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산적들이 모두 도망친 후에 레티아 왕녀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산적들은 왜 놓아준 거예요? 역시 영웅은 쉽게 사람을 용서해주고 그런 건가요?”
나는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만약 제가 만약 산적들을 사로잡았다고 합시다.”
“네!”
“그럼, 그 산적들은 어디로 갈까요?”
“음··· 감옥에 가겠죠.”
“네, 맞습니다. 산적들은 감옥에 가겠죠.”
나는 주변 풍경을 가리켰다.
산밖에 보이지 않는다.
산 아래엔 분명 마을이 있음에도 한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곳에 저 많은 산적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그건···.”
“그렇다고 이곳에서 곧바로 전부 죽여버리기엔 저들의 죄질이 나쁜가요?”
이곳의 산적은 사냥꾼에 가까웠다.
약탈보단 사냥이 이들의 주된 일이였다.
게다가 이들은 생각보다 나쁜 이들이 아니었다.
“이들이 처음에 뭐라고 했었죠?”
“어··· 그러니까···.”
가진 거 다 내놓거나 통행세를 지불하라고 하였다.
이 산의 주인은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통행세만 지불하면 안전하게 데리다주는 집단입니다. 어찌 보면 산에 둥지를 튼 호위집단이죠.”
“그래요?”
“물론 그 호위를 거절했을 경우엔 곤란하지만, 통행세도 합리적으로 조절했고, 나쁜 짓은 하지 않았죠. 오히려 이곳의 주민들에겐 큰 도움이 되었을 거예요.”
그러자 레티아 왕녀가 내게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왜 이곳에서 쫓아낸 거예요? 들은 대로라면 나쁜 쪽으로 우리 같은데···.”
“그건···.”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아무리 저들이 착한 이들이라고 해도 산적이다.
순순한 말로 들을 이들이 아니다.
게다가 이곳은 드래곤의 레어가 아닌가.
“으음··· 여기가 드래곤의 레어로 추정되는 위치니까요?”
“네에···? 여기가 드래곤의 레어라고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요···.”
얼핏 듣기로 드래곤 레어 때문에 그 산의 주민만 번거롭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산에 마을을 튼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산적이겠지.
“우와··· 잠깐, 그렇다면 벌써 시련이 끝난 건가요?”
“그렇죠···?”
“어떡하지··· 혹시 흔들렸나요?”
“전혀요.”
시련동안 내 마음은 레티아 왕녀에게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물론 레티아 왕녀가 싫은 것은 아니다.
그저 이성보다는 내게 여동생이 있다면 이랬지 않았을까 하는 감정이었다.
“으··· 시간이 별로 없네요.”
“돌아갈 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제 포기하는 건 어떨까요?”
레티아 왕녀는 두 눈으로 나를 강렬하게 쏘아보며 말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화가 난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
좋지 않은 일이 생겨버렸다.
레티아 왕녀가 지닌 통신구를 통해 왕에게 드래곤 레어의 위치를 찾아냈다고 전했다.
이제 복귀만 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통신구에서 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소문이라도 들은 건지 드래곤 레어를 노리는 자들이 나타났다고 하네.
“예···?”
-그러니까, 왕실군이 도착할 때까지 잘 좀 부탁하네.
“네··· 알겠습니다.”
시련의 연장선이 생겨버렸다.
복귀할 생각이었지만, 왕실에서 보낸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지켜달라는 말이었다.
“에효···.”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레티아 왕녀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제가 말했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요!”
“그렇네요···.”
지금 상황이 모두 레티아 왕녀의 계략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레티아 왕녀가 얻는 게 없었다.
하나 있다면 나와의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
그거 하나뿐이었다.
“에효··· 그럼, 잠자리를 정비해야겠네.”
“네에···? 잠자리요?”
갑자기 얼굴을 붉히는 레티아 왕녀.
도대체 어떤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이곳을 지켜야하는데 아래에 있는 마을 여관에서 왕복할 수는 없죠.”
“그치만··· 너무 이르다고 생각됩니다!”
“뭔 소리예요. 어차피 이곳에서 산적이 지냈던 만큼 잠잘 곳은 넉넉합니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면 전 잠을 따로 안 자도 됩니다.”
