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한 일은 안전구역에서 재정비를 하는 일이었다. 예전에 써먹었던 후드와 복면은 착용하지 않고 고글만 쓰고 움직였지만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최하급 마력 포션을 몇 병 더 산 심후는 일반 소총을 들고는 안전 구역을 벗어났다. 고글을 쓴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초보로 보였다.
패션 아이템이야 누구라도 쓸 수 있는 거니 아무도 심후가 유저들을 잡던 도플갱어 유저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어디 보자.'
유저들을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으나 오늘의 사냥감은 일반 유저가 아니었다.
자신을 따라하는 도플갱어 유저였다.
'저 쪽이 시끄럽네.'
사람들이 몰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넓게 포위망을 형성했지만 워낙 동원된 유저가 많아서 빠져나갈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심후는 그들 사이에 끼어 움직이지 않고 적당히 목표를 확인했다.
'날뛰고 있군.'
머신건을 들고 날뛰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매우 빼빼마른 몸이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얼굴도 자신이 했던 것처럼 복면과 고글을 착용해 알 수 없었다. 사냥감을 앞에 둔 심후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다 건물로 들어갔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도플개어 유저가 날뛰는 것이 한 눈에 보일 것 같은 빌딩이었다.
건물 내부는 어두웠다.
좀비들이 갑자기 튀어나오기도 해 놀라기도 했으나 손에 든 머신건 앞에 초보 구역의 좀비들은 픽픽 쓰러졌다. 옥상에 도착해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직도 전투 중이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머신건을 집어넣고 베이직 저격용 소총을 꺼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저격용 소총은 굉장히 구형으로 보였다. 자동으로 계속 발사하는 것이 아닌 볼트 액션으로 한 번 쏠 때마다 총알을 유저가 직접 장전해줘야만 했다.
굉장히 귀찮긴 했다. 옥상의 난간에 기댄 심후는 유저들에게서 떨어져 도망치고 있는 도플갱어 유저를 바라보았다.
현재 싸우고 있는 도플갱어 유저는 양 손에 서브머신건을 들고 설치고 있었다. 빠른 민첩과 양손에 든 서브머신건의 연사로 유저들을 농락하는 중이었다.
'방어구도 꽤 좋은 걸 입었나보네.'
보기에는 가끔 총에 맞기도 하는데 살짝 움찔할 뿐 큰 데미지를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현실이라면 아무리 몸이 보호되고 있어도 머리에 총알이 박히면 끝이었다.
허나 게임에서는 다른 법칙이 존재했다.
'머리가 데미지가 더 많이 들어가긴 하지만 맞추기는 몸통이 더 쉬우니까.'
몸통을 조준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유저가 너무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에 맞추기가 어려웠다. 쏘려고 하는 순간 조준을 벗어나는 움직임을 보이니 살짝 짜증이 났다.
'알고 피하는 것도 아닌데.'
심후는 다시 조준하며 방아쇠를 당기려 했으나 하지 못했다. '멈출 때까지 기다릴 순 없다.
그럼 예측 사격뿐이지.'심후는 다시 조준하기 시작했다. 유저의 움직임에 맞춰 조준을 움직이자 총구가 이리 저리 흔들리는 것이 지휘자의 손에 들린 지휘봉 같았다.
'조금 더 빠르게.'
예측을 하며 움직여보니 움직임이 조금씩 잡히기 시작했다. 언제든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하고 호흡을 고르며 집중했다.
쏘는 순간의 반동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마지막에 총알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갈 수 있으니 집중해야 했다.
'지금!'
실패해도 상관없었다.
요인 암살과 같은 상황이라면 단 번에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지만 현재 도플갱어 유저는 전투 중이었다. 한 번 실패해서 빗나간다 하더라도 심후의 저격을 알아차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방아쇠를 당기자 강한 반동이 느껴졌다. 허나 집중력을 총동원해 총을 고정하니 흔들림이 상당히 적었다.
총알이 발사되는 순간 커다란 총성이 울렸으나 아무도 심후가 있는 쪽을 바라보거나 하지 않았다.
"이야아아아아아!"
