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나는 로토 왕국의 왕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였다.
왕이 나를 보며 말했다.
“다만 쓸데없는 소리를 할 경우엔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야.”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나는 한 차례 심호흡 후에 입을 열었다.
“대륙을 멸망으로 이끌 악마, 벨레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왕이 한순간 당황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악마는 뭐고, 벨레스는 또 무엇인가···?”
“악마는 말 그대로 마족을 뜻하고, 벨레스는 그 악마의 이름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략의 악마 벨페레스라고 합니다.”
순간 왕의 표정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방향으로 바뀐 게 아니었다.
“짐을 우롱하는 겐가?”
“절대로 아닙니다.”
“악마가 대륙을 멸망으로 이끌어?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진실을 말해줘도 믿질 않는다.
하긴 악마가 대륙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악마를 상대한 자가 나라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실질적으로 악마를 상대해본 적이 없을 로토 왕국에선 믿지 않는 게 정상이긴 하였다.
“정말입니다!”
진심으로 호소했다.
그러자 왕의 옆으로 한 사람이 다가갔다.
‘분명··· 저 사람은?’
로토 왕국의 2왕녀였다.
“폐하, 저분의 말은 사실에 가깝습니다.”
내 편을 들어주니 고마울 따름이었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나를 도와주는 것이지?’
왕은 2왕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의 귀여운 아이, 레티아여. 그게 무슨 소리인가?”
레티아 2왕녀가 나를 쳐다보며 한쪽 눈을 감았다 떴다.
‘뭐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사내, 수하르 칼데르트는 전에 마족을 상대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옛기억이 절로 떠올랐다.
아마 밀리아 누님의 일을 말하는 것일테지.
하긴 사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더욱 믿음이 가긴 할 터였다.
왕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인가!”
“네··· 맞습니다.”
하지만 타인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진실이었다.
몇몇의 사람만이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겠지만, 이제는 잊혀진 줄만 알았다.
이건 분명 칼데르트가에 해가 될 소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로 넘어간다면 내게, 가문에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어쩔 수 없나.’
나는 숨겨두었던 내 신분을 꺼내기로 했다.
‘블랙 용병 정도면 충분하겠지.’
블랙 용병은 어딜 가나 대접받을 수 있는 존재였다.
만약 내가 블랙 용병패를 꺼낸다면 내 말의 신뢰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오를 것이다.
“잠시 실례를 하겠습니다.”
나는 품 안에 간직해두었던 블랙용병패를 꺼내려했다.
왕을 호위하던 기사들이 내가 품에 손을 넣자 경계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 열심히 하네. 호위기사들.’
나는 개의치 않고 품안에 패를 꺼냈다.
그러곤 왕을 향해 보여주었다.
내 패가 보이지 않는 각도에 있는 귀족들은 영문 몰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을 비롯한 레티아 2왕녀, 호위기사들, 마지막으로 내 패가 보이는 각도의 귀족들은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그··· 그 패가 진짜인가!”
“예, 그렇습니다. 어찌 폐하의 앞에서 거짓을 고할 수 있겠습니까.”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허허, 우리 왕국에도 블랙 용병이 있을 줄이야! 잠깐, 그런데 자네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본의 아니게 가명을 썼습니다. 블랙 용병으로 활동할 당시의 이름은 한스 라이크라고 합니다.”
내 가명을 말했지만 왕은 들어본 적이 없다는 듯한 눈치였다.
“흐음··· 이상하군. 왜 가명을 쓴 거지?”
내게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를 보내는 왕 때문에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
블랙 용병패는 위조할 수 없기에 패만 보여줘도 믿어주는 게 보통이었다.
“그게···.”
가출해서 이름을 들키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중 주변에서 한 중얼거림이 울려퍼졌다.
“조르던 자유도시의 영웅···.”
뭐?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조르던 자유도시의 영웅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왕도 이 중얼거림을 들은 것인지 이야기한 귀족을 지목했다.
