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64)

거대한 10층 빌딩 앞에선 심후는 심호흡을 했다.

'앞으로 여기가 내가 살 곳.'

가상현실접속방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새로운 거주 개념으로 떠오를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공동 샤워장과 세탁실 그리고 개인사물함을 구비하는 것은 이제 거의 기본이었다.

물론 개인사물함은 기간에 따라 임대비를 내야 했다. 이런 이유로 대형 접속방에서는 할 일이 넘쳐났다.

10층 빌딩 전체가 하나의 접속방이었기에 필요한 사람도 굉장히 많았다. 

'대형은 숙식제공 해줘서 좋아.'

벌 수 있는 돈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숙식제공, 특히 잠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가상현실접속기 사용이 바로 접속방에서 제공하는 숙박이었다. 접속방에서 주는 돈은 식사비와 약간의 용돈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하려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짐들은 아르바이트생 전용 사물함에 보관했다. 이후 접속방에서 주는 유니폼으로 만들어진 체육복을 입고 일하기 시작했다.

청소와 설거지, 간단한 조리, 손님 안내 등 해야 할 일은 넘쳐났다. 10층짜리 대형 접속방이기에 할 일이 많았다.

자신의 근무시간에 바쁘게 일하던 심후는 겨우 휴식 시간을 맞이했다. 8시간을 내리 일하고 나서 주어지는 것은 8시간의 자유 시간이었다.

'가상현실접속기는 8시간 후에나 쓸 수 있으니.'

잠자기 전에는 손님으로서 사용하지 않는 이상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이라면 잠깐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기는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휴식을 취하며 땅콩빵을 먹으며 우유를 마셨다. 달콤하고 고소한 땅콩크림이 우유와 함께 목에 넘어갈 때의 느낌을 음미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쉬지 않고 일어나던 복수를 향한 집념이 잠깐 수그러들었다.

배를 채우며 잠시 휴식을 취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복수를 하려면 무엇이 가장 좋을까?'

가상현실 속에서 사는 것은 좋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게임에 빠져 복수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돈을 빨리 벌어야 하는데.'

현재 가진 기술이라고 해봐야 공장을 다니면서 부품 조립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큰돈을 벌기에는 어림없는 능력이었다. 

'게임으로 돈을 버는 것도 힘들어.'

가상현실게임이 나왔다고 하지만 게임으로 돈을 버는 것은 극소수였다.

게임을 돈벌이로 삼아봐야 게임 계정비나 낼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1달 동안 쉬지 않고 일하듯이 게임을 해도 벌리는 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돈이 필요한데.'

복수를 하고 인생을 즐기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돈이 없다는 것은 힘이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 사회였다.

심후도 그것 때문에 쪽방에서 생활하면서 돈을 악착같이 모았었다. 모두 애인이었던 차영과 결혼하기 위한 것이었다.

허나, 돈이 벌리는 족족 차영에게 선물을 사주며 호구짓을 했었다.  

'완벽한 호구라이프였지. 크크크크.'

과거를 생각하니 욕이 계속 나왔다.

'일단 일자리나 알아보자.'

접속방 아르바이트는 아르바이트일 뿐, 오래 할 일은 아니었다. 아르바이트생으로 계속 있어봐야 겨우 먹고 살면서 게임이나 즐기는 삶이 전부였다.

그것도 나이가 들면 하기가 어려웠다. 젊은 사람 놔두고 나이 많은 사람을 써주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직원 휴게실에서 좋은 일자리를 검색하며 시간을 보내다보니 8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시간이 되자 심후는 개인 사물함에 물건을 모두 넣고는 기저귀를 찼다.

가수면 상태에서 가상현실게임을 하고 있다 보면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배설욕구가 치밀어오르는데 게임에서 나갈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

중요한 순간에 게임 접속을 종료해버리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계속 게임을 하다가는 접속기 안이 오물로 더러워졌다. 그래서 장시간 가상현실을 이용할 경우 기저귀를 차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 이로 인해 성인용 기저귀 시장이 돈을 많이 벌었다.

'게임은 역시 그걸 해야겠지?'

가상현실이 처음 나왔을 때는 대부분 시뮬레이션을 위주로 게임이 출시되었다. 레이싱과 같은 것들이 주를 이루었었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하며 점점 오감을 표현할 수 있게 되며 게임에도 발전이 생겼다.

