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왕실에서 보낸 사람이 도착했다.
나와 레티아 왕녀, 그리고 마부는 그들과 교대를 하고 이곳을 떠났다.
떠나기 전 그들에게 한 가지 사실을 당부했다.
“드래곤 레어지만 별 쓸모없는 물건이 많이 나올 거예요.”
보물이 쌓여있다는 드래곤 레어라고 하지만, 진짜로 이곳엔 쓸모없는 물건밖에 없었다.
역사적 가치가 없는 이상한 물건만 모으는 이상한 드래곤이었기 때문이다.
“자, 어서 떠납시다!”
나는 마치에 올라탄 채로 마부를 재촉했다.
그러자 마부가 말을 향해 채찍질을 시작했다.
마차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마차의 틈새로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나는 드래곤 레어와 이별을 고했다.
‘만나서 반가웠고, 더는 안 찾아갈게.’
이 근처 땅은 산악지대가 많아서 경관이 그리 좋은 곳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내가 이곳을 다시 찾을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도 좋아요?”
내 기분을 레티아 왕녀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내 입가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럼요. 솔직히 오랜만에 일을 했더니 조금은 지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영웅이시면 열심히 일하셔야죠! 그리고 아직 안 흔들리셨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아직 왕실에 복귀하지 않았으니까, 아직 내기는 끝나지 않았어요!”
하며 볼을 부풀리는 레티아 왕녀였다.
그런 레티아 왕녀의 모습을 보니 한 가지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으음··· 지금 보니 여동생이라기보단 딸 같은 느낌이네. 그래, 첫 번째 아이는 딸이었으면 좋겠어.’
나는 잡념을 떠올리며 마차에서 두 눈을 감고, 옆에서 떠들기 시작한 레티아 왕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 * *
복귀하는 길에 레티아 왕녀는 제법 각오를 다진 모양이었다.
마을이나 도시가 보이면 무조건 들렀다.
마치 최대한 시간을 늦추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굳이 반발하지 않았다.
‘왠지 여행 온 기분이니까.’
관광지도 들리고, 마을의 명물로 불리는 음식도 먹어보고 꽤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물론 옆에서 자꾸 귀찮게 들러붙는 레티아 왕녀를 제외하면 말이다.
복귀하며 하는 여행 중엔 다행히도 별일이 없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여행의 끝이 다가왔다.
“이제 곧 도착입니다, 레티아 왕녀님.”
“네···.”
레티아 왕녀의 입이 들썩였다.
왠지 레티아 왕녀가 무어라 말할 것인지 미리 눈치챘다.
“흔들렸냐고 물으신다면 역시 안 흔들렸습니다.”
그러자 무슨 소리하냐는 듯 나를 바라보는 레티아 왕녀였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짐작한 모양이었다.
“저는 그저 감사드린다고 이야기를 드리고 싶었어요.”
“예···?”
감사라니.
내가 감사받을 일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납득할 만한 이유가 떠올랐다.
‘왕실 밖을 나가보지 못한 왕녀.’
그게 바로 레티아 왕녀였다.
당연하게도 레티아 왕녀는 밖의 사회를 구경한 적이 없다.
즉, 여행이라는 것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번 시련을 통해 여행 기분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전생의 나보다 불쌍했을지도···.’
바빠서 여행은 못 다녔으나 일 때문에 주변 나라의 대사로 다녔다.
제대로 못 놀았긴 했어도 대충 경험은 해보았다.
하지만 레티아 왕녀는 아니었다.
나는 레티아 왕녀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별말씀이십니다.”
내 미소를 확인한 레티아 왕녀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방금 전의 그 미소! 흔들리셨죠!”
“절대로 아닙니다.”
다시금 실망하는 레티아 왕녀였다.
그래도 이번 시련을 통해 레티아 왕녀는 밖을 경험했다.
이것은 분명 레티아 왕녀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 * *
미케네르 제국의 황제가 명했다.
“로토 왕국에 제국대사로 지원할 사람은 누구인가?”
