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회귀 전에 일만 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 그것으로 과로사를 했다는 것.
알고 보니 과로사도 아니고, 독살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게다가 이 대륙에서 암약하고 있는 노블리스라는 존재도 알아차렸다는 것.
“뭐, 대충 이 정도네요.”
에피니아의 눈가엔 눈물이 살짝 고여있었다.
그런 에피니아의 반응을 내가 이해할 수는 없었다.
“죄송해요. 재미없는 이야기였나요?”
“아니, 조금은 불쌍하게만 느껴져서. 어쨌든 결국 일만 하다가 끝나는 삶을 산 거잖아.”
“그건··· 그렇죠.”
에피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여행 같은 걸 좋아하더라.”
“사실 제가 일을 하면서 유일하게 좋아했던 게 다른 곳으로 파견을 나가는 것이었거든요.”
“힐링하고 싶었던 거구나.”
“뭐, 그게 제일 크긴 하죠. 그리고 미래에 제가 살고 싶은 곳을 정하는 것이기도 해요.”
에피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살고 싶은 곳?”
“여행을 다니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에 정착할 생각이거든요. 물론 귀족 대우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요.”
“그거··· 좋네.”
에피니아에게 솔직하게 말하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날도 슬슬 저물어갈려고 하네.’
꽤나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고, 산 중에 있는 장소라 날이 빠르게 저물어지려고 하였다.
‘지금 해야겠지?’
나는 품속을 매만졌다.
꽃이나 반지와 함께 고백을 하는 것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결혼을 약속하는 것도 아니니, 에피니아가 조금은 부담스럽게 여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마음만 전달하기엔 내가 싫었다.
‘후우··· 긴장하지 말자.’
나는 에피니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에피니아도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내 의도를 알아차린 것인지 에피니아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나 역시 마찬가지겠지.
“에피니아···.”
“어··· 응!”
에피니아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으로 보아 에피니아도 긴장한 모양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차례 한 뒤에 품속에 넣어둔 목걸이를 꺼냈다.
휘황찬란한 보석이 박히진 않았지만, 제법 세련된 목걸이.
“잠깐 뒤돌아주실래요?”
내가 직접 목걸이를 걸어주고 싶었다.
에피니아가 뒤로 돌고, 나는 에피니아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다시 나를 바라보는 에피니아.
목걸이는 에피니아와 어울리며 한층 더 빛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어울리네요.”
“고마워··· 그런데 왜 갑자기 목걸이를···?”
“그냥··· 선물하고 싶었어요. 어울릴 거 같아서요.”
에피니아가 고개를 푹 숙이며 부끄러워했다.
나는 다시 한차례 심호흡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어제 했던 말과 같은 말.
하지만 주위의 분위기는 다른 그 말.
“사랑합니다, 에피니아.”
나는 에피니아의 눈을 마주치며 잠시 시간을 둔 뒤에 이어말했다.
“저랑 연인이 되어주실래요?”
홍당무로 변해버린 에피니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리고 나도 너를 사랑하고 있어.”
에피니아의 대답을 듣는 순간, 내 온 몸에 힘이 빠졌다.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쓰러지듯 누워버린 나를 에피니아가 다가왔다.
“수하르, 괜찮은 거야?”
심장이 뛰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고동소리를 느끼며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네··· 너무 용기를 냈네요.”
그러자 에피니아가 미소를 지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나도 용기를 내볼게.”
그리고 순간적으로 에피니아가 얼굴을 내게 가까이 가져다대었다.
곧바로 내게 입을 맞추는 에피니아.
나는 당황하며 곧바로 일어났다.
“에피니아···?”
에피니아는 고개를 돌린 채 내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살짝 보이는 에피니아의 귀는 빨갰다.
잠시 동안의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에피니아가 문득 떠올렸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뭐든지 말해보세요.”
“잠깐, 이제 우리 둘은 연인 사이잖아. 말을 편하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어··· 음··· 응, 뭐든지 말해봐.”
에피니아가 살짝 주저하며 말했다.