그때 가장 먼저 출시된 다중접속롤플레잉 게임이 바로 '올라이프'였다.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가상현실에서 실제로 전투를 벌이며 싸우는 게임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이후 올라이프와 비슷한 작품이 쏟아지며 올라이프는 뒷전으로 밀려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올라이프는 밀려나지 않았다.

'올라이프 2'가 출시되며 대부분의 기본적인 것들을 리셋하지만 '올라이프 1'의 사용자들에게는 약간의 혜택이 돌아가게 되었다. 뽑기를 통해 이벤트 아이템을 주거나 퀘스트가 주어졌다. 혹은 일정 레벨 이상인 경우 보유한 아이템 중 2에 적용된 아이템 하나를 옮겨주거나 일정액 이상의 게임머니를 가지고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로 인해 올라이프 2가 흥행을 하면서 올라이프 1의 계정들이 거래되기도 했다. 그냥 게임을 시작하기보다 올라이프 1의 계정에서 2로 전환하는 것이 더 이득이었기 때문이었다.

게임사에서는 타인의 계정을 가지고 새로운 계정을 생성하는 것도 인정해주었다. 계정의 원주인과 합의 되었다는 계약서만 제출하면 무조건 받아들여주었다.

이후 올라이프 1의 계정들이 모두 처분되자 게임을 정리하려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올라이프 1의 계정을 팔아 재미 본 사람들이 계속 계정을 만들어 다시 게임을 했기 때문이었다.

올라이프는 계속해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현재 올라이프 시리즈의 50번째 게임이 출시되려 하고 있었다. 약 200년간 살아남은 게임회사의 저력은 무시무시했다.

이젠 자식에게 올라이프의 계정을 물려주는 일도 일어날 정도였다.

게임은 단순히 게임이 아닌 하나의 문화로 승화 되었다.

이제는 일가친척이 모여 게임을 하는 것은 물론 대를 이어서 하기도 했다. 올라이프의 성공을 보고 수많은 게임 회사들이 이를 따라했다. 하지만 올라이프는 언제나 앞서갔으며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오래도록 인기를 끈 게임 올라이프는 이제 곧 50번째 작품을 내놓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러나 심후가 올라이프를 선택한 이유는 인기 게임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놈들도 올라이프 하겠지.'

애인이었던 구차영과 데이트를 할 때면 접속방에서 올라이프를 했었다.

가상현실에서 같이 사냥을 하며 데이트 하는 것이 즐거웠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 날 벗겨먹기 위한 거였지.'

돌이켜 생각해보니 호구 짓을 한 것이었다.

가끔 키스나 살짝 하는 정도의 사이였다. 잠자리는 함께 하지도 못했다.

게임에서는 계속 쫓아다니며 차영의 노예처럼 굴었다. 접속방 비용도 내고 밥값도 내고 집에 모셔다 주고 선물도 줬었다.

내 여자라고 생각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돌이켜 생각하니 호구가 따로 없었다.

'그래, 난 병신이었어. 크크크큭.'

하루 일과를 하며 약간이나마 정화되었던 마음이 다시 검게 물들었다.

부모에게 버림 받고 어렵게 성장하면서도 꿋꿋하게 지켜왔던 순수함은 이제 없었다. 오직 검은 복수심만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죽여 버리겠어.'

현실에서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렇게 인생을 모조리 날려버리기엔 조금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곱게 죽이기보다는 괴롭혀주고 싶었다.

질질 짜면서 불행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보고 싶었다. 

'분명 같은 클랜에서 같은 아이디로 시작하겠지.'

대를 이어서 하는 게임이었다.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어도 전작의 캐릭터에서 중요한 아이템이나 스킬 하나를 가져가려 할 수 있었다. 돈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새로운 아이디를 만들기보다 예전에 쓰던 아이디를 그대로 쓰며 게임 속 인간관계를 계속 이어나가는 편이었다.

'일단 중요한 건 올라이프 50이 시작하기 전에 돈을 벌어 둬야해.'

올라이프 49에 있는 자신의 캐릭터에 모아놓은 돈을 50으로 환산해서 가져갈 생각이었다. 새로운 게임을 시작할 때 좋은 스킬을 가지고 있거나 돈이 많아야 빠른 성장이 가능했다.