미케네르 제국의 황제는 은색의 머리와 길게 수염을 기른 중년이었다.
은색 머리칼과 수염에 드문드문 흰색이 섞여 중후하며 신비로운 멋을 자랑하고 있었다.
황제의 말에 신하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여인 손을 들었다.
에피니아 미케네르. 황제의 딸이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오호··· 내 딸아···.”
에피니아 미케네르가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벌써 일 년이 넘게 지났다.
더 이상 에피니아가 모습을 감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악마의 저주를 풀어낸 덕이다.
“그래, 그렇다면 에피니아 네가 한번 가보도록 하거라.”
“예, 폐하.”
황제의 허락에 에피니아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수하르, 가문에 돌아가 놓고 나를 찾아오지 않았단 말이지!’
사실 에피니아가 제국대사로 로토 왕국에 가려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수하르 칼데르트의 존재 때문이었다.
사라진 수하르 칼데르트가 가문에 복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동안 기다렸음에도 찾아오지 않는 수하르 칼데르트 때문에 에피니아가 직접 움직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수하르, 꼼짝 말고 기다리라고.’
* * *
에피니아가 제국대사의 자격으로 로토 왕국으로 가던 길에 수하르 칼데르트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얻게 되었다.
“뭐야, 왕국의 수도로 갔단 말이야?”
칼데르트령을 경유하는 방향으로 이동 중이던 에피니아는 급하게 방향을 수정했다.
그에 따라 에피니아를 호위하던 기사와 수족들이 의아함을 나타냈다.
수하들의 추궁에 에피니아는 눈을 돌리며 거짓을 말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렇게 가는 것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이전에 방향을 정했을 적에 에피니아의 적극적인 제안 때문에 선택된 길이라 적잖게 당황하는 수하들이었다.
하지만 수하르와 에피니아의 관계를 아는 아미스만이 에피니아의 귀에 속삭였다.
“보아하니 그곳에 그분이 없다는 소식을 들으신 게군요.”
얼굴이 붉어지며 에피니아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거든, 그냥 마음이 바뀐 것뿐이거든.”
다시 방향이 수정된 에피니아는 로토 왕국의 수도로 직행했다.
* * *
로토 왕국의 수도에 도착해보았지만 수하르 칼데르트는 이미 떠나고 난 뒤였다.
게다가 이상한 이야기까지 들은 에피니아였다.
“수하르가 로토 왕국의 두 번째 검성?”
에피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콜로세움에서 파스타르를 쓰러트린 수하르였다.
당연히 수하르는 검성의 취급을 받는 게 맞았다.
다만 두 번째로 들린 소식은 약간의 서운함이 느껴졌다.
“수하르가 한스 라이크라는 블랙 용병이었던 사실도 알려지다니.”
수하르 칼데르트라는 사람이 한스 라이크라는 블랙용병이라는 사실은 몇 사람밖에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였던 에피니아는 왠지 모를 서운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뭐, 납득했다.
수하르가 무언가와 싸우기 위해 자신의 비밀을 밝힌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벨레스라···.”
어디선가 들었던 이름인 것 같은데 기억이 애매했다.
그래도 납득했다.
벨레스라는 악당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들었으니 말이다.
“설마···.”
잠시 옛 기억이 떠올랐다.
갑자기 둘만의 여행 중에 갑자기 떠나버린 수하르.
솔직히 왜 갑자기 떠났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이유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우연히 벨레스를 만나게 되었고, 너무 위험한 상황이라 나에게 먼저 떠난다고 이야기한 게 아닐까.
“분명히 그럴 거야.”
급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아무 이유 없이 떠날 사람이 아니라는 게 에피니아가 보아온 수하르였다.
그렇게 생각한 에피니아는 가슴이 따뜻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구나··· 내 안전을 위해서···.”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확신하는 에피니아였다.
“음··· 그럼, 조금만 기다려볼까?”
듣자하니 수하르는 왕실의 시련이라는 것을 떠난 모양이었다.