다만 저격당한 충격에 쓰러진 도플갱어 유저를 집중해서 잡기에 바빴다. 하지만 유저들이 막타를 치기 전 심후는 다시 한 번 저격했다.
'무슨!'
저격을 당하고 사망 판정을 받은 에린은 어이가 없었다. 캐릭터의 사망 자체가 화나는 것은 아니었다.
유저들에게 싸움을 걸었을 때부터 이미 각오한 일로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문제는 자신이 어떤 공격에 당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머신건은 아니야.'
신나게 휘저으며 싸우다가 가끔 총격에 당하기도 했다. 권총부터 소총, 머신건에 샷건까지 안 맞아본 것이 없었다. 하지만 방어구까지 비싼 돈 주고 사 입은 효과가 있어 에린은 쉽게 죽지 않았다.
'뭐지? 설마 다른 도시까지 갔다 온 유저인가?'
가능성은 딱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한 방에 바닥에 패대기칠 정도의 위력을 가진 총은 초보자 구역에서는 팔지 않았다.
'이제 방법을 바꿔야 하나?'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안전구역의 경계선이었다. 유저들과 싸울 때는 언제나 좀비로 변신한 상태에서 싸웠기 때문에 PK 카운트가 올라가지 않았다.
만약 같은 유저인 상황에서 한 명이라도 죽였다면 사망한 순간 광장이 아닌 감옥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한 번 더 가보자.'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돈이 날아가는 것도 참을 수 있었다. 적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돈 몇 푼 잃는 것은 그다지 무섭지 않은 에린이었다.
자신이 죽은 자리에 다시 도착했을 때 주변에 모여드는 존재들이 있었다. 도플갱어 유저들을 싫어하는 이들과 사냥을 즐기는 이들이었다.
"빨리 변신하시지?"
"흥!"
에린은 달리기 시작했다. 에린을 노리는 이들도 달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달리는 와중에도 에린은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수시로 등 뒤를 살피는 것은 물론 좌우를 함께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응?'
그러다 이상한 것을 하나 보았다.
'저건?'
멀지 않은 빌딩 위의 난간에 기대고 있는 존재가 보였다.
'저격수?'
좀비일 가능성이 있었지만 에린의 감은 저격수라고 말하고 있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자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원래라면 좀비들을 끌고 다니다 유저들과 한 바탕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저격수가 있다면 좀비를 끌고 다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일단 확인부터!'
남들은 죽으면 받게 될 페널티 때문에 전전긍긍하지만 에린은 아무런 두려움을 보이지 않았다.
죽으면 죽는 것이다. 게임이니까. 실패를 한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게임이니까.
게임을 어떤 형식으로 즐기든 그것은 유저의 자유.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모두 개인의 선택이었다. 게임을 통해 명성을 높이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기피하겠지만 에린의 선택은 오직 하나였다.
정면돌파. 선택지는 처음부터 하나밖에 없었다.
"변신했다!"
"잡아!"
에린이 좀비로 변신하자마자 총격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 전에 강한 총격이 에린을 덮쳤다.
'큭!'
저격당한 캐릭터의 몸이 뒤로 날아가는 상황에서 에린은 정확하게 저격수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저격수의 앞에서 불꽃이 번쩍 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끝이었다.
에린은 다시 안전 구역의 광장에서 부활했다.
'그래, 거기에 숨어서 날 노렸단 말이지?'
"후후후후후후후후후."
에린은 즐거웠다.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부활하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동안 계속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하하하!"
배에서 시작한 간질거리는 느낌을 토해내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즐거웠다. 눈 속에 타오르는 것은 적의가 아닌 환희였다.
재미있었다. 싸우는 것이 재미있었다. 새로운 적이 나타난 것이 즐거웠다.
쉬지 않고 달려 빌딩에 도착했다. 재정비를 해야 했지만 조금이라도 꾸물거리다 저격수가 도망친다면 죽음을 선사할 수 없기에 서둘렀다.
'서브 머신건의 총알은 충분해!'
계단을 뛰어올라가며 서브 머신건의 탄약을 확인했다. 양손에 든 서브 머신건에는 아직도 1만발씩 총알이 남아있었다.