여기에 운이 좋아서 게임 이전 뽑기에서 특별 아이템이나 특별 퀘스트를 얻게 된다면 금상첨화였다.

심후는 올라이프 49에 접속했다.

복수를 위한 게임 플레이가 시작되었다.

올라이프 49에 접속한 심후는 자신의 상태를 '접속 안함'으로 바꾸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친구 목록에 있는 차영과 형님이라는 영수에게 자신이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게임에 접속해보니 두 사람은 없었다. 

'좋았어.'

두 사람을 차단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상태까지 접속 안함으로 바꾸고는 사냥터로 향했다.

무한 노가다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차영과 영수에 의해 쉴 때면 게임을 했었다.

아이템을 얻기 위한 무한 사냥에 끌려다니면서도 심후는 즐거워했었다. 그러다 좋은 아이템이 나오면 언제나 양보했다. 생각해보면 두 사람에게 이용당했을 뿐이었다.

돈은 빠르게 쌓였다. 오히려 더 좋은 아이템으로 바꾸고 더 강한 사냥감이 즐비한 곳에서 사냥을 했다.

그때였다.

- 사망하셨습니다. 죽었다. 왜? 기습을 당한 것이었다.

사냥터에 가끔 나타나는 플레이어 킬러들에 의한 것이었다.  

"이런 개 같은 놈이!"

심후는 연신 욕을 했지만 곧 가장 가까운 마을의 광장으로 이동되었다.

인벤토리 창을 살펴보니 상당량의 골드와 새로 구입한 무기가 떨어진 상태였다. 

"아오!"

욕이 절로 나왔다.

일이 안 풀리려니 계속 안 좋은 일만 가득이었다. 한참을 성질부리던 심후는 생각을 바꿨다.

'나도 뒤를 치자. 이대론 억울해 못 살아!'

저렙들이 즐비한 곳에서 돈을 벌어야 많이 벌 순 없었다. PK를 결심한 심후는 모든 장비를 유저를 죽이는 것에 특화시켰다. 그리고 저렙들만 찾아다니며 죽였다.

"뒈져라! 개놈들아!"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는 짓이었지만 계속해서 저렙들을 죽이고 다니면서 심후는 쾌감을 느꼈다. 

'그래! 이 느낌이야!'

속이 후련했다.

계속 당하기만 했던 과거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이 길이 내 길이다.

크크크크,'죽은 유저가 떨어트린 아이템과 돈을 회수하며 심후는 낄낄거렸다. '그래! 이 느낌이야!'속이 후련했다.

계속 당하기만 했던 과거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이 길이 내 길이다.

크크크크,'죽은 유저가 떨어트린 아이템과 돈을 회수하며 심후는 낄낄거렸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8시간의 근무 이후에는 자유가 주어졌다. 자유 시간에 하는 일은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는 것. 괜찮은 자리는 많은 자격증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일단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공부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를 느끼고 그만 두었다.

'나한테는 무리야.'

어려서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부모의 무관심이 인지력 형성에 악영향을 미쳤고 이는 곧 지식 습득을 어렵게 했다.

이후 할아버지의 손에서 컸지만 공부는 그다지 하지 않았었다. 

'그냥 이대로 살아야 하는 건가?'

한계가 확실히 느껴졌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노력한다면 어느 정도 발전할 가능성은 있어보였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공부를 파고들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다. 확실하게 복수 할 수 있다는 확신도 없는데 엉뚱한 곳에 시간을 쓸 생각이 전혀 없는 심후였다.

'결국 몸을 써야 하는 건가?'

머리를 쓰는 것은 별로 자신이 없었지만 몸을 쓰는 것은 그래도 자신 있었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인내심하나만큼은 수준급이었다.

지루한 반복 작업을 하면서도 남들보다 월등한 작업 효율을 보여주었었다. 힘든 일도 어렵지 않게 해냈다.

과도한 노동 이후 남들과 똑같은 휴식을 취해도 더 많이 회복되었다. 심후는 공장 일이 무척이나 쉬웠다.

남들이 어렵다며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 엄살 같다는 생각이 가끔 들 정도였다. 

