아서 후계자 경합에서 승리했다.
본래였으면 나이가 어린 막내가 후계자 경합에서 승리하는 경우는 없었다.
보통은 장자가 승리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모레드트는 그런 불리한 조건 속에서 후계자 자리를 쟁취해냈다.
“모레드트··· 대단한걸. 그렇다는 것은 아마 조만간 볼 수도 있겠구나.”
나는 프리드와 쌓인 이야기를 나눈 뒤에 가주승계식에 집중했다.
‘오, 멋지네.’
가주승계식을 위해 차려입은 데이브 형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제 데이브 형이 결혼만 하면 칼데르트가의 후계는 문제없겠네.’
그렇게 모두의 축하 속에서 데이브 형은 칼데르트가의 가주가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별장의 구해 어머니와 함께 집을 비웠다.
나는 가주직을 물려받은 데이브 형을 찾아갔다.
“칼데르트 가주님!”
“갑자기 왜 그렇게 딱딱하게 구는 거야. 그냥 평상시처럼 대해.”
“아니요, 제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데이브 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가주 명령이다! 평상시처럼 대하도록!”
“정 그러시다면야··· 데이브 형!”
나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조만간 전염병이 퍼질 거야.”
이맘쯤부터 서서히 전염병이 퍼질 예정이었다.
그것은 노블리스라는 조직의 계략이었지만, 난 노블리스 조직을 소탕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것은 전염병은 어쨌든 퍼질 일이다.
그리고 전염병의 약은 이미 내가 구해놓았다.
“뭐? 전염병?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여행 다니면서 들은 게 있어. 그리고 들푸라기초를 최대한 구해. 그게 전염병의 약이니까.”
행여나 못 구하더라도 상관없다.
그야, 조르던 자유도시에 있는 내 밭에 꽤나 많은 양의 들푸라기초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아두었다.
“어··· 일단 알았어.”
“그리고 데이브 형은 곧 왕국의 수도로 가야하잖아.”
고개를 끄덕이는 데이브 형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칼데르트가의 가주는 이제 데이브 형이었다.
하지만 백작이라는 작위까지 이어받은 게 아니었다.
이제 로토 왕국의 수도, 정확히는 왕실을 찾아가서 작위마저 승계받아야 끝이 난다.
그리고 난 그 여행길에 따라갈 생각이었다.
“그렇지.”
“그때 나도 동행할게.”
“그래, 뭐 상관없지.”
나는 왕실에게 알려야만 했다.
벨레스라는 큰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게다가 최근에 이상한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더 빠르게 준비해야만 했다.
“그럼, 나중에 봐!”
나는 데이브 형에게 작별을 고하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던 중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아! 맞다!”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에이션트 스네이크로 만든 뱀술.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술.
게다가 몇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제대로 숙성되었을 보물 같은 내 술.
“하마터면 깜빡할 뻔 봤네.”
나는 급히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조르던 자유도시에서 내 집을 관리하고 있을 전직 양아치들에게 내 소중한 뱀술을 보내달라고 전하기 위해서였다.
***
비싼 돈을 들여 최대한 빠르게 편지를 전달했다.
그리고 진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 소중한 술이 도착했다.
그것도 마침 왕실로 떠나기 전날에 말이었다.
사실 이미 떠나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데이브 형에게 애걸복걸해서 최대한 늦게 출발한 덕에 받을 수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아까운 술을 좀 희생했지.’
원래 가족에게 뱀술을 나눠줄 생각이었지만 데이브 형에겐 좀 더 챙겨준다는 명목하에 가능했다.
내 소중한 뱀술을 가족 모두와 검성에게 나눠주니 절반가량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좀 아까울지도···.”
사실 편지에다가 내 밭과 술을 열심히 관리해준 넘버완 일행에게 약간의 술을 선물로 가지로고 적어두었다.
“아니지, 고생한 만큼 보답은 받아야지.”
그들이 관리한 밭은 제법 훌륭했다.
그것은 수확량으로 알 수 있었다.
많은 양의 회복초와 들푸라기초가 있다는 소식이었다.
‘절반의 들푸라기초는 미케네르 제국으로 보냈지.’
전염병의 시작이 미케네르 제국이니 말이다.
“그나저나···.”
내가 급히 왕실로 가려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회귀 전에는 없었던 일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테아르덴 제국.
그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분명 이런 일은 없었다.”
회귀 전 내 삶에서 나테아르덴 제국에서 반란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미래를 많이 바꿔버린 탓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반란은 너무 갔다.
가능성이 있다면 하나였다.
“나테아르덴 제국의 반란 뒤에는 벨레스가 있다.”