한 일주일 정도면 왕실군이 도착할 것이다.
자연력을 받아들인 이후로 굳이 잠을 자지 않아도 불편한 점이 없으니 잠 정도는 포기할 수 있었다.
“아··· 저만 혼자 자겠네요.”
실망한 듯 레티아 왕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뭐, 제가 이곳을 호위하는 이상 위험은 없을 겁니다. 게다가 꽤나 깔끔 떠는 산적들이었는지 잠자리는 깔끔하더라고요.”
“네··· 그래도 잠자리가 더러워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전 제 침구를 챙겨왔으니까요.”
여행을 출발하기 전 레티아 왕녀는 공간만 차지하는 침구들을 손수 챙겼다.
이유는 단순했다.
침구가 바뀌면 잠을 못 잘 거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솔직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시련인데 자신의 침구를 챙겨오는 것을 보면 참 낙관적인 사람이었다.
“아, 자고 싶으시면 저한테 꼭 허락 맡으세요.”
“네?”
“전 갑작스러운 건 별로 싫어하거든요.”
하며 얼굴을 붉히며 굴 밖으로 나가버리는 레티아 왕녀였다.
“역시 이상해···.”
그리고 이내 잘못된 점을 깨달아버렸다.
“아니, 레티아 왕녀님 지금 시간에 밖에 나돌아 다니시면 곤란합니다!”
“아, 그렇겠네요. 혹시라도 미아가 되면··· 으···.”
레티아 왕녀는 다시 얌전히 산적굴 안으로 들어와주었다.
“일단 시중 같은 건 평상시처럼 마부에게 맡기시면 될 거예요.”
레티아 왕녀에게 붙여준 시종이 마부였다.
시련을 떠나기 전까지는 왕실에서 2왕녀를 보살피던 시종이었다.
“그럼, 전 굴의 입구에서 지키고 있겠습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주세요.”
“네!”
나는 굴의 입구에서 가부좌 자세를 취했다.
딱히 수면을 취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있을 수는 없었다.
‘너무 지루할테니 말이야.’
지루한 시간을 버틸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어둡지만 밝았다.
수많은 별들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커다란 달 하나가 떠있다.
그 옆에 붉은 달이 하나 떠 있다.
‘별이나 셀까?’
나는 얌전히 밝게 빛나는 점들을 세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서 포기했다.
‘너무 많네···.’
저걸 다 세는 것도 문제고, 일주일 만에 다 셀 수도 없다.
목표가 뚜렷한 무언가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지!’
나는 퇴마검을 뽑았다.
그리고 염동력을 이용해 실을 꺼냈다.
‘실을 엮어서 더 굵은 실을 만들어내는 거야!’
실의 강도도 올리고, 내 지루한 시간마저 보내주는 아주 좋은 일이다.
‘뭐, 속도가 오르면 싸우는 도중에 실을 엮을 수도 있겠고 말이야.’
나는 천천히 실을 엮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렸지만 얼마 가지 않아 빠른 속도로 실을 엮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주변을 살피니 날이 밝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호··· 괜찮네.”
실을 다루는 솜씨가 많이 늘었다.
하지만 곤란한 점이 하나 생겨버렸다.
“이걸로 일주일은 못 가겠네.”
내일까지만 되어도 실을 가지고 노는 것은 마스터할 것만 같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빨리 다른 것을 생각해내야겠어.”
***
드래곤 레어 지키기는 두 번째 날이 밝았다.
잠시 벽에 기대에 눈을 감고 있던 내게 레티아 왕녀가 다가왔다.
“어? 방금 잠자고 있던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냥 눈을 감고 있던 겁니다.”
“으음··· 그래요? 그래도 뭐, 피곤하면 말하세요. 제가 지키고 있을테니까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버렸다.
그러자 약간 화가 난 듯한 레티아 왕녀.
레티아 왕녀가 씩씩거리며 내게 말했다.
“방금 그 웃음의 의미는 뭔가요!”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저 진짜로 꽤 쎕니다.”
알고 있다.
스무 살에 소드익스퍼트 상급.
괜찮은 실력이다.
