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왠지 모르게 나는 왕실의 별실에서 지내게 되었다.
분명 밖에서 지낼 생각이었는데 왕이 시련을 위한 여행 전까지 왕실에서 지내라고 명했다.
‘왕의 명령을 내가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어.’
괜히 거절했다가 칼데르트가에 손해가 나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런 짓을 한다면 내가 용서치 않을 생각이지만.
‘솔직히 나 혼자면 한 왕국을··· 아니, 제국까지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지.’
하지만 내겐 대륙통일이란 꿈이 없으니 굳이 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역시나라고 해야할지 나를 왕실에 지내게 하려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계속해서 레티아 2왕녀가 나를 다과회에 초대를 했다.
몇 번이고, 거절하는 중이지만 꽤나 끈질겼다.
다과회의 시간이 되자 평소처럼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되겠나요?”
이번에도 또 찾아왔다.
나는 문을 열며 말했다.
“말씀드렸죠! 제가 안···.”
나는 급히 하려던 말을 중단했다.
매번 오던 시녀가 아니라 레티아 왕녀 본인이 와버린 탓이었다.
“어··· 안녕하십니까, 레티아 왕녀···.”
“반갑네요. 알현실 이후로는 처음이죠.”
“네···.”
보랏빛이 감도는 머리칼에 똘망똘망한 눈.
그 눈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부담스럽네.’
나는 레티아 왕녀와 거리를 둔 뒤에 말을 이었다.
“이곳은 무슨 용무로 찾아오셨습니까.”
어찌 보면 차가운 말투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레티아 왕녀는 분명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 감정은 지금의 내겐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무슨 용무라··· 잘 알고 계실텐데요?”
“다과회···.”
“네, 어떻게 단 한 번도 안 오실 수가 있나요. 곧 같이 여행도 떠날 사이인데!”
“크흠··· 여행이 아닙니다. 제겐 왕실이 내려준 시련이죠.”
레티아 왕녀는 두 눈으로 나를 강렬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후··· 하여튼 여행··· 아니, 시련을 떠나는데 앞서 작은 이야기 정도는 나눌 수 있잖아요.”
“그건··· 그렇죠.”
갑자기 레티아 왕녀가 박수를 쳤다.
갑작스러운 레티아 왕녀의 행동엔 나는 당황했다.
그 후에 갑자기 여러 시종들이 내 방에 들어오더니 간이 다과회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이게 무슨···.”
“제대로 치우고 갈테니, 이야기를 나눠요.”
“······.”
레티아 왕녀가 의자에 앉았으며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나 역시 한숨을 내쉬며 레티아 왕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신 겁니까?”
“으음··· 글쎄요?”
“네?”
“보통 이야기라는 것은 밖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거잖아요.”
아, 들어보니 레티아 왕녀는 왕실 밖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하였지.
기억하기론 레티아 왕녀는 분명 스무 살이었을 터였다.
스무 살 동안 밖을 경험한 적이 없다니 조금 불쌍하게 느껴졌다.
“음···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블랙 용병이셨잖아요. 용병 일에 관한 이야기나 그 벨레스라는 악마에 대한 이야기도 좋고요.”
“그럼, 제가 첫 용병 일을 했을 적의 이야기해드리도록 하죠.”
나는 레티아 왕녀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처음으로 용병일 시작하게 된 것과, 블랙 용병이 되었을 때의 일.
마지막으로 벨레스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야기 도중에 레티아 왕녀가 내 말을 끊었다.
“잠시만요. 이야기에 나오는 에아 키르턴이라는 사람···.”
솔직하게 에피니아 미케네르고, 미케네르 제국의 1황녀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아카데미 시절의 가명을 쓰게 되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여자죠!”
“······?”
어떻게 알았지?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하셨습니까?”
“그 사람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당신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었으니까요.”
나는 잠시 말에 뜸을 들였다.
“네, 맞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여자입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이렇게 말하는 걸로도 레티아 왕녀의 호감을 떨어뜨릴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말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뭐, 그래도 상관없어요.”
“그게 무슨···?”
“본래 영웅은 자국의 공주와 결혼하는 이야기가 많으니까요.”
지금 이 왕녀는 도대체 뭐라고 말하는 걸까.
