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잠시 에피니아와 레티아 왕녀의 시선이 오가더니, 레티아 왕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수하르 님, 방금 로토 왕국의 왕이신 저의 아버님께서 하루빨리 복귀하라고 하셨어요.”
자신의 지위를 어필하는 듯한 모습의 레티아 왕녀였다.
에피니아는 그에 맞섰다.
“오호, 로토 왕국의 왕께서 아끼시는 2왕녀가 당신이신가 보군요. 반갑습니다. 미케네르 제국의 1황녀인 에피니아 미케네르라고 합니다.”
그러자 레티아 왕녀가 놀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도 놀랬다.
‘뭐야, 더 이상 정체를 안 숨기는 건···.’
생각해보니 에피니아가 정체를 숨긴 이유는 악마의 저주 때문이었다.
이제는 모습을 숨길 이유가 없던 것이었다.
“흐응··· 반가워요. 수하르 님의 그냥 친구이신 에피니아 미케네르 님.”
그러자 에피니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냥··· 친구라···.”
“네, 그냥 친구요. 제게 수하르 님이 말해주셨어요. 저분은 그냥 친구라고.”
어라?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다급하게 이 둘 사이를 중재하려고 나섰다.
그리고 그냥 친구라고 말한 이유를 설명하려고 할 때였다.
“그렇네요···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갑자기 에피니아가 마차에 타더니 이내 출발해버렸다.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 이유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레티아 왕녀가 나를 재촉했다.
“어서 출발해요!”
얼핏 보면 레티아 왕녀가 내게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레티아 왕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에아 키르턴···.”
“네?”
내가 잘못들은 것이길 바랬다.
“방금 저 사람이 에아 키르턴인 거죠. 정확히 에피니아 미케네르고요.”
“······.”
레티아 왕녀의 솔직한 모습 때문에 눈치가 없을 거라 판단했지만 아니었다.
곧바로 알아차리는 레티아 왕녀였다.
“저도 모르게 투정을 부렸네요.”
“투정이요?”
“화가 났어요.”
레티아 왕녀가 왜 화가 났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어떻게 알아차렸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알아차리신 겁니까?”
“에피니아 황녀를 보는 당신의 얼굴이 에아 키르턴을 말했을 때의 얼굴과 닮아있었으니까요.”
아···.
나도 모르게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정말 화가 났어요.”
“어째서 화가 나신 거죠?”
에피니아가 레티아 왕녀에게 무례하게 군 적이 없다.
오히려 무례하게 굴었단 레티아 왕녀겠지.
“저보다 더 어울리니까요.”
“네?”
“솔직히 말해서 에아 키르턴이라는 사람은 제 상대가 안 될 줄 알았어요.”
상대라면···.
아마도 연적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야, 전 왕족의 핏줄을 타고났고, 자국의 공주니까요. 만약에 라이벌이 있다고 해도 저희 언니뿐인데 제 언니는 이미 혼약한 상태예요.”
레티아 왕녀의 말처럼 1왕녀는 이미 혼약한 상대가 존재했다.
“마치 이야기처럼 당신을 제 운명으로 느꼈어요.”
레티아 왕녀가 말하는 이야기는 영웅이 공주와 결혼하는 이야기일 테지.
“전 공주니까··· 그러니까··· 에아 키르턴보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에아 키르턴이 사실은 에피니아 미케네르란 사실에···.”
“······.”
“저와 어떻게 보면 같은 조건이잖아요. 제국의 1황녀. 아니, 직위만 따져보면 저보다 높죠. 그런데 에피니아는 그것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다.
에피니아에겐 레티아 왕녀와 가장 큰 차이가 있었다.
전부터 이어진 인연이라는 것이 레티아 왕녀에겐 없었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만났던 여자가 사실은 제국의 황녀라니. 게다가 그분도···.”
레티아 왕녀가 말을 주저했다.
“그분도 당신을 좋아하고 있는 거 같잖아요! 아니, 확실해요. 그분은 당신을 좋아해요. 하지만 저도···.”
레티아 왕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어느새 마차는 멈춘 상태였다.
아마 마부가 안의 상황을 파악하고, 입구를 지나기 전에 멈춘 것이겠지.
“저도 좋아하고 있단 말이에요.”
레티아 왕녀의 고백.
나는 답을 해줘야했다.
“죄송합니다. 레티아 왕녀님께선 이야기를 영웅담을 동경하거 있을 뿐이지 저를 좋아··· 아니, 사랑하고 계신 게 아닐 겁니다.”
레티아 왕녀가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아니요. 제 감정은 제가 알아요. 영웅담 같은 게 아니더라도 당신을 좋아··· 아니, 사랑해요. 물론 처음엔 동경이겠죠. 하지만 같이 여행을 하면서 진심이 되었어요.”
레티아 왕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한 치의 거짓이 없다는 것처럼 다가왔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난 거절을 해야만 했으니 말이다.
“왕녀님께서 아시는 것처럼··· 전···.”
“···말하지 말아줘요.”
내 입을 레티아 왕녀가 손으로 막았다.
레티아 왕녀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마 내가 어떤 답을 내릴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후우··· 개운해진 거 같아요.”
“······.”
“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 혹시 흔들리셨나요?”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을 억지로 열며 말했다.
“아니요.”
내 대답에 레티아 왕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내게는 전혀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시련은 끝이 났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레티아 왕녀가 내게 속삭였다.
“아마, 에피니아라는 분은 오해하셨을 거예요.”
그건···.
나도 이미 알아차렸다.
그저 당황해서, 아니면 나와 에피니아는 아무 사이가 아니란 것을 떠올려서 움직이지 못했을 뿐이었다.
“아마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너무 늦지 않길 바래요.”