모략의 악마가 아닌가.
모략의 악마답게 뒤에서 반란을 일으켜버린 것이겠지.
그리고 회귀 전과 다르게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간단했다.
“나와 만났으니까.”
원래부터 있었던 계획 중에 하나였겠지.
재밌는 일이다.
그 반란 뒤에 숨은 커다란 악마를 난 처단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했다.
물론 칼데르트가의 군대를 데이브 형에게 부탁해 빌려도 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로토 왕국의 왕에게 부탁해 군대를 얻어야한다.
그리고 당장 나테아르덴 제국에서의 반란을 막아야한다.
“쉽지 않겠네.”
말이야 쉽지만, 내 행동은 커다란 두 제국 중 한 곳에게 싸움을 거는 행위와 마찬가지였다.
이것을 허락받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일단은 시도해볼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아예 방법이 없는 게 아니었다.
“왕가의 시련이 있으니까.”
왕가의 시련을 극복한다면 왕에게 충언을 할 기회를 얻는다.
물론 이 충언을 왕이 무조건적으로 들어주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들어줄 확률을 높여준다.
그 이유는.
“왕가의 시련을 극복해낼 만큼의 강자라는 소리니까.”
그런 인재를 함부로 내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시련에 강했다.
성역에서 네 가지의 시련을 극복해냈다.
심지어 블랙드래곤을 쓰러뜨렸다.
그렇다는 것은 웬만한 시련은 극복해낼 수 있단 소리였다.
“뭐, 신이 내리는 시련보다 인간이 내리는 시련이 더 쉬울테지.”
나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채 로토 왕국의 수도로 가는 여행의 준비를 마쳤다.
***
데이브 형이 왕국의 수도로 가는 여행길엔 익숙한 얼굴을 두 명을 확인했다.
“어? 데일이랑 제이콥?”
데이브 형의 호위를 맡은 것은 철검기사단이었다.
그런데 철검기사단의 단장이 안 보였다.
“오르트 단장님은 어디간 거야?”
데일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오르트 단장은 아버지의 은퇴와 동시에 같이 은퇴를 하였다고 했다.
데이브 형이 남아달라고 부탁했지만, 오르트 단장은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 철검기사단의 단장은 데일이 맡게 되었다고 하였다.
“오··· 출세했네. 데일.”
“아닙니다. 솔직히 가장 출세한 건 이 녀석이죠.”
데일이 자신의 옆에 있던 제이콥을 앞세웠다.
제이콥.
회귀 전의 내 가신이었다.
회귀 전엔 머리로 나를 지탱했지만, 이제는 무력으로 칼데르트가를 지탱하고 있었다.
“무려 이 녀석이 철검기사단의 부단장입니다!”
오, 제법 출세했다.
사냥꾼 부모 밑에서 자란 평민이 어쩌다 기사단장의 눈에 들고, 출세했다.
“축하해, 제이콥!”
“아닙니다! 이게 모두 수하르 님 덕분입니다.”
“내가 무슨···.”
“아닙니다! 수하르 님이 저희 마을을 구원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제게 이런 기회는 없었을 겁니다!”
예전과 다르게 약간 영악해 보이던 모습은 전혀 없고, 정직해보이는 모습뿐이었다.
‘아마, 그 영악함은 가신들 간의 정치에서 살아남기 위해 절로 익힌 것이겠지.’
이게 제이콥 본연의 모습일테지.
“그래? 그럼 그런 기회를 준 나를 위해 형님을 정성껏 보필하라고.”
“네, 알겠습니다!”
사소한 이야기를 끝내고, 마차가 출발했다.
그리고 며칠간의 시간이 흐르고 마차는 무사히 왕국의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왕국의 수도에 도착한 우리는 곧바로 왕실로 향했다.
사전에 이야기가 된 덕에 입성은 수월했다.
“데이브 칼데르트에게 백작의 작위를 수여하겠다.”
데이브 형의 작위승계식은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승계식이 끝이나고, 나는 망설임 없이 왕에게 건의했다.
“친애하는 국왕이시여, 칼데르트 가문의 삼남, 수하르 칼데르트가 말씀드릴 소식이 있사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귀족들이 당황했다.
데이브 형마저도 당황했다.
사전에 데이브 형에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토 왕국의 왕은 표정을 살짝 찌푸렸다.
“그래, 칼데르트 가문의 삼남, 수하르 칼데르트여, 내게 무엇을 전할 생각인가.”
다행히도 허락이 떨어졌다.
‘이제는 모두가 알아야한다.’
벨레스라는 악이 어떤 존재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