옥상의 문 앞에 선 에린은 잠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상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빌딩 안으로 들어온 자신을 봤을 수도 있었다.
아직 옥상에 그대로 있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함정을 파고 기다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벽에 기대어 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며 경첩은 비명을 질렀다. 기분 나쁜 마찰음이 울렸다.
문이 열리고 나서 다섯을 센 후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그 순간 에린은 다시 몸을 뒤로 뺐다.
머신건의 총성이 계속해서 울리며 총탄이 날아왔다.
"하하하하하!"
열린 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머신건의 총탄은 문과 마주한 벽에 고스란히 박히며 소음을 만들어냈다.
살벌하게 벽을 파고들며 파편이 튀는 모습은 상대의 기세를 고스란히 대변해주었다.
"좋아! 진짜 좋다고!"
흥이 난 에린은 자세를 낮추고 서브머신건을 문 아래쪽으로 슬쩍 내밀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조준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를 견제하기 위한 사격이었다.
효과가 있었는지 상대의 총격이 멈췄다.
'과연?'
상대가 총에 맞았을까 기대하며 살짝 고개를 내밀었을 때 보았다.
문을 향해 여전히 머신건을 겨누고 있는 유저를.
총성이 다시 울렸다. 에린의 가슴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에린은 다시 선 자세로 문가에 서브머신건만 내민 채 견제했다. 상대의 총격이 멈추자 계속 방아쇠를 당긴 채로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처음부터 계속 민첩을 찍어왔기에 속도에는 자신 있었다. 한두 방 머신건에 맞는다 하더라도 바로 죽을 정도는 되지 않았다.
문밖으로 뛰어나가며 좀비로 변신한 에린은 옥상에서 다른 곳으로 도망가는 유저를 보았다.
"어딜 가!"
"도망가!"
대답을 바라고 외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답이 돌아왔다.
"어?"
살짝 방심한 순간 상대는 팔만 뒤로 한 채 권총을 쐈다.
대충 쏜 것 같았는데 에린의 몸에 명중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에린은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엄폐물 뒤로 숨은 뒤였다.
속도는 빠르지 않지만 주변의 상황을 최대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몸놀림은 초보와 같았어.'
에린과는 전혀 다른 타입이었다.
'대단한데? 설마 힘을 최대한 올린 근접 전투가 전문인가?'
상대가 숨은 엄폐물을 주의 깊게 살피며 조용히 다가가는 걸음마다 긴장이 폭증했다.
'그래도 넌 내 상대가 안 돼!'
에린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느리다면 현재 상황에서는 자신이 유리했다. 하지만 현실은 에린의 생각과 다르게 돌아갔다.
에린은 엄폐물의 왼쪽으로 빠르게 돌아들어갔다. 그리고 숨어 있으리라 생각한 장소를 양손에 든 서브 머신건으로 난사했다.
셀 수 없는 총알이 순식간에 난장판을 만들어냈다. 허나 엉망이 되어 쓰러져 있어야 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
멍청한 소리를 내뱉는 순간 뒤통수에 무엇인가가 닿았다. 에린은 재빨리 몸을 돌리며 반격하려 했지만 상대가 빨랐다.
저격용 소총의 총성이 옥상의 공기를 날카롭게 찢었다. 에린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더니 몸이 머리를 따라 팽이처럼 회전하며 날아갔다.
피가 흩뿌려졌다. 치명상이었다. 노리쇠가 밀려나며 탄피가 허공을 날았다.
유저가 기계적으로 노리쇠를 움직여 다시 총알을 장전한 순간 에린은 구르던 것을 멈췄다.
"잘 가라."
몸을 일으키며 반격하려는 순간 다시 저격용 소총의 강력한 총탄이 에린의 머리에 박혔다.
그것으로 에린의 몸은 빛의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몸이 흩어지고 난 뒤에 남은 것은 에린이 사용하던 서브 머신건이었다.
"득템. 돈도 많네. 100골드나 주고. 역시 갑부를 잡는 게 좋아."
서브 머신건을 챙기며 에린을 죽인 유저는 웃었다.
"또 달려오면 좋겠는데."
에린을 기다리며 옥상을 떠나지 않는 유저의 정체는 심후였다.