“그 로토 왕국의 공주랑은 무슨 사이였어?”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 아무 사이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일방통행에 가까운 사이라고 해야하나.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사실대로 이실직고했다.
“로토 왕국의 2왕녀인 레티아 왕녀인데 나랑은 아무 사이가 아니었어. 다만 레티아 왕녀가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랬구나···.”
“물론 제대로 거절했지. 나는···.”
잠시 말에 뜸을 들였다.
이미 전한 사실이지만 낯부끄러운 것은 여전했다.
“에피니아를 너를 좋아하니까.”
다시금 어색한 공기가 되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복귀하기로 했다.
있었던 자리를 정리한 후에 에피니아를 들어 안았다.
에피니아는 아무런 저항 없이 내게 안겼다.
오히려 내 품속으로 더 기대었다.
그런 에피니아의 모습이 내겐 그저 귀엽게만 다가왔다.
“자, 이제 출발할게!”
“응!”
올 때처럼 갈 때도 빠른 속도를 유지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케네르 제국의 수도에 도착했다.
도착한 후에 에피니아를 황실로 가는 샛길까지 배웅 나가주었다.
“저기··· 내일도 만날래?”
“좋아!”
에피니아와 작별하고, 나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상념에 빠져들었다.
‘회귀 전까지 통틀어 첫 연애···.’
심장이 아직까지 두근거리고 있었다.
반신의 경지에 오르며 인간이라는 종을 초월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에피니아는 내게 아직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해주었다.
감정의 교류만으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것을 보아는 나는 아직 인간이었다.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가져도 난 아직 인간이었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하루였다.
하지만 다음 날에 나는 더 큰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 * *
다음 날 에피니아와 단둘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되었다.
에피니아도 어제 황실에 복귀하고 알게 된 이야기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지금 메시아가 휴가 중이라는 거지?”
“응.”
“그리고 메시아가 휴가 중이었던 이유가 몸 상태가 안 좋았었고.”
“그렇지.”
“알고 보니 그 몸 상태가 안 좋았던 게···.”
“응, 임신했대.”
메시아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당연히 메시아의 연인인 페트릭이 아빠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소식을 오드가 들으면 매우 기뻐하겠는걸?’
에피니아가 내게 더 이야기해주었다.
“그래서 계획했던 것보다 빨리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대.”
“결혼이라···.”
나보다 연상이지만, 제자의 결혼식이었다.
축하할 일이었다.
어렸을 적에 가족을 잃은 페트릭에게 새로운 가족이 된 아이는 페트릭에게 아주 큰 의미를 주었을 것이다.
“그럼, 페트릭과 메시아는 이곳 수도에 있겠네?”
“응.”
나는 축하를 해주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에피니아도 내 생각에 동의했다.
“새롭게 집을 구한 곳을 내가 알고 있으니까, 내가 안내할게.”
“응, 고마워.”
에피니아의 안내에 따라 페트릭을 찾아갔다.
페트릭과 메시아의 집은 제법 소란스러웠다.
꽤 많은 사람이 찾아간 모양이었다.
내가 집의 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페트릭의 목소리였다.
“커흠, 스승이 제자를 축하해주러 왔다!”
“···? 수하르 스승님!”
페트릭이 문을 열고 나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에피니아를 확인하고, 곧바로 인사했다.
“황녀님도 오랜만이십니다! 혹시 하르는 잘 지내고 있는지요?”
“매일같이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어요.”
나는 슬쩍 내부를 살폈다.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메시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파야와 아나였다.
페트릭의 용병 동료이자 경쟁 상대였던 아나와 그녀의 스승이자 페트릭의 스승인 오드와 경쟁 상대였던 파야 말이다.
“오, 오랜만이네요.”
파야와 아나와 메시아도 나와 에피니아를 보고 다가왔다.
파야가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사라진 챔피언이 이곳에 있네.”
“하하하, 그때의 전 챔피언의 그릇이 아니었죠.”
“무슨 겸손을··· 카시아스가 아니라면 그 누가 챔피언의 자리에 앉겠는가. 물론 파스타르를 제외하면 말이지.”