'몸을 쓰는 건 돈이 별로 안 되는데. 운동선수라도 하면 모를까.'

인내심은 강하지만 그렇다고 운동선수가 될 정도로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에이!"

답답함에 성질을 내며 보던 취업 잡지를 탁자에 던졌다.

'일단 게임에 집중하자.'

모든 방법이 통하지 않을 때 최후에는 살인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전에 최대한 인생도 즐기고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싶었다.

심후는 미래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고는 커피를 마시며 맛과 향을 음미했다. 마음에 평화가 깃들었다.

허나, 평화는 한 남자의 고성에 깨졌다. 

"할배! 지금 뭐라 그랬어?"

"이노무 자식이! 후레자식이라고 했다. 왜! 어쭈 주먹 쥐네? 한 대 치겠다?"

"아우! 재수 없으려니까."

남자는 성질을 부리며 돌아섰다. 접속방에서 부딪친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이었다.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가끔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게임을 하다가 좋지 않은 일을 겪은 이들은 아주 작은 자극에도 크게 흥분했다.

흥분한 사람들이 마주치면 싸움이 나는 것은 금방이었다. 어깨를 스치거나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도 폭언을 내뱉으며 싸움을 걸었다.

스트레스가 쌓였으니 풀려는 것이었다.

"저, 손님들 일단 고정하시고 잠시 이쪽으로."

얼른 달려간 심후는 다른 아르바이트생과 같이 두 사람을 말렸다.

심후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자판기 앞으로 갔다.

"뭐 안 좋은 일 있으셨어요?"

"아, 글쎄 아이템 강화 실패해서 열 받는데 저 놈이 다짜고짜 욕하잖아."

"저런."

할아버지라도 게임을 하게 되면 젊은이와 별반 다를 것 없어진다.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거기에 무섭도록 빠지는 것이었다.

심후는 계속 맞장구를 쳤다. 얘기가 길어지니 슬슬 지루해졌지만 꾹 참았다.

열을 내며 얘기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가슴 한 구석이 그래도 훈훈해졌다. 

'할아버지.'

부모에게 버려진 이후 받아준 사람이 할아버지였다.

어렸던 심후에게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신나게 떠드는 노인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지만 왠지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친근감은 영양가 없는 지루한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는 동력이 되어주었다. 

"목마르지 않으세요? 제가 살게요."

"응? 아니야. 괜찮아."

"에이, 그러지 말고요."

"그럼 거기 그 '양기십강' 하나 뽑아줘."

양기십강. 남자 정력에 좋다고 광고하는 에너지 드링크였다. 광고에서 

'양기를 열 번 강화해줍니다!'

라고 하는 말이 갑자기 떠올라 속으로 웃으며 하나 뽑아 건넸다.

"크하! 좋다."

단숨에 병을 비운 노인은 기분 좋은 표정을 짓더니 질문을 던졌다.

"참 예의가 바르구먼. 뉘집 자식인지 몰라도 가정교육이 잘 됐어."

"예, 감사합니다."

칭찬은 전혀 고맙지 않았다. 자신을 버리고 어딘가에서 재혼해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부모님 생각을 하니 오히려 살짝 열이 뻗쳤다. 그래도 화를 낼 순 없었다. 노인은 심후의 사정을 모르니 한 실수였다. 거기에 대고 대뜸 성질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런데 이름이 뭔가?"

"예? 한심후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름은 왜요?"

"오호? 나랑 종씨구만."

"한씨세요?"

"그럼!"

심후는 피식 웃었다. 현재 통일한제국 내에 한씨는 엄청나게 많았다. 제국의 건국 황제가 최씨였지만 두 번째 황제부터는 한씨가 다스렸다. 이로 인해 몇몇 사람들은 우스개소리로 

'한씨가 다스리니까 한제국이다!'

라고 할 정도였다.

"성함은요?"

"내가 한종우야. 한종우."

"풉."

노인의 말에 심후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 내 말이 안 믿겨?"

"아뇨, 믿어요. 그냥 너무 의외여서요. 건국 공신하고 같은 성함이라서 좀 놀랐어요."

한종우. 통일한제국을 건국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건국공신이며 2대 황제의 아버지이기도 한 인물이었다. 제국 내에서는 그야말로 영웅으로 통하는 이름이었다.