레티아 왕녀가 한 말은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당신의 이야기는 마치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영웅담처럼 제게 다가왔어요.”
“저기··· 왕녀님께서는 방금 제 말을 들으신 게 맞나요?”
“네, 들었어요. 에아 키르턴이란 사람을 좋아하신다고 그랬죠.”
“네, 분명 제가 그렇게 말했었죠.”
“그런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가요?”
말이 안 통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실례되는 말이지만 하나 하겠습니다. 저는 첩을 둘 생각은 없습니다.”
내 말에 왕녀의 얼굴을 붉어졌다.
“무슨 소리예요! 저도 첩은 싫어요.”
“그런데···.”
“원래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진정한 사랑이 누구였는지 깨닫는 법이예요.”
“그러니 왕녀님의 말씀은 왕녀님이 제 진정한 사랑일 거라는 말씀이신 건가요.”
“네!”
아주 당찬 왕녀였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점점 수렁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단호하며 아주 강경하게 말했다.
“하나 확답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다른 여자를 택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자 약간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 왕녀였다.
표정에 숨김이 없는 게 왕실 밖을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인 듯했다.
‘바깥 경험이 많았으면 알현실에서 그런 끈질긴 시선을 곧이곧대로 내게 보내지 않았겠지.’
본래 바깥 경험이 많을수록 감추는 게 많아지는 법이었다.
표정부터 말투까지 말이다.
“그럼, 이렇게 해요.”
“뭘 어떻게 하시기를 바라십니까?”
“이번 여행··· 맞다, 시련이였죠. 시련을 하는 중에 제가 어떻게든 당신의 마음을 움직여볼게요.”
“······.”
“만약 마음이 흔들리면 저를 선택해주세요.”
머리가 아파 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제안을 내가 거절하기엔 왕녀는 포기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오히려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어찌 됐건 내가 흔들리지 않으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럼, 전 가볼게요. 조금이라도 계획을 세워야하거든요.”
“네··· 그러세요.”
왕녀가 다시 박수를 쳤다.
그와 동시에 시종들이 문을 열고, 간이 다과회를 치워주었다.
그러는 한편 나는 하나를 떠올렸다.
‘그런데 시종들이 방금 이야기를 다 들은 거 아니야?’
박수 소리에 곧바로 나타날 정도면 말이다.
***
왕실의 시련이 시작되었다.
마차를 타고 로토 왕국 변방으로 향했다.
드래곤 레어로 추정되는 장소는 메아로이트령에 있었다.
‘넓은 땅에 비해 마을이 적은 곳이었지.’
산악지대가 대부분이라 마을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마을 간의 거리가 멀어 소통이 거의 안 되다시피 되는 곳이었다.
‘하긴 이런 곳이니 드래곤 레어가 있을 법하지.’
나는 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메아로이트령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드래곤의 이빨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다량으로 말이다.
그렇기에 그 인근에 드래곤 레어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뭐, 사실이긴 하지. 그 근처에 드래곤 레어가 있는 건.’
다만 쓸모없는 물건만 있는 게 문제였다.
생각을 정리 중인 내게 레티아 왕녀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시련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으음··· 그렇구나. 그럼, 드래곤 레어는 어디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답이 이미 알고 있다.
“인근 산에 있겠죠.”
“네? 드래곤이 발견된 곳은 마을인데요?”
“드래곤의 이빨이 발견된 것이죠.”
드래곤의 습성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존재가 아닌가.
이제 와서는 볼 수 없는 생명체다.
하지만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내겐 아주 쉬운 답이었다.
“왕녀님, 누가 자신의 빠진 이빨을 집에다가 두겠어요.”
“네? 저희는 보관하잖아요?”
“그건 병에 담아서 보관하죠. 제가 왕녀님께 문제를 하나 내드리겠습니다.”
문제라는 소리에 레티아 왕녀가 바른 자세를 취했다.
“네!”
“드래곤은 양치를 할까요, 안 할까요?”
난이도 최하는커녕 머리가 있다는 누구나 맞출 수 있는 문제다.
“에이, 무슨 몬스터가 양치를 해요. 안 하겠죠.”
“네, 정답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문제예요?”