“오호, 자네가 한스 라이크에 대해 알고 있나보구나.”
“예, 폐하. 저는 칼레스 라고스 자작입니다. 라고스령은 로토 왕국 변경에 위치해있습니다.”
“크흠, 알고 있다. 라고스 자작!”
저 반응을 보아 왕은 확실하게 모르고 있었다.
“변경에 위치한 탓에 타국의 소문을 쉽게 접합니다.”
“그래.”
“제가 예전에 새로운 블랙 용병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한스 라이크를 말하는 것이겠군.”
“예, 맞습니다.”
뭐, 여기까진 나도 이해한다.
블랙 용병이 나타난 것은 아주 신기한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또 나중에 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무엇을 들었지?”
“한스 라이크라는 블랙 용병이 한 악마를 쓰러트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악마를 쓰러트렸다는 이야기라면···.
설마?
부활의 악마인 리바이브를 말하는 것인가.
확실히 나는 루기 마을에서 처음으로 악마를 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 비밀로 치부되었을 이야기였다.
“그것은 제 기억으로 분명 루기 마을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역시!
그런데 분명 이 이야기는 혼돈을 야기할 수 있다고 비밀로···.
‘아, 보고 올린다고 했었지.’
생각해보니 알만한 내용이었다.
어차피 가짜 신분이라 큰 걱정을 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위기에 처한 루기 마을을 악마의 손아귀에서 구한 자로 조르던 자유도시에선 영웅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낯부끄러운 이야기였다.
왕은 흥미롭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오호··· 자네, 대단한 사람이었군. 그렇다면 자네의 이야기도 신빙성이 있겠군.”
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이야기가 막혀버리고 말았다.
어느 한 귀족 때문이었다.
“폐하, 제가 용병에 대해선 잘 알고 있습니다. 한스 라이크라는 자는 검은 머리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금발머리입니다!”
스트레스 받을 지경이었다.
가명을 썼으면 당연 외형도 바꿨을 가능성이 있지 않는가.
하지만 왕은 꽤나 심한 팔랑귀인지 또다시 나를 의심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아오, 미치겠네. 그러고 보니···’
귀족파의 귀족들이 내게 다가왔을 때 왕의 답답한 모습 때문에 받아들일 뻔했던 기억이 떠올렸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왕실파를 지켰었지.
“···자네 정말 블랙 용병이 맞는가?”
슬슬 짜증이 몰려왔다.
솔직히 보통의 경우였으면 이미 끝난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만큼 블랙 용병패의 권위가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토 왕국에선 달랐다.
용병패의 위력이 약한 나라 중 한 곳이 바로 로토 왕국이었다.
“···제가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좀 믿어라.
“흐음···.”
다행히 옆에 있던 레티아 2왕녀가 내 편을 다시 들어주기 시작했다.
“제가 듣기로는 블랙용병패는 위조가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
왕이 외야에 있는 귀족들에게 물었다.
“2왕녀의 말이 사실인가?”
보아하니 몇몇 귀족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나 묵인한 듯 보였다.
당황하며 말을 얼버무리는 귀족도 있었고, 사실대로 고하는 이들도 있었다.
왜 알고 있단 사실을 숨겼는지는 나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왕 앞에서 말을 꺼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긴 하지.’
특히 이 왕은 솔직히 말해 무식한 쪽에 가깝기에 설득하기 쉬우면서도 어려운 존재니 말이었다.
“음··· 알겠다. 자네가 블랙 용병이라는 것을 믿어주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진심으로 기뻤다.
잠깐, 내가 블랙 용병이란 사실을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게 아니오라···.”
“아, 그렇군. 그래, 벨레스라고 하였지.”
“네, 그자를 막아야 합니다. 곧 전란의 상황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게 군사를 내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아마 전란의 중심은 분명 나테아르덴 제국이겠지.
순간 알현실이 조용해졌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는 왕이었다.
‘그래, 저 모습 때문에 나는 왕실파를 고집했었지.’