특히 반도에 가면 더 심했다. 그쪽 동네에서는 영웅을 조금만 험담하면 사람들이 욕을 하며 배척할 정도였다.

심할 경우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때문에 영웅과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 분도 힘드셨겠네.'

행동 하나 잘못하면 영웅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면서 욕을 먹었을 테니 아기 때부터 자유를 박탈당하고 눈치 보며 살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오늘 고마워. 이것도 인연이니까 내가 선물 하나 할 게."

"예? 안 그러셔도 되요."

"아니야. 내 손자 같아서 그러는 거니까 사양하지 마."

"네, 감사합니다."

노인이 거듭 권하니 심후는 더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노인은 며칠 후에 찾아오겠다며 접속방을 나갔다. 며칠 후, 노인이 찾아왔다.

같이 가자는 말에 심후는 어쩔 수 없이 하루 일을 쉬기로 했다. 갑자기 쉬는 것이었으나 평소 성실히 일하며 다른 아르바이트생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일하지 않은 시간의 수당을 나눠주겠다고 하니 부탁 받은 사람들은 전부 허락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어디긴 선물 주려고."

'밥 사주려고 그러나?'

심후는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여자였다면 수작 부릴 것을 경계했겠지만 남자였다.

노인이 남색가가 아닌 이상 자신을 덮칠 이유는 없었다. 노인은 근처의 고급 오피스텔로 들어섰다.

'여기서 사나?'

선물 준다더니 그냥 집에서 밥이나 해주려나 싶었다. 허나, 오피스텔 안에 들어선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길 저한테 주신다고요?"

"왜? 마음에 안 들어?"

"농담하시는 거죠?"

"농담 아냐."

"무슨 속셈이죠? 저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경계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 한종우가 준다고 한 것은 작지만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더구나 안에는 처음 보는 모델의 가상현실접속기도 있었다.

우연히 접속방에서 만나서 얘기 좀 했다고 이런 선물을 준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네가 이걸 받는 것이 내가 원하는 거다.

"그게 말이나 됩니까?"

"말이 돼. 이제부터 설명할 테니까 거기 앉아서 잘 들어라."

설명이 시작되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자신을 한종우라고 밝힌 인물은 정말 한종우 본인이었다.

'그럼 300살인가? 그게 말이 돼? 개뻥도 정도가 있지.'

"너 지금 내 말 못 믿나본데. 너 이런 거 봤어?"

종우는 오피스텔 한쪽에 구비된 냉장고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헉!"

그뿐만이 아니었다.

문이 열린 것도 모자라 안에 있던 소주병이 허공을 날아 종우의 손에 쥐어졌다. 

"두 눈 뜨고 잘 봐라.

이후 소주병이 녹기 시작했다. 밑에 구멍이 뚫리더니 소주가 쏟아지려 했다.

그 순간 소주가 동그랗게 뭉치더니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소주향이 왈칵 풍기는 것이 진짜 소주였다.

종우의 손에 들린 병은 모두 녹았다. 유리가 물처럼 녹아내리더니 넓게 퍼지며 허공에 떠 있는 소주를 감쌌다.

길쭉하던 병은 동그랗게 변했다. 꼭지 부분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자, 봐라. 이게 진짜 이슬이다."

동그란 초록빛 유리 속에서 소주가 찰랑거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풀잎에 맺힌 이슬이 떠오르는 물건이었다. 

"300년 동안 살면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손에 쥐어진 동그란 물체는 환상이 아니었다. 손에 느껴지는 감각은 현실에 존재하는 물건임을 알려왔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넋이 나갈 정도였다.  

"이게 대체......."

"어떠냐?"

심후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냥 평범한 노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인간이 아닌 외계인처럼 느껴졌다. 

"현실을 어찌 받아들일지는 네가 판단할 문제다. 하지만 믿어라. 그러면 너도 나처럼 될 수 있다.

순간 심후의 두 눈에 욕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없는 자신에게 이런 능력이 주어진다고 생각하니 탐이 났다.

"내가 너한테 선물을 주는 이유는 별 거 아니다. 원래는 모든 것을 대충 놔두고 떠날 생각이었다.

"떠나다뇨?"

"인간의 탈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지만 지금까지 그러지 못한 이유는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