이렇게까지 힌트를 줬는데도 모르다니 답답한 왕에 이은 답답한 왕녀였다.
“사람이 양치를 안 하면 어떤가요?”
“치아가 썩죠.”
“그리고요?”
“어··· 입냄새가 나죠!”
입냄새.
이게 가장 큰 키워드였다.
“양치를 안 하는 드래곤은 입냄새가 나겠죠.”
“그렇죠.”
“그럼, 드래곤의 이빨은 냄새가 날까요? 안 날까요?”
드디어 왕녀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 드래곤의 이빨은 냄새나겠네요. 그래서 이빨은 집에 안 두겠고요.”
“그런 겁니다.”
이 사실은 내가 알아낸 사실이 아니었다.
어느 학자가 추정한 사실이었다.
물론 이게 사실이 아니고, 우연히도 그곳에 레어가 없던 것뿐일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드래곤 레어가 발견된 것보다 이런 추리를 해낸 사람이 더 흥미가 갔다.
“그나저나 곧 도착하겠네요.”
“네? 벌써요? 혹시 마음 흔들리셨나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연애의 마음보다 왠지 여동생처럼 느껴졌다.
물론 난 막내기에 여동생은 없었지만 말이다.
***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분명 산적굴이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산적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굴에서 깊게 파보니 발견되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는 것은 최대한 산적을 찾으면 되는 일이었다.
‘아마 대대적으로 찾기 전이니까, 아직 산적이 남아있을 수 있겠어.’
그렇다면 인근 산적을 닥치는 대로 습격하면 되는 일이다.
아니, 습격받으면 되는 일인가.
“저기, 왕녀님···.”
“왜요?”
“조금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이제부터 산적한테 습격당할 생각이거든요.”
내 말에 갑자기 눈을 빛내기 시작하는 레티아 왕녀였다.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뭔가 되게 흥미롭다는 표정이시네요?”
“그야, 이야기 속에 자주 나오는 장면이잖아요. 적한테 습격당하는 공주를 영웅이 와서 도와준다.”
어···?
뭔가 좀 다른데.
“그런 건 보통 영웅과 공주의 첫만남에서나 벌어지는 일들 아닌가요?”
“에이, 뭐 그런 게 중요하겠어요.”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참으로 뭔가 이야기에 심취한 왕녀였다.
“일단 알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일게요.”
“네!”
내가 마부에게 산길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아마 곧바로 산적에게 습격당하지는 않겠지만 운이 좋으면 금방이었다.
이윽고 운이 좋았다라는 게 밝혀졌다.
시간이 별로 지났는지도 않았는데 우리 마차의 앞길을 막는 존재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존재들의 정체 산적.
“가진 거 다 내놓고 꺼지던가! 통행세를 지불하던가 해라!”
나는 마차에서 내리며 산적들을 확인했다.
느껴지는 기척으로는 딱히 숨어서 매복하는 이들은 없었다.
“음···.”
나는 이들을 한 번에 제압할 필요를 느꼈다.
‘살기로만 제압할 수 있을까?’
아직 해본 적은 없지만 왠지 가능할거 같단 기분이 들었다.
나는 산적들을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
그와 동시에 산적들이 정신을 잃으며 쓰러졌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한 명씩 구속했다.
‘정신 차리면 본거지를 캐내야겠네.’
이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보여줬으니 산적들에게 쉽게 자백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다행히도 산적들은 자신들의 본거지를 쉽게 자백해주었다.
그곳에 가서 남은 산적들을 제압하고, 땅을 파보았다.
‘여기가 확실하네.’
어느 정도 깊게 들어가니 이상한 물건 같은 게 튀어나왔다.
나는 산적들을 불러 모았다.
“자, 용무는 끝났으니까, 이제 해산하고 본거지를 떠나고 다른 곳에 정착하든가 해라.”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염동력을 이용해 이들을 풀어주었다.
풀어줌과 동시에 산적들은 재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고, 옆에 있던 레티아 왕녀는 두 눈을 반짝였다.
“우와, 소드마스터 이상이 되면 손만 까닥여도 막 적을 쓰러트리고 그러네요?”
옆에서 귀찮게 하는 레티아 왕녀를 무시한 채 나는 아무런 일없이 시련을 끝냈다는 것에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