평상시의 모습은 못미덥지만 나라의 명운이 걸렸을 때엔 표정부터 바뀌는 왕이었다.
“지금 자네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
“예. 제가 알고 있는 정보로는 나테아르덴에서의 반란의 뒤편엔 분명 벨레스가 존재합니다.”
“확실하게 벨레스란 악마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나?”
“그건···.”
“그렇게 불확실한 이야기로 군사를 내어달라는 소리인가.”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믿어줬으면 했다.
“확실히 불확실한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굳이 자네가 아니라더라도 충분히 벨레스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은 못하는 건가!”
“벨레스는 소드마스터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흥, 웃기는 소리.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지.”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벨레스는 소드마스터론 막을 수 없는 반신의 경지에 오른 괴물이다.
“그래,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왜 자네가 가야하지? 상대는 소드마스터 그 이상의 존재인데.”
“그건!”
“왜? 자네가 상대할 수 있다는 소리인가! 아니, 자네만이 상대할 수 있단 소리인가!”
“그렇습니다!”
왕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재밌군, 그렇다면 자네가 소드마스터 이상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소리인가!”
확실히 내가 보여준 것이 없었다.
블랙 용병이라고 하더라도 소드마스터가 아닐 경우가 허다했다.
블랙 용병은 강자의 증표가 아닌 선한 자의 증표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나를 얕잡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를 내려깎는 듯한 말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기에 내 말투에 약간의 화가 섞여버렸다.
“그렇습니다.”
미친 듯이 웃던 왕이 갑자기 정색을 하였다.
“그 말··· 책임질 수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지. 그렇다면 자네의 말을 믿어주겠네.”
“제안이 뭡니까?”
왕이 내게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네가 소드마스터 이상의 존재라면 소드마스터를 쉽게 상대할 터.”
“그렇습니다.”
“그럼, 어디 한번 우리 왕국의 자랑, 검성을 이겨보거라.”
어라?
검성?
“혹시 검성님이라면···.”
“케론 사르키드. 로토 왕국의 자랑인 검성을 한번 이겨보거라. 지금 당장 호출할 터이니.”
음···.
이건 다른 의미로 곤란했다.
아무리 그래도 스승님을 내 손으로 쓰러트릴···.
‘잠깐, 드디어 때가 온 것인가!’
예전부터 간직해왔던 꿈을 이룰 차례가 온 것인가!
“왜, 갑자기 겁이라도 나는 게냐?”
“아닙니다. 단지 제자 된 입장으로 스승님을 쓰러트리는 게 고민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 이해한다. 제자 된 입장으로 스승을··· 방금 뭐라고 하였느냐?”
검성, 케론 사르키드는 내 스승이라고 했는데요.
“제자 된 입장으로 스승님을 쓰러트리는 게 고민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허어···.”
왕이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또 무슨···.”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케론 사르키드 님은 제 스승님이십니다.”
내 말을 이어 레티아 2왕녀도 말했다.
“그러고 보니 검성님께서 아카데미에서 수제자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한동안 나돌긴 했습니다.”
왕은 침묵했다.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검성의 제자란 것은 믿어주마. 하지만 아직 자네가 소드마스터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검성의 제자라고 그 누가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래도 이 말은 믿어주는 모양이었다.
“그거 참 아쉽군요.”
“그렇기에 조만간 대련을 열겠다. 어디 한번 네 스승을 쓰러트려보거라. 그렇다면 믿어주마.”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게 있다.
“어떤 걸 믿어주신다는 겁니까?”
자칫 예의 없어 보이는 말이지만, 어쨌든 확답을 들어야만 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도록 말이다.
“자네가 소드마스터 이상의 존재란 것, 검성의 제자라는 것은··· 검성이 부르면 알 수 있을 터이고···.”
왕은 잠시 말을 쉬었다.
“마지막으로 벨레스란 악마가 대륙을 멸망에 빠뜨리려고 한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