에피니아는 왕실의 시련을 떠난 수하르를 기다려주기로 결심했다.
다만 에피니아에게 걱정되는 점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레티아 왕녀는 왜 따라간 거지···.”
레티아 왕녀를 생각하니 불길한 감정이 치솟는 에피니아였다.
하지만 고개를 절래 흔들며 그 감정을 부정했다.
에피니아는 내심 알아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하르가 자신에게 연심의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 설마 별일이 있겠어···?”
수하르와 만나고 가려고 했던 에피니아였지만 시간은 에피니아의 편이 아니었다.
시련에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린 수하르 때문에 에피니아는 어쩔 수 없이 로토 왕국을 떠나게 되었다.
로토 왕국을 떠나게 되면서 에피니아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고 말았다.
* * *
드디어 끝이 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왕국의 수도가 보이네요.”
정확히는 왕국의 수도를 감싸는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레티아 왕녀는 나를 따라 창밖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저 거리가 보이다니, 역시 영웅··· 대단하시네요.”
생각보다 가깝게 느껴졌는데 실제로는 먼 모양이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적어도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말을 최근에 교체했기에 말의 피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말이 힘이 넘쳐서 예정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라···?”
곧 도착이 가까워지는 익숙하게만 느껴지는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방금 로토 왕국의 수도를 나온 마차였다.
“저 마차는···.”
분명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미케네르 제국의 마차!’
승차감이 좋았던 마차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몇 없는 마차라 주인들도 기억하고 있었다.
내 생각이 맞았다면 저 지나치게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는 분명히···.
‘에피니아!’
나는 마차의 안에 기운을 감지했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소드마스터를 목전에 둔 기운에 신성력!’
아마도 아미스와 전보다 성장한 에피니아겠지.
나는 마부에게 말을 전했다.
“저 마차에게 다가가주세요.”
그러자 마부는 아무런 질문 없이 내 말을 따라주었다.
옆에서 레티아 왕녀가 물었다.
“혹시 아시는 분인가요?”
“예! 제···.”
뭐라고 말해야할지 고민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입니다와 제가 아는 선배입니다를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레티아 왕녀에게 나는 솔직하게 말했었다.
에아 키르턴이라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아카데미에서 에아 키르턴이라는 사람이 내 선배였다고도 말했었다.
그렇다면 어떤 답변이든 에아 키르턴이라는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혹시 방해할지 몰라.’
난 적절한 답을 생각해냈다.
“그냥 친구입니다.”
“에헤··· 그런가요.”
무언가 눈치챈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별수 없다.
솔직하게 지금 만나면 에아 키르턴이 사실은 에피니아 미케네르고, 제국의 1황녀라는 사실을 들키게 되니 말이다.
어느새 마차는 에피니아가 탄 마차에 다가갔다.
에피니아의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검을 겨누며 우리의 마차를 멈춰세웠다.
마부가 나를 바라보며 무언의 눈치를 주었다.
‘나보고 어떻게든 하라는 소리겠지.’
나는 마차에 내려서 에피니아의 마차에 다가갔다.
“오랜만이십니다.”
주변의 시선이 있기에 쉽게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창에서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윽고 마차에서 에피니아가 내렸다.
“오랜만일세.”
에피니아도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인지 말투가 고압적이었다.
“먼저 못 찾아 뵌 점 죄송합니다. 아니, 그때 그 일은 정말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먼저 떠나버린 그때의 일을 언급했다.
에피니아가 분명 화를 낼 거라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아니었다.
“그 이야기는 안에서 마저 하도록 하지.”
나를 마차 안으로 초대하는 에피니아였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탄 마차에서 레티아 왕녀가 뛰쳐나왔다.
“잠시만요! 급하니까, 그럴 시간 없어요!”
나는 에피니아와 레티아 왕녀가 눈을 마주치는 장면을 보았다.
에피니아는 웃고 있지만, 전혀 웃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레티아 왕녀는 대놓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드러낸 상태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첫만남일 터인 둘의 사이가 왠지 모르게 안 좋게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