어느새 마차는 왕실에 도착했고, 레티아 왕녀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래도··· 혹시라도··· 훗날이라도··· 흔들리셨다면 다시 저를 찾아와주세요.”
라는 말을 끝으로 레티아 왕녀는 왕실 안으로 들어갔다.
* * *
나는 알현실에서 왕을 마주하게 되었다.
왕은 기분이 꽤나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레티아 왕녀와 관련된 일 때문일 테지.
그래도 왕은 그것을 티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부탁을 내게 할 거지? 군대를 내달라는 부탁인가?”
“네,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전에 일어나지 않았던 나테아르덴 제국 내부에서의 반란.
분명 그곳에 벨레스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근거 없이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선 근거를 모을 생각이다.
‘그래도 일단은 에피니아를 찾아가···.’
순간 내가 에피니아를 찾아가도 될 만한 자격을 갖춘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에피니아가 마차에 올라타며 나를 떠난 순간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야겠지.’
모든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잠시만 기다려주신다면 확실한 증거를 가져오겠습니다.”
“그래, 알겠다. 그럼, 이만 가보거라.”
왕이 내게 축객령을 내렸다.
기분이 많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왕이 가장 아끼는 자식이 레티아 왕녀였다.
그런 왕녀를 내가 울렸다.
어쩔 수 없는 처사일 수도 있겠다.
‘약간 머리를 식힐 시간을 드려야겠지.’
애당초 지금 부탁을 말한다면 어떠한 일도 받아주지 않을 것만 같으니 말이다.
* * *
데이브형은 이미 칼데르트가로 돌아가고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혼자만의 귀가길이 되어버렸다.
혼자 말을 타고 칼데르트가로 돌아가는 길에 계속해서 한 사람만 떠올랐다.
‘에피니아···.’
자꾸만 에피니아의 그 어두워진 얼굴이 떠올랐다.
만나러 갈 생각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두려웠다.
만나러 갔지만 쫓겨나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쫓겨나도 할 말이 없지만···.’
반신의 경지가 되고, 내가 에피니아를 직접 찾아간 적이 없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칼데르트가로 돌아가던 길에 파우스트령을 들렀다.
정확히는 페브리스 마을을 방문했다.
‘처음으로 에피니아와 여행을 한 곳···.’
다시 보아도 매우 좋은 곳이었다.
바가지요금이라는 것만 제외하고 말이다.
우선 나는 쉴라 여관을 들렀다.
‘모레드트 덕분에 싸게 이곳에서 지낼 수 있었지. 그리고···.’
에피니아의 재력을 확인할 수 있던 장소기도 했다.
제법 값나가는 여관을 절반이나 할인 받았다고 하더라도 쉽게 냈었다.
유명하지 않은 가문의 자제가 쉽게 낼 만한 금액은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 번 도와줬다고 값비싼 여관을 절반의 가격으로 내려주는 여관주인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조금은 어이없긴 하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음 장소는 페브리스 숲거리였다.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구나.”
이 거리 에피니아와 함께 걸었을 때 에피니아한테 향수가 은은하게 났었다.
그 향기가 잊혀지지 않았다.
다음 장소는 에피니아와 함께 도전했던 유적이었다.
“이 폭포 뒤에 있는 동굴이었지.”
여전히 꽤나 많은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대놓고 폭포 안으로 들어갔다.
대놓고 들어갔음에도 그 누구도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묘하네.”
동굴은 안은 깔끔했다.
전에 싸웠던 골렘의 잔해는 없어져있었다.
보상을 받았던 방도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에피니아를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었지.”
솔직히 아카데미를 다녔을 적까지도 에피니아의 경지를 넘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넘었다.
“합체된 골렘을 둘이서 어떻게든 쓰러트렸지.”
검은 골렘과 하얀 골렘을 쓰러트리자 합체했다.
내가 시간을 끌고, 에피니아가 마무리했다.
처음으로 행한 합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생각보다 합이 잘 맞았다.
“음··· 이제 돌아가야겠어.”
더 이상 추억만 살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서 빨리 칼데르트가로 돌아가야한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었다.
“에피니아를 찾아가는 것조차도 힘들게 느껴질 줄이야···.”
* * *
칼데르트가에 도착하니, 의외의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우선 아버지에게 물었다.
“어? 별장에 계신 게 아니었습니까?”
“크하하하, 어떻게 별장에 있을 수 있겠나. 우리 아들이 왕국의 두 번째 검성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테시아르 어머니도 살며시 웃으며 나를 축하해주었다.
“너는 내 자식들 중에서도 크게 될 아이라고 믿고 있었다.”
마치 나를 친자식 취급해주는 테시아르 어머니였다.
나는 웃으며 답했다.
“모든 게 저를 믿어주신 어머니 덕분입니다.”
아마 전생과는 다르다.
이번 생엔 가족과 안타까운 이별은 없었다.
‘모든 게 회귀한 덕분이지.’
내 말에 테시아르 어머니는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하셨다.
그런 테시아르 어머니의 모습에 마음 한켠이 따스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문득 아버지와 테시아르 어머니가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테시아르 어머니가 말했다.
“혹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거니?”
“제게 걱정거리가 있을 리가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아버지와 테시아르 어머니였다.
그 모습에 나는 한순간 고민했다.
지금 내 걱정거리를 솔직하게 이야기해야할지 말이다.
“으음··· 없다면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있다면 알려주렴. 우리는 가족이잖니.”
테시아르 어머니의 말에 나는 솔직하게 말해주기로 결심했다.
조금은 낯부끄러운 연애 이야기를 말이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래, 따로 장소를 마련해놓을테니 한번 이 어미에게 털어놓아보렴.”
“나도 함께 고민을 나눠줄테니 걱정 말거라.”
상냥하기 그지없는 테시아르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
나는 오늘 저녁을 기약하며 우선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