천재들에 비해서는 한 수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꽤나 뛰어난 재능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순간 내가 퍼트린 기운에 무엇인가 잡혔다.
“왕녀님은 잠시 들어가 계시지요.”
“네? 왜요?”
“적입니다.”
내 말에 레티아 왕녀가 얌전히 굴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꽤나 떨어진 곳에서 기척을 알아차렸기에 여기까지 오는데엔 시간이 걸릴 예정이었다.
‘소드익스퍼트 상급을 필두로··· 중급이 셋에 하급이 다섯?’
아무래도 용병단으로 보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레티아 왕녀가 다시 굴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적이 도대체 어딨다는 거예요?”
“저기 오네요.”
거들먹거리는 아홉 명의 무리가 굴로 다가왔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멈춰주시죠.”
“오호··· 여기가 정답인가 본데?”
“그러게 말입니다, 단장님.”
역시 길을 잃거나 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우선 나는 레티아 왕녀에게 다시 굴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하려고 했다.
“왕녀님···?”
방금까지 머리를 내밀고 있었던 레티아 왕녀가 어느새 굴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꽤나 눈치가 있는 모양이었다.
레티아 왕녀를 굴 안으로 들여보낸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냥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들이 풍기는 기운이랄까, 직감적으로 이들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신의 경지를 이룬 덕에 사람의 선과 악을 쉽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 있던 산적들은 선도 악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나타난 저들은 악이었다.
내 직감이 맞다면 이들은 내 말을 무시할 게 분명했다.
“싫다면?”
역시나.
“무력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겠죠.”
“크하하하, 무력이라고? 재밌네.”
“크흐흐, 단장님 저 녀석 꽤나 용기 있는데요? 죽이지 말까요?”
꽤나 건방을 떠는 이들이었다.
“저는 경고했습니다.”
“뭐, 경고하면 어쩔 건데?”
“······.”
나는 저들이 쓸데없이 움직일 경우 곧바로 검을 쓰기로 결심했다.
“좋아, 당장의 내 계획을 말해주지. 이걸 들은 뒤에도 경고로 끝나는지 보자고.”
“오, 제대로 겁을 주시려는 모양입니다. 역시 우리 단장님!”
저들의 단장이 한 걸음 걸어 들어오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 계획은 말이지···.”
단장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한 걸음 걸어 들어오는 순간 나는 곧바로 검을 움직였다.
그리고 단장의 목을 베었다.
한순간에 머리와 몸이 이별해버렸다.
옆에 있던 부하들은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빨리 너희 단장 시체 가지고 떠나라.”
남은 저들의 성향도 악인이 틀림없다.
하지만 단장만큼은 아니었기에 살려두기로 했다.
말하자면 단장은 악당, 나머지는 소악당이었다.
지닌 실력도 미흡했기에 그냥 놔두었다.
‘그리고 너희가 살아야 소문이 나지.’
혹시라도 드래곤 레어를 노릴 생각이라면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노리라는 내 경고다.
소드익스퍼트 상급이 단칼에 죽었다면, 적어도 상급 이하의 존재는 쉽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남은 녀석들이 벙쪄 있길래 내가 외쳤다.
“뭐해! 썩 꺼지지 않고!”
내 호통소리에 하얗게 질리더니 모두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단장을 버리고 말이다.
“아니, 니들 단장도 들고 가야지!”
그러자 도망치던 이들 중 몇 명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단장의 시체를 가지고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염동력을 이용해 남은 핏자국마저 모두 깔끔히 치웠다.
“왕녀님, 다 끝났습니다.”
그러자 다시 머리만 빼꼼 내민 레티아 왕녀였다.
“역시··· 대단하시네요.”
“저들이 보잘것없는 겁니다.”
“헤에···.”
“그나저나 저들은 시작에 불과할 겁니다.”
잔챙이들은 이 드래곤 레어에 대한 관심을 져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강자들은 이곳에 찾아올 것이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게 하나 있다면···.
‘드래곤 레어에 관심 없는 강자들이 등장할까봐 겁나네.’
그래도 도망친 녀석들이 그렇게까지 소문을 퍼트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들었기에 걱정하지 않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