파스타르라는 말에 최근에 있었던 일을 파야에게 말해주었다.
“아, 파스타르 하니까 생각났는데, 최근에 파스타르와 만났어요.”
“오, 정말로?”
“네, 여전하더군요.”
파야가 씁쓸한 듯 웃었다.
“네가 떠나고, 파스타르도 떠나고. 그런 콜로세움은 있을 가치가 없다고 봐서 난 검투사를 은퇴했다.”
“그런가요···.”
뭐, 그래도 파야가 나이도 나이다.
애당초 은퇴를 해야하긴 했다.
게다가 페트릭도 결혼할 마당에 더 이상 파야의 결혼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파야는···.’
오드와 어울릴 것 같았다.
나는 파야만 따로 구석으로 불러냈다.
“파야··· 전할 이야기가 있어요.”
“도대체 어떤 이야기길래, 이렇게 구석까지 불러내는 거야.”
“저, 오드를 만났어요.”
파야가 헉소리를 내며 크게 놀랐다.
한순간 시선이 나와 파야로 집중되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대충 얼버무렸다.
“그 말이 정말인가?”
“네, 연락도 가능해요. 그래서 페트릭의 결혼 사실을 전해줄 생각이에요.”
“그런가···.”
아련하다는 표정을 지은 파야였다.
마치 첫사랑을 떠올린 것과 같이 말이다.
“만약 오드가 페트릭의 결혼식에 참석한다면 오드를 다시 만나게 되실텐데.”
“그, 그렇겠지.”
“어때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고, 고백이라니!”
“아니, 솔직해집시다.”
내가 본 파야는 확실히 오드에게 호감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직까지도 연인조차 없을 리가 없지 않는가.
“너, 너나 잘하고 말하거라.”
“네, 전 잘하고 있으니까. 파야도 잘해봐요.”
하고 나는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무리로 향했다.
파야는 잠시 생각을 하던 것 같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일단 참석하는 건 확실하겠지?”
“그건··· 사실 저도 잘···.”
“크흠··· 온다면 꼭 말해줘.”
“네, 그러죠.”
나는 일부러 오드에 관한 이야기를 파야에게만 했다.
페트릭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깜짝 선물이라고 해야겠지.’
나는 급하게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
“저 금방 어디 좀 다녀올게요.”
오드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서였다.
‘늦지 않으면 좋겠는데.’
나는 비싼 돈을 들여 가장 빠른 우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간결했다.
[미케네르 제국에서 페트릭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
대충 날짜를 적었다.
이 편지를 확인한 오드의 반응이 절로 궁금해졌다.
추가로 오드가 온다면 페트릭과 파야, 아나의 반응도 살짝 궁금해졌다.
“이제 다시 축하해주러 가야지.”
페트릭과 메시아의 집을 다시 방문했다.
어느새 시녀장인 아미스와 메시아의 주변인물로 보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 모두가 아마 황실에 근무하는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에피니아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났다.
“그럼, 이제 슬슬 저는 가봐야겠네요.”
아무래도 상급자에 위치한 에피니아가 다른 이들이 불편해하는 것을 우려해 먼저 떠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 역시 그게 좋다는 생각이었다.
‘결혼식을 위한 선물을 준비해야겠네.’
나와 에피니아가 먼저 떠났다.
둘이 거리를 걸으며 페트릭과 메시아에 해줄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피니가 말했다.
“으음··· 나는 역시 태어날 아이를 위한 물건이 좋겠네.”
이미 아이가 들어선 메시아이니 결혼식 선물로 아이용품도 좋긴 할 것이다.
나는 그 둘에게 어떤 선물을 줄지 좀 더 생각해보았다.
오드를 이용한 깜짝 선물도 좋지만, 오드가 오더라도 확실한 선물을 하나 더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민 끝에 나는 선물을 정했다.
‘진짜 귀한 거지만, 제자의 결혼식마저 아낄 수는 없는 법이지.’
내 선물을 받고, 기뻐할 페트릭을 생각하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